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와 나폴레옹

Jmnote bot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4월 5일 (목) 22:37 판 (Pinkcrimson 거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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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

박정희와 나폴레옹 - 20세기의 영웅에 나타난 한국인의 세계 인식(1)
  • 신동아 2004.03의 노컷 버전--;;

2 총 맞은 넘버 1[ | ]

넘버 2와 넘버 3 간의 세력 다툼, 즉 ‘나와바리’ 쟁탈전 또는 충성 경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다툼은 총격전이 되고 말았는데, 와중에 넘버 1이 저녁 먹고 시바스리걸 위스키를 홀짝대다 말고 총을 여러 방 맞는다. 결국 넘버 1은 젊은 여자 가수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둔다.

영화의 한 장면임에 틀림없을 듯한 이런 종류의 대단한 임종은 아무나 맞는 게 아니다. 조폭 두목이나 그럴 수 있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이렇게 죽기란 무척 어렵다.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죽고 싶지만 잘 안 된다. 일단 부하직원들이 권총을 찬 채 회식 자리에 들랑거리는 직장을 구하기가 무척 어렵다.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하고 빽을 아무리 써도 어렵다.

그리고 한 국가의 넘버 1, 즉 대통령이나 수상이 이렇게 죽는 경우란 아주 드물다. 국가 지도자들도 가끔 테러리스트나 정신이상자의 위협을 받기도 하지만, 특히 민주주의 국가인 경우, 넘버 2나 넘버 3인 총리나 여당 당수, 심지어 국방장관까지도 대개는 평소에 권총을 휴대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알려져 있다. 소지품 검사를 안 해봤으니 내가 어찌 알겠는가?)

아무튼 자기가 키운 부하의 32구경 총알로 확인사살까지 당하고 여가수의 품에서 영영 밥숟갈을 놓친 넘버 1, 즉 ‘오야붕’이 있으니 바로 우리의 박정희 대통령 각하이시다. 박정희 이후의 대한민국 대통령들은 비록 감옥을 들랑거린 경우는 있으나, 대략 천수를 누릴 것 같으니 후배들을 위한 박통의 공로란 실로 이만저만 한 것이 아니라 하겠다.

박정희를 이상적인 지도자로 과대평가하려는 어이없고도 음험한 시도와 무관하게, 약간만 깊게 들여다보면 박정희의 삶과 생각은 한껏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민족주의자였지만 일본군 장교였고, 좌익이었다가 파시스트로 생을 마감했다. 청렴한 듯했지만 출세와 권력을 일찍부터 밝혔고, 웅대한 포부를 가진 듯했지만 내성적인 좀팽이였고, 지도자였지만 열등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 꽤나 복잡한 생의 앞자락을 들여다보니 나폴레옹과 이순신이라는 만고(萬古) ‘영웅’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독재자 박정희가 청년시절부터 숭배하고 영향을 받은 사람이 바로 그들, 나폴레옹과 이순신이었다.

3 나폴레옹이 되겠다는 산골 소년 정희[ | ]

어린 박정희는 영웅 숭배심에 불타는 소년이었다. (박정희의 이력에 대해서는 이기훈, <일제하 식민지 사범교육 - 대구사범학교를 중심으로>; 등이 실린 역사문제연구소 편, &제9호, 역사비평사, 2002의 특집 “식민지 경험과 박정희 시대”와 <박정희 전기>가 수록된 조갑제 씨의 개인홈페이지를 주로 참고했다.)

그는 대구사범학교에 다니던 소년 시절, 전체적으로 성적이 나빴다. 특히 수학ㆍ과학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역사 과목만은 관심이 많아 성적이 좋았으며 서양 영웅 전기를 탐독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플루타르크 영웅전ꡕ, ꡔ나폴레옹 전기ꡕ가 그것이었다. 그중에서 특히 ꡔ나폴레옹 전기ꡕ를 가장 열심히 읽었다. 소를 먹이면서도 나폴레옹 전기를 읽었다. 경북 벽지 출신 소년 박정희는 영웅 나폴레옹처럼 되고 싶었다.

