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을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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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도전을 위한 변명 - 혁명가 정도전,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설계하다

   

2 책소개 (알라딘)

'정도전을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에는 조선초 파워게임에서 밀려 억울하게 죽은 정도전의 진면목을 바로 알자는 저자의 뜻이 담겨 있다. 저자는 <삼봉집>,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등 풍부한 사료를 토대로 역사에 의해 왜곡된 정도전의 인물됨과 사상,개혁정신을 복원한다.

조선 개국공신,이상주의자,사술의 대가,마키아벨리적인 권모술수의 정치가 등으로 다양하게 평가받는 정도전에 대해 저자는 "비록 군주제의 틀 안에서였지만 정도전은 동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백성을 위한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분투했던 개혁가,혁명가"였다고 평가한다.


1997년 초판 출간 당시 '정도전에 관한 최고의 책'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대중의 관심과 더불어 정도전 재조명 열풍의 첫 신호탄을 쏘아올린 <정도전을 위한 변명>이 17년 만에 독자들을 찾아왔다. 당시 「말」지 기자였던 저자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세대교체를 이루는 데 주인공 역할을 한 혁명가 정도전에게 마음을 빼앗겨 3년간 그의 삶과 사상을 추적한 끝에 이 책을 출간했다.

탐사 기자 특유의 취재 능력을 바탕으로 정도전에 관한 수많은 사료와 연구 성과를 섭렵해 재구성해낸 이 책은 그간 역사 속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사료 창고 속에 처박혀 있던 정도전을 새롭게 조명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삼봉 정도전, 그는 누구인가? 고려 말의 구습을 청산하고 이성계와 더불어 새로운 조선을 건국함으로써 정치적 세대교체를 이룬 주역이 바로 정도전이다. 선비인가 하면 정략가였고, 유교 이론가인가 하면 군사 지휘자였으며, 동북아 정세의 변화를 거시적 안목으로 읽어내고 새로운 유교사상을 받아들인 사상가이자 정치가이자 시대의 혁명가였다.

시와 음악과 병법에도 능통했으며, 수많은 저술을 남긴 뛰어난 사상가였다. 그러나 태조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500년간 만고역적의 대명사로 낙인찍혀왔다. 그는 왜 역적의 누명을 쓸 수밖에 없었을까? 이 책은 정도전의 파란만장한 삶과 죽음을 집요하게 파고든 기록을 통해 그의 목소리를 대신해 역사의 진실을 들려준다.

3 #

[ 서평 ] 정도전을 위한 변명

98년에 쓴 글인데 이것도 아마 역사관련 수업의 리포트였던것 같다.

이 책의 저자인 조유식씨는 현재 인터넷 서점 aladdin.co.kr의 CEO로 일하고 있다.

정도전이 어떤 인간인지 이 수업을 듣기 전에는 전혀 몰랐고 수업시간에 배운것은 너무도 단편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알았다. 아무리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지만 이정도의 실천적 지식인이 이렇게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묻혀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이다. 저자는 비전공자이고 왠만하면 믿지말라고들 하는 기자의 신분이지만 나름대로 충분한 자료를 검토한 뒤에 썼다는 흔적을 남겼다. 게다가 애정없는 전공자가 쓴 단조로운 글에 비해 애정을 가진 비전공자가 훨씬 생동감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꽤 다양한 관점을 여러 단락으로 나누어 차례로 설명하고 있다. 삼봉의 최후/어린 시절/어린 시절의 정치상황/입지/귀양/사상의 확립/역성혁명 결의/역성혁명 진행/정치가로서의 삼봉/삼봉의 인본주의/요동 정벌운동/왕조 확립/에필로그 등으로 종종 테마가 명확하지 않은 감도 있지만 비교적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면서 시기적으로 가장 특징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다.

