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 이야기

Jmnote bot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4월 5일 (목) 22:37 판 (Pinkcrimson 거북이)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바벨탑 이야기

1 # 거북이[ | ]

어릴때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참 기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늘에 닿을까봐 말을 뒤섞었다는 그 이야기는 뭐랄까, 폭력을 쓰지 않고 상대방을 쓰러뜨린 그런 신묘한 작전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요즘 감각으로 생각해본다면 프로토콜 교란으로 인한 정보전의 승리정도로 바꿔 말해도 되겠네요. 그런 내용이 기독교 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니까 옛날 이야기인데도 참 모던하다 이런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그 나이 때 모던하다라고 생각하진 않았겠습니다만. ^^

 

대 피테르 브뢰겔, 바벨탑(1563)

이후 외국어를 공부할 때마다 답답했습니다. 왜 같은 말을 쓰면 될텐데 각자 다른 말을 쓰고 있을까. 공부하면 할수록 더욱 이상했습니다. 영어와 독일어처럼, 한국어와 일본어처럼 조금씩 비슷한 말들도 있지만 어떤 말들은 아예 저 밑바닥에서부터 근본적으로 다른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어는 SOV구조(주어-목적어-서술어)인데 필리핀의 타갈로그어는 VSO구조라고 하니 정말 많이 다른게지요. 동사부터 말을 하면 말이 될까요. 허허. 그런가하면 정말 인도-유럽어족과는 족보가 전혀 다른 바스크어 사용자들이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언저리에 살고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동떨어진 언어들은 서로 관계없는 곳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것일까요. 아직 공부를 얼마 못해서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되더라고요. 세계 공통어가 있어야겠다며 에스페란토를 만든 자멘호프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았습니다. 애석하게도 대개의 인공어들은 또 하나의 언어적 복잡성을 남기는 결과로 끝났지만요.

더욱 어이없었던 것은 수화도 언어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습니다. 수화가 해당 언어에 종속된다는 겁니다. 왜일까. 수화는 공통 기호를 사용하면 되는거 아닐까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수화사용자는 다른 한국인과 의사소통을 해야하니까 서로 같은 방식으로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한국인이 사용하는 어휘에 따라 한국의 수화단어(?)가 만들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수화의 문장 구조도 한국어에 따라서 만들어져야 했던 것이지요. 통신체계는 주변과 호환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뭐랄까 좀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가장 최근에 느낀 바벨의 혼돈은 철저하게 인공어인 프로그래밍 언어도 계속 다른 것들이 나온다는 겁니다. 조금씩 고쳐서 동일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쓰면 좋을것 같은데 그게 안되더라고요.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유를 조금씩은 알 것 같습니다. 하드웨어의 발달로 예전에 비해 더 많은 자원을 쓸 수 있게 되었고 그 양적 팽창은 자료구조의 질적 변화를 가져왔지요. 한때 컴퓨터에서 한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기적적으로 보였던 시절도 있었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예전에는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복잡한 기능도 지금은 사용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분명 개선만으로는 안되는 근본적인 개념 변화가 있었을 겁니다. 예를들어 예전에는 동영상을 주고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동영상을 숫자로 바꾸어 전송하고 그것으로 다시 영상을 재생할 수 있으니까요. 물리적인 환경변화가 소재 자체를 바꾼 셈입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을 말씀드리지요. 프로그래밍이란 것이 처음부터 영어권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현재 사용되는 대부분의 프로그래밍 언어들은 영어 문법을 따르고 있으며 로마자를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어 문법이므로 서구인들의 언어감각에 따라서 프로그래밍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한국적이지는 않지요. 그래서 한쪽에서는 한국어 프로그래밍 언어를 개발하려는 노력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즉 수화 뿐 아니라 프로그래밍 언어조차 한국어에 종속된다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왜 고종석이 “모국어는 내 감옥이다. 오래도록 나는 그 감옥 속을 어슬렁거렸다. 행복한 산책이었다.”라고까지 말했는지 이해도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왜 바벨의 혼돈이 존재할까라는 생각은 별로 안하고 삽니다. 외국어를 여전히 잘 못하고 있지만 그런대로 그 혼돈상태를 즐기고 있다고 할까요. 피할 수 없으니 즐기는 상황 말입니다. 그리고 한국어를 더 많이 알고싶어하고, 더 잘 쓰고싶어하고 있지요. 원래 언어 실력은 그 언어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일수록 잘 안늘고 아무 생각없이 열심히 외우는 사람이 더 많이 는다고 합니다. 저는 고민하는 타입이라 그런지 언어 실력은 그닥 좋지 못해요.

어느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규약이라는 것은 넓든 좁든 적용의 한계가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요. 우리가 동일한 말을 쓴다고 하지만 보면 서로 딴소리를 자주 합니다. 의도적으로 오해를 하는 경우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조금씩 어긋납니다. 한국어를 쓴다 하더라도 한국어라는 약속은 각자에게 조금씩 다르게 규정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책이 재미있다고 말했을 때 누구는 그게 미스터리라서 재미있고 누구는 작가의 글솜씨 자체가 재미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미묘한 편차는 한다리 두다리를 건너가면 갈수록 조금씩 커집니다. 중심지의 법률이 지방까지 일사분란하게 적용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도 그런 연유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네요. 결국 모든 약속은 적용되는 범위를 가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즉 근본적으로 특정 프로토콜이 세상 전체에서 완벽하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말이지요. 자연과학쪽에 비교하자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10cm보다 작은 물체를 눈금 하나가 10cm인 자로 잴 수는 없거든요. 그리고 그 자를 대는 순간 물체는 움직이고 맙니다. 일상에서는 대체로 잴 수 있지만 원자, 분자단위로 가면 잴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까 많은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1번 학생의 답안을 채점할 때와 50번 학생의 답안을 채점할 때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았다라거나 왜 서울과 부산은 가끔 다른 단어를 사용할까 등의 의문점들이 해소된 것입니다. 인간은 그다지 일관성있는 존재도 아닐 뿐더러 또 언어도 그렇게 명확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노자도덕경의 첫머리에서 언어의 부정확성을 지적했고, 선불교에서는 도를 추구함에 있어서 언어를 아예 부정합니다. 라캉과 같은 사람도 언어의 기표와 기의 사이에 끊임없는 미끄러짐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요.

말이 길어졌습니다. 결론은 바벨적인 상황을 즐길 수 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 언어공부 열심히 하시고요. 다음 사전도 많이 사용해주세요. -- 거북이 2008-9-21 2:43 pm

2 같이 보기[ | ]

3 참고[ | ]

문서 댓글 ({{ doc_comments.length }})
{{ comment.name }} {{ comment.created | sns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