“코르시카의 조그마한 섬에서 태어나서 군대에 들어간 이름 없는 시골청년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황제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너무도 흥미로웠습니다. 눈보라 치는 알프스 산맥을 백마를 타고 넘을 때의 모습! 정희 소년은 이 세상에 이 같이 멋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고 감탄했습니다.” (김종신, <박정희 대통령 - 농민의 아들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조갑제 씨 홈페이지에서 재인용)

박정희의 나폴레옹 숭배는 가히 사이코스러운 데마저 있었다. 사범학교에 다닐 때는 물론이고 졸업 후 문경초등학교에 근무할 때에도 하숙집 책상 위에 나폴레옹 초상을 걸어두었다. 뿐 아니라, 학교 숙직실에까지 붉은 망토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말을 탄 나폴레옹 초상화를 걸어둘 정도였다 한다. 박정희는 나폴레옹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박정희의 나폴레옹 숭배를 그의 개인적 성향이나 전기적 사실과 연관시킬만한 근거는 많다. 나폴레옹에 결부된 매우 흔한 상식적인 이미지를 박정희의 캐릭터와 결부시키면 된다. 즉 ‘키가 작고 열등감에 가득 차 있으며 야심을 내성적인 태도 속에 숨기고 있는 시골 출신’이라는 면에서 두 사람은 많은 공통점을 가진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다소 유치하고 날카롭지는 못하여 ‘박정희’라는 복잡다단하고 모순적인 정신과 그 형성과정을 들여다보는 데는 결정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나폴레옹 숭배와 관련해서 박정희는 결코 특별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의 많은 젊은이들이 나폴레옹, 즉 나파륜(拿破崙, 那破崙, 羅破崙 등으로 표기되었음)을 존경하거나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 키 작고 가난하며 내성적인 시골 소년이 한 둘이었겠는가? 더구나 박정희가 서양사에 이끌린 것은 대구사범의 일본인 역사 선생 사쿠마(佐久間)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고, 시골 벽지에서 자란 그가 발견할 수 있는 문화적 선망의 대상은 결코 독창적이거나 세련된 것이기 어려웠을 터이다. 1920-30년대의 조선인들은 누구나 나파륜을 잘 알고 있었고 박정희 정도의 이해 수준을 갖고 있었다.

4 나폴레옹이 되겠다는 인력거꾼 아들 복동이[ | ]

박정희가 8살이던 해 1925년, 1월 1일자 '동아일보' 어린이란에는 편지글 형식의 동화 한 편이 실려 있다. 경북 산골에서 자라난 박정희가 신문에 실린 동화를 읽었을 가능성은 아주 낮다. 하지만 동화는 박정희나 그 동년배들의 의식 형성에 끼친 당대 사회의 분위기를 보여줄만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 동화의 제목이 '편지 왕래 - ‘워싱톤’이 되려는 수남, ‘나파륜’이 된다는 복동';이다. 장래 희망이 미국의 아비라는 워싱턴(George Washington)인 부잣집 아들 수남이와, 장래 희망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1세라는 가난한 집 아들 복동이가 계층을 뛰어넘는 우정을 나눈다는 이야기다.

동화 속에서 나이가 예순이라는 복동이의 아버지는 인력거꾼이다. 효심 깊은 어린 복동이는 고생하시는 늙은 아버지가 인력거채를 놓게 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잡으며 열심히 공부한다. 만날 반에서 1등이다. 그런 복동이에게 친구 수남이가 ‘너는 왜 나폴레옹이 되고 싶니?’라 묻는다. 그러자 복동이는 ‘나파륜도 되려니와 인력거채도 잡어야 하지 않겠나?’고 답한다.

그러던 어느 날, 복동이의 결심을 더 굳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못된 술 취한 일본인 손님이 복동이 아버지와 시비가 붙었다. 질 안 좋은 오늘날의 취객들이 가끔 택시기사들에게 그러 듯, 인력거 요금도 안 주고 심지어 폭행까지 했다.

착한 아들 복동이는 이야기를 듣고 분하고 슬퍼서 밤새 울었다. 그리고 동화의 결미에서 ‘내가 기어이 성공하마. 인력거채를 잡는 나폴레옹이 되마.’고 워싱턴에게 다시 다짐한다.

