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시기의 정치이념

Pinkcrimson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7월 12일 (금) 08:59 판
메이지 시기의 새로운 정치 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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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근황파들이 토쿠가와 봉건질서의 해체를 서약함으로써 메이지 시대의 막이 올랐다.그들은 그들에 대항하는 내란을 진압하고 새로운 조직원리, 즉 오늘날 헌법으로 불리우는 ‘확정된 규범’ 틀에 바탕한 통합되고 안정된 관료적 질서의 구축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개시하였다. 그들의 목표는 자의적 통치의 종식,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건설적이자 또한 충성스런 행동에 있었다. 이러한 신체제의 추구와 병행하여 대부분이 당시의 서구사상으로부터 온 정치이념들이 일본의 근대 세계로의 진입을 위하여 학습되고 응용되었다. 비록 이론적으로는 각양 각색이였으나 새로운 사조 하나 하나가 예전의 봉건적 이데올로기와 의식적으로 대조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사회에 대한 연속적인 헌신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도 이용되었다. 이러한 신사상들의 변화를 정당화함에 있어서 과거의 윤리사상에서 경시되고 있던 행동의 폭넓은 다양성에 대하여 기댈만한 개념적 지주를 제공하였으니 이것이 곧 일본의 입헌적 재편성을 뒷받침하였던 것이다.


본론


입헌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과 나란히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근대라는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실천 이론을 마련하려는 폭넓고도 의욕적인 시도가 있었다. 사회적 행동과 실천의 내용과 수준을 다시 정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메이지 시기 정치사상은 급격하며 예측할 수 없는 역사의 단절과 하나의 사회적 가치로서의 충의의 행동에 대한 심리적 부담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시기에 보이는 서구사상에의 몰두는 바로 이러한 단절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서구사상의 수용은 단순히 문화적 모방이나 순수한 지적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심리적 불안 속에서 지적 체계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기 때문이다.    

정치사상에서 세 가지의 조류가 메이지 시기에 특히 중요하다. 첫째가 후쿠자와 유키치(1834~1901)와 니시 아마네(1829~1897)의 실리주의적 자유주의이다. 둘째가 우에키 에모리(1857~1892)와 나카에 쵸오민(1847~1901)이 주창한 자연권 사상, 그리고 셋째가 카토오 히로유키(1836~1916)와 니시무라 시게키(1828~1902)가 대표하는 이상주의적 사회진화론이다. 이들은 비록 사상적으로 일정한 시각을 공유했지만 근대 일본에 끼친 질적인 영향은 서로 달랐다. 예를 들면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은 메이지 사회의 각계층에 스며들어 있던 입신출세, 신분상승, 기업발흥 숭상의 열기를 인정하고 강화시켰다. 우에키 에모리와 나카에 쵸오민의 사상은 근대 일본에 이상주의적 저항의 필요성을 재확인하였다. 또 카토우 히로유키의 사상은 역사와 현재 사이에 새로운 접합을 마련함으로써 최근의 거대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충성의 중요성을 재정의 하였다.

우에키 에모리와 나카에 쵸오민은 동향으로 토사 출신이었고, 정당인 자유당의,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권력을 쥔 새로운 과두 지배자들에 대한 저항으로 대두한 자유민권운동의 이론적 지도자들이었다. 그 이외의 사람들, 후쿠자와 유키치, 니시 아마네, 카토우 히로유키, 그리고 니시무라는 ‘메이로쿠사(明六社)<A HREF="#FOOTNOTE1">1)</A>’라고 부르는 지성 언론인 모임의 지도적 구성원으로 명성을 모았다. 메이지유신 후 6년 뒤에 결성된 이 모임은 토론과 출판을 통하여 근대 일본에 ‘문명’과 ‘계몽’을 즉 ‘문명개화’를 불러 일으키는 중요한 운동을 선도하였다. 메이지 유신 직후, 메이로쿠샤 회원들은 과거 역사에 대한 우상파괴의 태도, 그리고 바로 직전인 토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의 문화와 절연한 필요성에서 인식의 바탕을 같이 하였다.

