정영선

1 # 잠자는 사과나무를 읽다[ | ]

좌판 위의 한 사과는 꼭지를 아직 매달고 있다
만져보니 그 꼭지 단단하기가 돌 같다
사과의 배꼽으로 통하던 문
나무로 가는 출입구의 열쇠를 깊이 씨앗 속에 묻은 채
문을 잠갔다
저 문안에서는
방긋빙긋 저 혼자 한없이 사춘기의 연애에 빠질
꽃잎들이 자고 있으리라
바람을 불러 제 몸을 마구 흔드는 나무의 몸짓도
잠 속에서 고요하고
깜깜한 땅 속에서 문을 따고
사과의 길을 걸을, 그래서 사과로 일어설
마지막 떨어지기까지, 혹은 따내어지기까지
무너지지 않고
사과 한 알의 아름다움을 반짝일
금빛 정신도 아득히 뒤치고 있으리라
사람들 살 속에 박힌 죄성의 씨앗같은
사과의 상징을 쥐고 있는 후대의 사과들이
깊이 잠들어 있으리라
나무에서 따내어지던 순간
마지막 수액을 모아 입구의 문을 영원히 닫은 돌문 앞에서
나는 누군가의 잠을 지나온 나의 내력을 더듬는다

2 # 몸안의 길[ | ]

삶은 밤을 두 쪽으로 갈랐을 때
몸을 쭉 뻗고 죽은 밤벌레를 본다
단단한 껍질에
말랑한 입이 문질러 뚫었을 입구의 흔적이 없다
밤의 살 속에 대고 오물오물 속삭일 때
밤의 온몸은 나팔 귀였던가
덤비는 바람에 결코 열지 않은 몸을
고슴도치바늘 방어막으로 도사린 마음을
계절 내내 단장해 온 단 맛과 함께
밤벌레에게 서둘러 내어주었다
앙 다문 껍데기를 지나면
저런 무방비로
금기의 사랑이 기다리는 줄 알았던 게다 그는
그 후엔 이런 추락도 있는 줄 알았던 게다
그가 한번 차지한 밤의 속은 끝끝내 그의 것이다
밤알 하나를 버리면서
밤벌레가 밀고간 부드러움의 힘을 생각한다
쪼개어도 끝내 장작개비인 내가
네 속으로 구멍 하나 내지 못한 이유 알겠다


  1995년 『현대시학』 등단
2003년 시집『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문학동네) 발간||

시인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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