이 짧은 동화에는 실로 첨예하고 중요한 몇 가지 코드가 있다. 그것은 곧 인력거꾼의 아들 복동이가 조선의 나폴레옹이 되어야 할 이유와 이어진다. 풀어보면 이야기에는 두 가지 모티프와 두 가지 해결 방안이 있다. 계층의 모티프, 즉 ‘가난의 설움’과 대중적 민족주의가 이야기를 만든 동력이다. 그리고 이는 영웅주의와 출세주의로 해결가능한 문제로 되어 있다.

먼저 나폴레옹과 결부된 계층의 모티프(가난의 설움)를 보자. 가난하지 않은 청소년이 어릴 때부터 ‘기어이 성공하겠다’는 다짐을 할 이유가 없다. 부잣집 소년들은 시골뜨기 나폴레옹을 비웃었던 육군사관학교의 동료처럼 되기는 쉬워도 열렬히 나폴레옹처럼 되고자 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중심의 문화와 행동양식을 배우고 익히고, 학벌과 유산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아주 당연한 것인양 그것(성공이나 출세)을 성취(성취라는 말조차 부적당한데)할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소년들은 이를 악물고, 혼자 측간에서 눈물을 짜가면서, 멸시와 분노를 이기며 ‘출세’에 다가가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책상 귀퉁이에 나폴레옹의 금언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따위를 써 붙여 놓는다.(‘하면 된다’가 박정희 시대 한국의 국시였다는 것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하루 3시간 밖에 안 잤다’는 사실조차 가난한 청년들에게는 자극이 된다. 1929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에는 ‘세 시간 밖에 안 잔 영웅 나폴레옹도 반드시 낮잠으로 보충하였을 것’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다. 나폴레옹이 세 시간 밖에 안 잤다는, 확인되기 어려운 사실도 1920년대의 대중에게 상식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니, 노인네도 아닌데 3시간만 자고 어떻게 버티겠나? 그리고 불가능이 없기는 왜 없겠나? 불가능이 없기는커녕 오히려 가난하고 ‘빽’없는 청년의 앞길에는 온통 불가능투성이다. 하지만 절대로 안 불가능한 척, 졸리지 않은 척 해야 한다. 인력거꾼이거나 농투성이인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또는 홀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그리고 ‘가난함’은 키 작음과 상관관계가 있다. 빈곤이 만연했던 식민지 조선 같은 사회에서 키가 훤칠하고 발육상태가 좋은 아이가 가난한 집 아이일 확률은 매우 낮았을 것이다. 절대빈곤이 사라진(?) 근래에도 외양은 계급을 반영한다. 어떻게 타워팰리스 아이와 난곡 달동네 아이가 사이즈나 때깔이 같을 수 있겠는가? 절대 그럴 수 없고, 이는 타워팰리스 주민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아무튼 나폴레옹의 키는 5.65피트, 즉 172cm 정도로 작기는커녕 당시 프랑스 남성의 평균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한다. (나폴레옹의 사이즈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조갑제 씨는 나폴레옹의 키가 168cm이었다 한다.) 그리고 박정희가 165cm. (조씨는 이번에도 역시 박정희를 과대평가한 게 아닌가 한다.) 과연 이 키가 사실이라면 왜 두 남자가 키 작고 도전적인 남자의 전형으로 꼽히는지 알 수가 없다. 결코 작은 키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최초로 탄핵 받는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노무현 대통령의 키는 168cm, 아들이 너무 키만 커 또 낭패를 보고 ‘차떼기’의 덤태기를 쓴 이회창 씨의 키는 164cm. 외모만 박정희 흉내내고 번번이 ‘불복’하고 이번에 비서가 돈도 많이 떼먹어 속상한 이인제 씨는 165cm에 불과하다.

5 한 대 맞으면 두 대 때리는 민족주의[ | ]

둘째, 이야기의 이념적 모티프는 민족주의이다. 동화는 기본적으로 선과 악의 이분법을 상정하고 만들어진다. 어른들의 이야기보다 동화의 교훈성과 계몽성은 훨씬 간명하고 노골적이다. 1925년의 동화에서 아버지를 때리고 괴롭힌 악인이 일본인이라는 것은 작지만 결정적인 설정이다.

