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광화문광장에 서 있는 이순신의 동상

 
100원 주화의 앞면

이순신(1545 ~ 1598)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조선 중기의 무관이다.

1 개요[ | ]

이순신 ()
Yi Sun-shin

2 관련 정보[ | ]

3 생애[ | ]

글로벌세계대백과 "이순신"
李舜臣(1545∼1598) 임진왜란 때의 명장.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 본관은 덕수이며, 서울 건천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용맹하였으며 자라면서 무예에 뜻을 두어 말타기와 활쏘기를 연마하였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북방의 경비를 맡다가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1591년 유성룡의 추천으로 진도 군수를 지내다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승진되었다.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특히 세계 최초의 철갑선을 고안하였는데 이것이 거북선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 균의 요청을 받고 출전하여 옥포·사천·한산도·안골포·부산포 등 가는 곳마다에서 승리하였다. 이듬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3도의 수군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명의 원병과 합세하여 적군의 후방을 교란시켰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일본 수군의 앞길을 막는 등, 적의 작전에 차질을 주었다. 전쟁이 일단 중지되자 군사훈련과 군비 확충에 힘쓰다가, 1597년 원 균의 모함과 일본의 이간책으로 심한 고문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판중추 부사로 있던 정 탁의 변호로 풀려나와 권 율 휘하에서 백의 종군하게 되었다. 이순신을 대신하여 통제사가 된 원 균은 안일과 방탕한 생활로 군비를 축냈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대패하여 전사하니 수군은 전멸 상태에 빠졌다. 사태의 긴박함을 느낀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을 통제사로 임명하여 적을 막게 하였다. 이때 그는 모친상을 당하였으나 이를 돌볼 겨를도 없이 싸움터에 도착하였다. 남은 배는 겨우 12척뿐이고 군사들의 사기는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 조정에서는 수군을 폐하라고 명령을 내렸으나, 그는 자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얕잡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였다. 이에 그는 적은 배로 명량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다시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수하는 왜군을 노량 앞바다에서 맞아 섬멸하였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이순신은 적의 유탄을 맞고 54세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그는 지극한 충성,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 등을 볼 때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며, 임진왜란 중 나라의 운명을 홀로 지탱한 민족적 영웅이며 은인이었다. 그의 죽음을 안 선조는 특사를 보내어 조문하고, 시호를 내리고 선무일등공신의 호를 주어 덕풍군에 봉했으며, 우의정 및 좌의정을 추증하였다. 고향에는 충신문을 세우고, 정조 때에 영의정을 추증하고 임금이 친히 지은 비문을 하사하였다. 저서로 <이충무공 전서>가 있으며 이 속에 있는 <난중일기>는 유명하다. 사당은 충무의 충렬사, 아산의 현충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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