내가 가장 놀랍게 접한 부분은 왕자의 난이 결코 집안 내부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정치세력간의 쿠데타였고 단지 그 보스에 해당하는 인물이 부자지간이었다는 것 뿐이었다. 이런 상황을 알고 나서야 왜 이성계가 함흥차사라는 말을 만들어내었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모든것을 힘으로 박탈한 것이다. 물론 이방원은 자신이 세자가 되지 못한것에 불만이 많았을 것이고 그것이 쿠데타의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개국 초기에 정도전이 행한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는 구세력이나 이질집단을 철저히 배제하는 형태로 나타났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구심점인 이방원의 아래에 모였던 것이다. 게다가 정도전은 재상 중심주의를 추구하였으나 이방원은 왕권 중심을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정치적 입장이 전혀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유학 자체는 결코 왕권 중심제를 옹호하지 않는다. 맹자처럼 원리주의적인 철인은 '무능한 왕은 필부이지 왕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정도전 역시 맹자처럼 원리주의적인 인간이었다. 일찌기 출중한 문장력으로 정계에 진출한 그는 신돈의 개혁정치를 지지했던 신진 사대부였고 신돈의 실각 후에도 꾸준히 반원정책을 펴나가 결국 유배당하고 만다. 그는 유배기간동안 마지막 개혁군주 공민왕의 몰락 이후 역사의 흐름을 돌려놓으려는 세력이 있음을 간파하고 새로운 흐름이 돌아올 때를 기다린 것이다. 으레 선조들은 유배기간 동안 저술활동에 들어가거나 사상을 확립시켜나갔는데 정도전은 이 기간동안 백성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을 절감하였고 이를 위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그 사이에 이성계라는 깨끗한 세력과 연을 맺고 역성혁명을 생각하게 된다. 정몽주의 추천에 의해 근 십여년만에 재기한 그는 사신으로 발탁되어 매우 위험스러운 사신업무를 뛰어난 추진력과 문장력으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시기가 안좋은 것을 알고 그는 외직을 청하여 시기를 기다린다. 지방 수령직을 수행하면서 그는 민본정치를 실현해나갔고 그 기다림은 이성계의 부각으로 곧 때를 만나게 되었다. 최영과 공동집권에 성공한 이성계는 얼마 안있어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자가 된다. 다시 정계에 복귀한 정도전은 역시 특유의 강직함으로 일을 진행하였다. 개혁에 방해가 되자 자신의 스승이자 보수파의 거두인 이색이나 자신의 지기인 정몽주를 물러나게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옹호하고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명을 끌어들였고 정도전은 이를 단호히 물리쳤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정도전은 보수파의 반격에 의해 다시 유배자가 되는 비운도 겪었다. 그러다가 이방원의 정몽주 격살로 보수파는 흔들렸고 그 와중에 조선이 건국되었다. 정도전은 지향하는 바가 뚜렷하며 그것을 향해서 꿋꿋하게 걷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강한 추진력이란 것은 그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서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정도전은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분명하게 알고있던 사람이다. 도덕성을 상실한 집단에는 결코 속하지 않으려 했으며 고려의 신하일 때도 조선의 신하일 때도 백성을 위한 일이 아니면 결코 하지 않으려 했다. 정황적으로는 사대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언제고 그는 자주성이라는 깃발을 들 수 있는 사람이었고 종종 그것을 강하게 고수하여 정치적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 왕이 그르면 분명하게 간하여 고칠줄 아는 신하였고 체제를 올바르게 구축하는것이 나라를 바른 길로 이끌어 나가는 길임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 그가 요동정벌과 더불어 필생의 사업으로 삼았던 재상중심제의 실현이다. 이런 올바른 사고 아래서 강한 추진력을 보여주었으니 그는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요동정벌론은 다시한번 생각해볼만한 것이다. 원명교체기를 목도한 그는 분명 권력의 공백기가 생기리라고 보았고 고려때 이후로 꾸준히 추진해오던 요동정벌을 해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방원의 주장대로 개국 초기 어수선하고 힘도 강하지 않은 상황에서 요동을 정벌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는 것일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는 왕조 교체기라 국가를 안정시키는 것이 필요했고 그것을 위해서는 일단 사병혁파가 필요했다. 사병혁파를 위하여 요동정벌이라는 명분 하에 국력을 집결하는 것은 정도전이 보기에 국가 안정에 가장 빠른 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주적 입장을 가진 이들이 정치를 하게되면 아무래도 도덕적으로도 깨끗하여 안정된 정치를 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일이 잘풀렸으면 진짜로 요동정벌을 수행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조선을 확립하고 더 나아가 요동정벌을 추진하는 등 진취적인 인간이었던 정도전은 이방원의 쿠데타에 의해 패배하였다. 이방원은 도덕적인 결함을 안고 즉위한 왕이었지만 그 자신이 매우 영리한 인간이어서 어떻게든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민본주의를 구현하려하고 국가 체계를 갖추는 등 강한 추진력으로 조선을 단단히 세웠고 그렇게 배경을 만들어 세종이 문치를 가능하게 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것은 의미가 없지만 조선이 문약이란 중병을 앓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삼봉과 같은 인물이 꾸준히 나오는 전통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가 수세로 몰린 것은 고려 중기 이후이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침체기를 겪은 우리나라는 발해의 존재로 인해 그나마 자주성을 가질 수 있었고 고려 초기에 가졌던 적극성은 왕조 교체 이후 보여주었던 건강성이었다. 그것을 조선에서 다시한번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정도전이었는데 그의 실각으로 그러한 꿈은 물건너가버렸다. 그 이후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구악을 청산하기 전에 일제에 의한 수탈을 겪었고 그 오욕의 역사를 씻지 못한채 군부독재기를 맞이하였다. 지금은 정말 오랜만에 겪어보는 정권교체기이건만 야합으로 이루어진 정권이라 그런지 그리 건강하다는 느낌은 들지않는다. 삼봉과 같은 인물이 귀감이 되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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