1920년대 중반 조선사회의 ‘식민화’의 정도와 이 동화는 관계가 있다. 만약 1930년대 중반쯤이었다면 이처럼 일본 민간인이 일상적 공간에서 명백히 ‘나쁜 놈’으로 등장하는 동화를 창작ㆍ발표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프랑스령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이 박정희 뿐 아니라, 조선의 복동이들과 연결될 이유는 너무 많고, 그 연결은 자연스럽다. 나폴레옹은 본국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던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났고, 어머니가 잘 먹지 못하여 마음껏 쑥쑥 못 크고 조그맣게 태어나고 자라났다. 잘 나가는 귀족 집안의 자제들과 함께 파리의 육군사관학교를 다녔다. 계급적ㆍ민족적 차별을 견디며 이를 악물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많은 조선 소년들이 스스로의 자의식적 이미지를 ‘키 작고 가난한 시골 소년’으로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런 자아상은 단지 사춘기나 그 언저리의 소년들이 가질 수 있는 보편적 열등감과 관계 깊을 것이다. 아마 요즘도 많은 청소년들이 스스로 ‘돈 없고 못 생긴 나’로 자아상으로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민족적이며 집단적인 것이 채색을 가하거나 그렇기 때문에 ‘꼭 출세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요즘 청소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식민지 시기의 ‘가난하고 못난 나’는 민족과 동일시된다. 못난 민족과 내가 동일시되게끔 가르쳤다. 일본인들이 그렇게 가르쳐서 그랬던 것만이 아니라, 조선인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럴 근거도 아주 많았다. ‘우리는 패배한 민족이며 가난하고 못난 민족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처럼 일어서야 한다.’ 이것은 지난 100여년을 규정하는 한국인(내지는 그 주류)의 결정적인 정서이자 생각이었다.

청소년기에 수행되는 민족주의 교육, 특히 ‘국민교육’은 청소년들로 하여금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드는 경향이 크다. 그래서 막무가내로 ‘국민교육헌장’이나 ‘애국가 4절’을 외게 한다거나 교련교육을 받게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청소년기에는 패거리 의식과 패거리 문화에 자연스럽게 잘 젖는다. 청소년은 또래끼리, 동네끼리, 학교끼리 모여놀고 패싸움을 벌이기를 좋아하고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 ‘왕따’ 같은 ‘배타’행위로 자기정체성을 실행해보고자 하는 충동이 있다. 이 시기에 주입되는 민족의식과 국민적 귀속감은 ‘애국심’이 아니라, 이러한 패거리의식과 절대로 본질상 일치한다고 보인다.(전인권, ꡔ남자의 탄생ꡕ, 푸른숲, 2003을 보라.) 따라서 청소년기의 교육은 민주적 인권의식이나 시민의식을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고 우선되어야 한다.

박정희 같은 1920년대의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저 커서 나폴레옹 같은 넘이 될래요’한 것이 아니라(내버려두면 걔들이 프랑스 황제가 섬나라 출신인지 알게 뭐냐?) 어른들이 아들ㆍ조카들에게 나폴레옹이 되라고 주입했으며, 그것이 당대의 민족주의가 현상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다른 자료가 있다.

방정환이 만든 식민지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아동잡지 '어린이'(1928년 1월호)에 실린 글이다. 「상무적 소년이 되라」가 제목인 이 글은 애꾸왕 궁예의 어린 시절 일화를 들어 ‘상무(尙武 : 무력을 숭상함)’를 주장하더니 느닷없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은 13세의 소년으로서 불란서 아이와 이태리 아이를 차별한다는 이유로 파리 육사 교관을 죽으라고 때린 바로 그 소년이 뒷날에 세계의 저 유명한 나폴레옹이 된 것을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어린이ꡕ 독자 여러분이 모두 잘 아는 나폴레옹 이야기를 통해서 주고 싶은 구체적인 삶의 교훈은, 결코 남에게 눌리지 않고 남이 나를 한 대 때리면 두 대를 때려 보복하라는 것이었다. 직접 인용해본다.

