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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파 록커 해설지==
==민족파 록커 해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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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이라고 하면 세상에는 여러가지 중요한 것이 많다.
'환상'이라고 하면 세상에는 여러가지 중요한 것이 많다.

2022년 4월 18일 (월) 11:45 판

1 개요

2 민족파 록커 해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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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이라고 하면 세상에는 여러가지 중요한 것이 많다. 아니 중요하기 때문에 [환상]이라고 불리는 것일테다. 여기에 소개하게 된 이정우라고 하는 뮤지션도 지금에 와서는 일본에서는 물론이지만, 한국내에서조차 반쯤 [환상 속의] 존재다. 아시아 무명가수 시리즈를 출시하면서 협력해 준 한국 친구들 중에도 그=이정우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산울림의 김창완 씨조차도 "그게 누구예요?"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가 하는 음악을 듣고나면 누구든 어떤 감동과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민요와 고전예능의 요소를 가미한, 이라고 말로는 쉽게 하지만 이정우 같은 어디까지나 록으로 자신의 음악으로 만드는 뮤지션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스타일의 록, 우리는 대략 이를 민족파 록이라 부르는데, 한국에서 그런 류의 선구적 존재가 된 것은 78년 승복을 입고 노래하며 센세이셔널한 데뷔전을 치른 김태곤이다. 그는 그 후 '반야심경'을 록으로 삼는 말도 안되는 파이오니어 정신을 선보이곤 했다. 김태곤은 지난 몇년간 조용하다 지난 4월 모처럼 신작을 발표해 변함없는 민족파 록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일본에서도 「왜 불러」나 「고래사냥」으로 알려진 송창식도 80년에 앨범 「가나다라」에서 장구와 꽹과리를 도입해 [민족파 록]에 접근하고 있다. 최근에는 영화 '고래사냥'에서의 열연으로 일본에서도 알려진 로커 "작은 거인"=김수철이 한국 전통음악을 계속 연구하고 있다. 그 성과의 한 토막은 지난해 5월 발표된 영화 '고래사냥 II' 사운드트랙 앨범에서 선보였다. 한국에 있어서 이같은 전통음악, 민속악기에 대한 관심은 민주화, 근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전통문화가 상실될까 우려한데 따른 것이다. 물론 일본 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속이 깊다. 자국과 전통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러한 액티브하고 진지한 조류가 있는 한편, 역시 유행가, 대중가요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좀처럼 이 같은 [민족파]는 주목받거나 히트하지는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젊은 세대에게는 '그런 사람도 있지만요'라는 정도에서 그치는 수준이다. 이정우가 지금까지 84년, 85년 각 1장씩 총 2장의 뛰어난 음반을 발표했는데도 전혀 주목받지 못한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그가 소속된 SRB(서라벌) 음반 제작진은 이 두 장이 별다른 성과를 남기지 못한 이유로

  1. 한국 민족음악적 요소가 너무 많이 포함되어 대중가요로서 세련되지 못한 느낌을 준다는 것
  2. 그때문에 서구적이지 않고 너무 독창성이 강해 한국 음악평론가들이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
  3. 일반인에게 받아들여질만한 애교스런 얼굴이 아니었다는 것

이상의 3가지를 이유로 들고 있다. (3)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을수도 있겠으나, (1)(2)에 대해서는 한국의 록/대중가요의 앞날을 고려하더라도 많은 문제점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한 것으로 전해지는 이정우는 경위는 분명치 않지만 고아로 자랐다. 따라서 생년월일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아마 현재 27, 28세쯤 될 것이다. 그러나 노래에 관해서는 일찍부터 재능에 눈을 떴던 듯 15세 무렵에 이미 각지의 밤무대(캬바레)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이후 꾸준히 이런 활동으로 생계를 이어왔다. 한국에서는 록을 하려는 경우 미군을 상대로 하는 가게에서 기량을 닦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정우는 보다 대중적인 필드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결국 그 일이 그로 하여금 단순한 서구화와는 다른 독자적인 음악적 기반, 오리지널리티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84년에 데뷔 앨범을 발표하게 된 것도 그의 재능이 입소문으로 프로덕션 측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데뷔 전에는 록, 대중가요, 팝, 국악을 가리지 않고 노래를 많이 불렀던 것 같고, 특히 팝 커버는 뛰어났다고 한다. 그것도 단순한 커버가 아니라 독자적인 해석으로 소화해낸 걸 들려주고 있었다. 무대매너도 어느정도 인정을 받았던 것 같다. 대부분 혼자서 공연하는데 노래는 물론이거니와 특히 주목할 것은 표정이 풍부한 연기력이었다. 그가 무대에서 울리고 웃기는 설득력은 노래만큼이나 큰 평판을 받았다. 파워풀한 무대와 달리 성격은 온화 그 자체로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없었다고 하는데, 그 속에 품고 있던 헝그리 정신은 역시 어린 시절부터의 고생이 뒷받침되었으리라. 하지만 음악에 있어서는 과도한 열의를 쏟아 붓고 있다. 그에게는 아내와 6살 아이가 있는데 때로는 가정을 팽개치고 유랑길에 오르기도 하지만 과연 그만한 인물에 걸맞은 반려자로서 그의 아내는 그의 열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간섭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앨범에 대해 소개해보자.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그의 2장의 앨범에서 뽑은 11곡이 들어있다. 왜 전곡이 수록되지 않았냐면, 빠진 곡은 록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트로트 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곡들을 댄서블하고 펑키한 넘버들과 더불어 소화해내야 해야 하는 것 또한 한국의 음악 상황의 한 단편이다. 뮤지션도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여 보다 많은 대중에게 어필하는 쪽이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 헤비메탈 보컬리스트가 트로트만으로 1장의 앨범을 만들어 버리는 일도 있다. 그러나 본인은 그러한 행동에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84년의 1집 수록곡이 1~6, 나머지 7~11은 85년 발표된 2집에서 발췌한 것이다. 서서히 어레인지가 하드하고 타이트해진다. 그 중에서도 특필해 두고 싶은 것은, 여기서 드라이브감 풍부한 기타 솜씨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 한국에서 넘버원으로 손꼽히는 전설의 락 기타리스트인 이준상이라는 것. 그는 70년대 중반부터 활동했음에도 앨범 발매는 물론 한 번도 눈에 띄게 주목받은 적이 없다. 하지만 뮤지션 사이에서는 많은 동경과 존경을 현재까지도 모으고 있는 존재다. 그 역시도 이정우만큼 너무 이른 나이에 재능을 발휘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렇게 해협을 넘어 더 많은 이들의 귀에 이정우의 음악이 닿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실 작년 가을부터 올해에 걸쳐 그는 생각과는 달리 또 유랑의 길을 떠나고 말았다.이 CD가 일본에서 발매될 줄도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던 차에 7월 어느 날 훌쩍 SRB 음반에 나타나 다음 앨범에 대한 의욕을 밝히듯 신곡을 몇곡 던져두고는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1987년, 유아사 마나부(음악평론가)

3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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