그들은 신유학의 형이상학적 윤리 안에는 자연법칙과 사회윤리의 사이에 뚜렷한 구별이 지어지지 않았으며 때문에 자연법칙이 도덕과 세속의 윤리처럼 보이게 마련이며 제도는 자연계의 불변의 규범에 따라 신성 불가침한 것으로 이해되는 점에 주목했다.

계몽주의를 신유학의 형이상학적 윤리에 대립되는 보편이론으로서 사상적으로 이용한 것은 매우 편리하고 효과적이었다. 총체적인 이념적 실체로서의 과거에 대한 신뢰성은 유신 이후 일본의 현실과 잘 부합됨직한 가설적인 대안에 의하여 감소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대체 이념으로서 계몽주의의 개념은 처음 반론 단계에서의 유용성을 잃게 되자 급속히 힘을 잃어갔다. 계몽주의란 결국 내적 일관성을 지닌 개념구조가 아니라 고도로 다원적이며 단일의 사상체계보다 더 단단한 것을 내보이는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1870년대 중반 이후 무엇이 근대 일본의 적절한 이념적 기초로 삼아져야 하느냐는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되는 시각들이 생겨났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실용주의적, 경험주의적 견해를 주장하였다. 자연권론자들인 우에키 에모리와 나카에 쵸오민은 민주적 정부의 기초로서 개인의 정신적 자주성에 관한 매력적인 이상주의적 개념을 들고 나섰다. 카토오 히로유키는 사회진화와 나라의 생존 이론에 근거한 국민국가론을 이상할 정도로 강력히 밀어 부쳤다.


후쿠자와 유키치<A HREF="#FOOTNOTE2">2)</A>.

후쿠자와는 사회를 자주적인 개인들로 치환시켰다. 후쿠자와의 방법은 전례가 없었으나 그의 논리는 복잡한 것이 아니였다. 인간이 선험적인 윤리적 절대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인간은 역사를 지속적으로 창조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윤리적 절대자가 없다면 역사는 상대적인 창조물의 잇단 집적물이며 그것이 타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 문화의 기초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가 깊이 파고들어 읽었던 영국의 공리주의 사상에서와 마찬가지로 후쿠자와 유키치는 개인의 활동이 그 확장인 국민사회로 수렴되는 사실을 필요조건으로 받아들였다. 일본인들은 역사적으로 중국문화와의 지나친 동화 때문에 강력한 자주적인 국가의 창설로 나아갈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에서 아마 가장 중요한 점은 그 때 일본에 필요한 새로운 개인주의를 이해함에 있어서 향락주의와 이상주의가 기묘히 결합을 이루어 놓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개인의 자주성이란 자신의 이익을 합리적으로 추구하는데 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영국의 철학적 급진주의와 마찬가지로 후쿠자와 유키치행동의 타당성과 부당성을 가름하는 최저한의 기준으로써 물질에서의 안락을 포함하는 개인적 행복의 자각을 지적하였다. 그는 이 급진적 유물론을 신유학의 형이상학 지상주의에 정면으로 맞서는 중심 이론으로 그리고 이후에 있을 사회 창건을 위한 하나 하나의 기초로 받아들였다.

니시 아마네<A HREF="#FOOTNOTE3">3)</A>.

니시 아마네가 신유학의 형이상학과 단절한 것은 1850년대 초 오규우의 저술을 정독하고 난 다음이었다. 자연과 윤리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두 개의 영역으로 분명히 선을 그은 오규우는 니시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니시 아마네는 1860년대 초 심지어는 유신 이후 유럽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오규우의 합리적 사상의 연구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정부란 것은 사회적 목적을 위하여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모양을 짠 기둥들로 구성된 것이라는 그의 상징적 정부론마저도 거의 확실히 오규우의 《벤도오》에서 끌어낸 이론이다. 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규우의 합리주의적 실리주의를 니시 아마네로 하여금 사회 진보의 일반이론으로 이해하게 만든 것은 서양의 공리주의와 경험주의 사상이었다. 오규우가 단지 현군이나 불출세의 천재들만 창조적 인식을 부여받은 존재로 본 반면 니시 아마네나 후쿠자와는 이 잠재력을 사회의 하층계급까지 포함하도록 일반화 시켰다. 따라서 오규우가 강조한 ‘구조화된 사회질서 즉 안민’을 니시 아마네는 사회적 ‘행복’으로 그 틀을 바꾼 것이다. 인간심리에 내재하는 합리적인 지각의 힘에 따라 인간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오로지 외적 규범을 소극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보다 나은 사회의 창조를 위한 능동적 요소라는 것 니시 아마네의 지론이었다.  