“그렇게 세상에서 큰일을 한 사람들의 소년시대를 살펴보면 대개 8-9세 때부터 패기가 발발하야 결코 남에게 눌리어 지내지를 아니하였습니다. 여러분! 조선의 소년 소녀 여러분에게 특히 바라는 것은 이 패기를 가지라는 말씀이외다. 나는 잘났다! 나는 굳센 사람이다! 네가 한 대를 때리면 나는 두 대를 도로 때려 주리라!”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때려야 한다는 것은 ‘조선 사람이 밤낮 큰소리나 치고 붓이나 들 줄을 알았지 용기 있게 선뜻 나서는 백성이 아니었고 그 때문에 오늘의 경우를 당한’ 것이라는 역사 인식 때문이다.

이러한 저항적 또는 전투적 민족주의적 교육을 위해 동원된 대중적 표상이 나폴레옹이었던 것이다. 결국 나폴레옹 숭배자 박정희는 전혀 독특한 청소년도, 사이코도 아닌 것이다. 단지 역사 교사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여느 청소년들처럼 숭배하는 사람을 가진 젊은이였던 것이다. 오히려 그는 ‘촌놈’이었기 때문에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상식적인 인물을 우상으로 모실 수 있었는지 모른다. 특히 20살이 넘어서도 계속 그러했다는 것은 그의 정신발달이 좀 늦었거나 균형감각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6 조선에 온 최초의 나폴레옹들[ | ]

현재 확인되는 ‘공식적인’ 기록으로 가장 먼저 나폴레옹이 언급된 문헌은 「한성신보」이다. 「한성신보」는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정복을 위해 창간한 일제의 신문이었다. 독자가 일부 지식인층에만 한정되었고 일본어판과 국한문판이 같이 발행된 신문이기에 중요성은 낮다. 이 신문의 1895년 11월 7일부터 1896년 1월 26일자 사이에 「나파륜전」이 실려있었다.

일본 열도에 이미 나폴레옹이 상륙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나폴레옹을 좋아했던 것은 정복욕에 불탄 이웃의 제국주의자들뿐만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이제 막 가르치기 시작한 대한제국 정부의 공식적인 서양사 교육의 주요 소재이기도 했다. 1898년 11월 4일, 학부(현재의 교육부)가 공립소학교에 내린 역사교육 관련 지침에는 “법국은 무슨 이유로 대란(大亂)하며 나파륜 제일황(第一皇)은 무엇 때문에 영웅인가?”라는 언급이 있다.

그리고 만약 1907-8년쯤에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은?’ 같은 인기투표를 했다면 나폴레옹은 분명히 워싱턴ㆍ비스마르크 등과 함께 수위 경쟁을 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일본을 원수로 알던 「대한매일신보」에 포진한 민족주의자들도 나폴레옹을 좋아하고 ‘조선의 나폴레옹’을 기다려 마지않았다.

그중 특히 '대한매일신보」가 나폴레옹의 대중적 보급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최석하가 쓴 논설 「한국이 희망하는 인물」(1907년 10월 4일), 단재 신채호가 쓴 논설 「영웅을 길러내는 기계」(1908년 8월 18일) 등에서 나폴레옹은 논증의 중요한 재료이다. 신채호는 1900년대의 가장 대표적 민족주의 논객이며 영웅대망론의 주창자이기도 했는데, 그는 이 글에서 영웅을 만드는 것은 결국 영웅을 필요로 하는(해야하는) 국민들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나라 안에 영웅될 재목, 즉 ‘웅재(雄材)’가 있다 해도 시기ㆍ질투해서 사람을 키우지 못하는 문화라면 나폴레옹 같은 영웅이 나올 리 없다는 것이다. 이 또한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 아닌가. 조선 사람은 시기 질투 때문에 인재를 못 키운다는.

