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폰 비스마르크

1 개요[ | ]

Bismarck, Otto Eduard Leopold, von Fürst
Otto Eduard Leopold Fürst von Bismarck-Schönhausen(독일어)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트 폰 비스마르크쇤하우젠 후작(1815년 4월 1일 ~ 1898년 7월 30일)
  • 독일을 통일하여 독일 제국을 건설한 프로이센의 외교관이자 정치인
  • 프로이센의 수상으로 임명된 후,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써서 프로이센ㆍ오스트리아, 프로이센ㆍ프랑스 전쟁에서 승리
  • 1871년에 독일 통일을 완성한 후, 신제국의 재상이 되었음
  • 유럽 외교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안으로는 가톨릭교도,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였음

   

  • 1836년, 21세 청년때의 비스마르크

 

  • 붉은색이 북독일 연방이며, 남독일의 국가들과 알자스-로렌은 1871년 북독일 연방과 함께 독일 제국으로 편입되었다

2 평가[ | ]

역사가들은 독일의 정치 문화에서 지난 125년 동안 비스마르크의 이미지가 지닌 중요성과 기능과 내용에 관한 폭넓은 합의를 이루어냈다. 독일 역사에서 최초로 통일을 이룩했던 정치가로 독일을 진정한 강대국 대열에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수 백년간 지속된 독일권의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강력한 민족국가로서의 독일제국을 탄생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1860년대 초반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 독일권의 통합과정에서 적지 않은 장애 요인들과 직면했는데 그럴 때마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여 그러한 장애요인들을 효율적으로 제거했다. 독일제국 수상으로 있을 때 비스마르크는 '세계 최초로 의료보험, 산재보험, 노인복지법' 등 정책을 실행하여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란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남겼다. 이 부분에 대해선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 라는 평가가 있다.

3 비판[ | ]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책 실현과 관련하여 여론의 공감대를 얻고자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과 여론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대해 배려하는 자세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 있어서 부정적 시각이 있다. 비스마르크는 철저한 '현실정치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그의 자세는 정책에 대한 불만 세력의 결집 및 활동의 원인이 되기도 했으며 훗날 빌헬름 2세와의 갈등에서 대중들이나 정당들로부터 인기를 얻지 못했다는 점에 있어서 부정적인 평가가 있다.

4 같이 보기[ | ]

5 참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