또한 1907년에 는 ꡔ법황나파륜전法皇拿巴倫傳ꡕ을 단행본으로 묶었으며 박문서관에서 역시 1907년에 나온 '나파륜 전사(戰史)ꡕ도 꽤 넓은 범위의 독자를 갖고 있었다. 이 책은 1894년에 일본에서 나온 동명의 책을 번역한 것이다.

이러한 매체와 책에 실린 것은 주로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주로 읽힌 것들이지만, 나폴레옹이라는 표상의 사용이 계몽주의에 매혹된 지식인들만의 것이 아니고, 상당히 대중적인 범위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가 있다. 나폴레옹은 판소리 대본 에도 등장한다.

용궁의 각종 어패물들이 서로 충성을 뽐내며 용왕의 약재로 지목된 육지 토끼를 잡아오겠노라고 재주 자랑을 할 때 주인공 자라는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 "지나(支那)에서 세상을 주름잡던 초패왕(楚覇王)도 해하성(垓下城)에서 패하였고 유럽에서 각국을 응시하던 나파륜(拿破崙)도 해도(海島) 중에도 갇혔는데 요마한 네 용맹을 뉘 앞에서 번쩍이며, 또는 무슨 지식이 있노라고 내 지혜를 헤아리느냐.“

에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사례는 하나의 새로운 문화 코드가 어떻게 전통적인 것과 결합하며 대중에게 수용되는지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아마도 이 판소리를 듣는 사람이나 판소리 창본을 정리한 사람이나 프랑스가 어디에 있는지도 정확히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낯선 인물인 나폴레옹을 초나라 패왕, 즉 항우를 연결시키면 된다. 그렇게 이해하고 ‘한국화’하는 것이 1900년대 단계의 대중적 앎인 것이다. 두 왕은 전혀 다른 역사적 배경에서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전쟁을 수행했다. 면모도 달랐다. 항우는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라는 말을 만들게 할 정도의 천하장사였지만 나폴레옹은 아담한 남자의 상징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천하를 호령한 정복자이며 결국 실패한 비극적인 영웅으로서 공통점을 지닌다. 그리하여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동양의 영웅 초패왕은 수입된 지 불과 2-3년밖에 안된 나폴레옹이라는 전혀 새로운 표상과 아무 무리 없이 병치될 수 있다. 그렇게 거리낌 없이 병치하는 것 자체가 대중적 앎의 형식이기도 하다. 앎은 맥락 하에서만 성립하는데 익숙한 맥락을 조정하는 작업이 일어나지 않으면 새로운 앎은 성립되지 않는다. 판소리 창본에서 두 영웅의 ‘고난’이 병치된다. 두 영웅은 ‘해하성에서 패하거나’, ‘해도에 갇힌다.’

이런 식의 연결을 보여주는 예는 또 있다. 1908년 ꡔ소년ꡕ 창간호에 실렸던 최남선의 유명한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3연의 나폴레옹도 매우 오래된 영웅과 함께 등장한다.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 지금까지 있거든 통기(通寄)하고 나서 보아라. / 진시황, 나파륜, 너희들이냐. / 누구 누구 누구냐 너희 역시 내게는 굽히도다.” 문학사에 길이 남을 이 시에서 나폴레옹은 또 다른 통일 중국 최초의 공식적 황제이며 대정복자인 진시황과 나란히 놓일 인물로 포착된 것이다.

7 전쟁 천재냐 입신출세의 화신이냐[ | ]

그러니까 판소리 이나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 나폴레옹은 정복자이며 영웅으로서, 조공국의 신민으로 죽 살고 급기야 이웃나라의 식민지가 된 조선인들이 머리 속에 막연히 그려보는 ‘황제’나 ‘대제’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전혀 있을 수 없는, 그러나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는 대단한 정복자가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이라는 영웅이 지닌 다양한 면모는 근대의 한국인들에게 미묘하게 다른 맥락에서 해석되어 왔다. 먼저 영웅대망론의 시대인 1900년대 후반의 '법황 나파륜전法皇拿巴倫傳ꡕ이나 ꡔ나파륜 전사(戰史)ꡕ 등에서 나폴레옹은 군사 영웅 그 자체이다. 망해가는 나라의 지식인들은 군사 영웅이 필요하다고 간절히 생각했다.

1907년판 박문서관본 ꡔ나파륜 전사ꡕ를 펴보면 상당히 당황하게 된다. 나폴레옹을 처음부터 ‘천성(天成)의 전투아(戰鬪兒)’, 즉 하늘이 낸 전쟁 천재라 지칭하는 이 책은 나폴레옹의 전쟁 기록만 따로 떼서 매우 상세하게 번역한 책이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어디서 나서 어떻게 성장했고 어떤 드라마틱한 과정을 겪으며 황제의 자리에까지 등극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당장 처음부터 군사 천재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정벌 전쟁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앞의 인력거꾼 아들 복동이나 박정희의 경우, 즉 1920-30년대의 나폴레옹은 1900년대의 한국인에게 포착된 나폴레옹과 전혀 다른 맥락을 가지고 있다. 저 어린이들에게 나폴레옹은 계층적ㆍ민족적 차별과 분노를 입신출세로 푸는 자의 의미를 지닌다. 입신출세는 1920-30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도 삶의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기어이 성공하여’ 나폴레옹 같은 이가 되고자 한 복동이나 박정희는 좀 이상한 아이들 같다. 입신출세가 남에게 괄시 안 받고 부모 자식 적당히 봉양하며 잘 먹고 잘 사는 정도면 되는 것 아닌가? 그냥 훌륭한 사람도 많은데 나폴레옹만큼 파란만장한 생을 살 영웅이 될 필요가 있는가? 나폴레옹은 만세에 하나 날까 말까 한 영웅인데 감히 시골 소년이 그를 꿈꾸어도 되나?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박정희는 나폴레옹처럼 긴 칼을 차고 싶어서 육군사관학교에 갔다고 한다.

그래서 문제는 당시의 영웅주의의 문제로 다시 돌아간다. 역사를 영웅의 창조물로 해석하는 것, 그리고 영웅이 되어야 민족을 구하고, 동시에 나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20세기 초반의 사고였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어떤 경우에도 나폴레옹이 자유ㆍ평등ㆍ박애라는 프랑스혁명 정신의 전파자라는 것, 그리하여 당시 민주주의 후진국이었던 독일의 헤겔이나 베토벤이 그를 위해 헌사를 바칠 것을 주저치 않았다는 것은 조선인들에게 별로 안 중요했다는 점이다. 조선의 1920년대 신청년들이 혁명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중적으로 프랑스혁명의 근대정신은 이해되기 어려웠거나, 황제로 등극한 나폴레옹이 자유ㆍ평등ㆍ박애의 메신저라는 모순 자체가 너무 복잡한 것이었을 수 있다.

혹시 독자 여러분 중에 나폴레옹을 존경하는 분들이 계시는지? 혹 ‘그렇다’고 말한 분이 있다면, 상당히 위험한 경우라 사료된다. 직업이 ‘정치인’이거나 국적이 프랑스가 아닐 경우에 그렇다. 정치인은 아무나 존경한다고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막스 갈로의 나폴레옹 전기가 프랑스에서 1997년에 출간되자 온 프랑스 사회가 나폴레옹 재조명 열기에 들떴다 한다. 그러나 건전한 한국의 생활인일 경우, 이제 나폴레옹을 존경할 이유란 별로 없다.

그런데 초등학생ㆍ중학생 아들딸에게 역사상 인물 중 누구를 존경하는지 물어보라. 아마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지만 간혹 나폴레옹을 존경한다고 말할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특별히 키가 작거나 가난한 경우가 아니라면,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아이가 18세기말에 코르시카 섬에서 태어난 야심가를 존경하는 것은 정상인가? 정상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아이들이 보는 ‘세계 위인전’ 속에 여전히 나폴레옹은 건재하기 때문이다. 현재 서점에서 팔리고 있는 아이들 책 중에 나폴레옹을 소재로 한 것이 대충 세어봐도 약 30종은 되는 듯하다. 나폴레옹의 성공담은 보편성을 가진 것이기도 하다.

8 영웅시대의 들머리[ | ]

어떤 사회적 맥락에서 20세기 한국의 영웅이 되어왔는가를 살피면 대중과 지도자가 교호작용하며 만들어온 한국 근-현대사의 궤적이 다르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면모를 지닌 인물이 진정한 영웅인가를 묻는 대신에 어떤 인물이, 왜, 어떤 사람들에 의해 영웅으로 받들어져 왔느냐를 물어야 한다. 이는 당대인의 이념적 지향 뿐 아니라,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속 깊은 욕망까지 보여줄 수 있다.

영웅시대의 들머리는 1900년대였다. 나라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던 때였다. 그래서 영웅주의의 시대가 열렸다. 20세기 조선의 젊은이들이 숭배하던 외국의 위인은 단지 나폴레옹만은 아니었다. 영웅대망론이 풍미하고 영웅주의적 역사관이 형성되던 1900년대로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다양한 맥락에서 여러 역사적 영웅들이 한국인들 앞에 부각되었다.

먼저 죽 일별해보자. 제일 먼저 나폴레옹, 비스마르크, 워싱턴이 있었고 링컨과 카필드 같은 미국 대통령, 잔다르크와 가리발디 같은 유럽의 국가 영웅들이 있었다. 또한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이순신 같은 장군님들이 우리의 영웅으로 크게 뜨기 시작한 때도 1900년대부터였다. 혁명사상과 사회주의가 전 조선사회를 풍미했던 1920년대에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인물도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1925년 1월 1일자 ;동아일보」의 어린이 면 특집은 <남의 나라 잘난 이들, 어렸을 때 하던 일>이었다. 이 자리에 세 사람의 어린 시절과 공헌이 소개되었는데, 장자크 루소 그리고 마르크스와 레닌이었다. 1920년대는 이념의 시대였던 것이다.

1930년대가 되자, 이광수를 비롯한 민족개량주의자들이 한국사의 다양한 인물을 부각하여 문화민족주의의 수단으로 삼았다. 이순신을 필두로 세종대왕, 수양대군이 재조명받았다. 이들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이 활발하게 창작되어 대중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사극 붐’이 이때에도 일어났던 것인데, 이 역사소설로부터 만들어진 대중 사극의 이야기 기법은 지금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히틀러, 뭇솔리니, 장개석, 스탈린 같은 엽기적인 지도자들이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영웅이 되고 싶었던 1960-70년대 한국의 넘버 1, 박정희 대통령의 최후로 시작했으니 일단 그 이야기로 끝을 맺어보자. 강의 시간에 대학 1-2학년생들에게 저 삽교호 방조제가 준공되던 1979년 10월 26일 밤의 희비극적 파티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학생들이 그렇게 좋아라, 재밌어라 할 수가 없다. 특히, 기록만 보면 성격이 상당히 안 좋은 걸로 되어있는 차지철 경호실장이 문제의 여가수였던 심수봉 씨에게 했다던 대사- ‘넌 얼굴이 안되니 병풍 뒤에서 노래를 불러라’나(2003년 10월 김용옥 선생과의 인터뷰에서 심수봉 씨는 이런 사실을 부인했다.), 김재규 정보부장이 쳤던 상당히 수사적인 대사, 즉 ‘이 버러지 같은...’,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같은 대사까지 곁들이면 거의 자지러진다.

왜 그렇게 그 이야기를 오달져 하는지 아이들에게 물어봤다. 예상치 못했던 답이 돌아온다. 1980년대 초-중반에 태어난 대부분의 대학 저학년생들은 박정희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어는 봤지만, 한번도 그 군국주의자의 최후와 전두환 정권의 탄생에 관한 역사이야기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호 통재. 조갑제 씨나 진중권 씨 같은 민간인들이 그렇게 침을 맞고 뱉어가며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공교육 차원의 근ㆍ현대사 교육은 워낙 제대로 안 되어 있는 것이다. “시험에 안 나오기 때문에요, 그 부분은 그냥 넘어가거든요, 선생님.”

9 #의견[ | ]

'조갑제 씨나 진중권 씨 같은 민간인들이 그렇게 침을 맞고 뱉어가며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이 부분을 읽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 -- 거북이 2004-8-6 2:24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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