우에키 에모리나케에 쵸오민

후쿠자와 유키치나 니시 아마네의 쾌락주의와 공리주의와 구별되는 것으로 우에키 에모리와 나카에 쵸우민과 같은 자연권 이론 제창자들이 있었다. 우에키 에모리와 나카에 쵸오민 모두 1881~1885년 사이에 오오사카, 토교, 후쿠시마, 치치부 등 전국 도처에서 과두 지배층에 대항하여 일어난 급진적 저항 시위의 형태로 그 절정에 달했던 자유민권운동의 이론적 지도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우에키 에모리와 나카에 쵸우민은 자연권 이론과 인민주권이론에 근거하여 민주적으로 뽑힌 민선위원의 설립을 추구했으나 메이지 헌법은 이들의 주장을 받아주지 않았다. 역사가들이 이들의 정치적 실패를 성급하게 지적하지만 이들의 중요성은 이상주의적 실천이라는 끈질긴 전통을 개념적으로 재규정하는 일에 앞장섰던 지적 노력에 있다.

우에키 에모리나케에 쵸오민 두 헌신적인 개인적 행동과 참된 원리사이의 이론적 연결을 확립하고자 또 이 관계를 모든 인간이 저절로 가지고 있는 무엇, 즉 권리라는 것으로 재정의하고자 하였다. 이점에서 이들의 노력은 이론상 유물론적 실리주의를 지난날의 엘리트 중심적이며 권위주의적 쓰임새로부터 민중의 사상과 행동의 양식으로 일반화하려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노력과 궤를 같이 한다. 이를테면 우에키는 전통적 이상주의의 결점은 그 도덕적 엘리트주의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생명력 있는 실천이론은 특정한 상황에 대한 경험적인 인식과는 관계없이 유용한 것이어야만 한다. 자연권 이론이 중개 개념으로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이유는 엘리트 중심적 행동관을 정치적 참여를 인민 차원의 명령으로써 일반화 하고자 할 때 응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행동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란 현재의 혼란, 참상, 불안 때문이 아니라 그 내면의 확신이 보다 더 높은 자연의 규범 원리와 일치하기 때문인 것이다.


카토오 히로유키<A HREF="#FOOTNOTE4">4)</A>니시무라 시게키<A HREF="#FOOTNOTE5">5)</A>

공리주의 사상과 자연권 사상과는 극히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는 입장이 카토오 히로유키와 니시무라 시게키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그들은 합리적인 개인적 이익이라는 개념은 지지할 수 없는 또 사회에 이로운 지속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불신하면서 민권의 허여가 국력과 반드시 연결되리라는 논리는 오류라 하여 배척하였다. 1882년 카토오는 자신의 기본적인 견해를 《인권신설》을 통해 제시했는데 대단히 중요한 저술이다. 개성이란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과 나아가 역사적 문화에 의해 형성된다고 주장하면서 카토오는 일본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의 개념에다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시대적 필요에 알맞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카토오 히로유키는 단순히 역사적 신화의 부활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ꡐ국체ꡑ의 개념을 이용하여 지속적 변화와 발전 그 속에서 현재를 어떻게 이해하고 통제할 것인가를 강조하려 하였다. 특히 카토오 히로유키는 사회를 위한 충성스런 행동의 불변의 유효성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일본의 역사적 본질이라는 개념 속에 업적이라는 새로운 이상주의적 원리를 주입하였다. 따라서 전례가 없는 1868년의 반란은 그러한 성취의 하나로 보였고 계약을 맺는 의미로서의 근대적 헌법 이념이란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가의 진화과정에서 그 유효성이 인증된 것이다. 그때그때 충성스런 행동의 특성을 정의하고 또 재정의하며 행동 그 자체는 구체적으로 변화하더라도 행동에 사회적 목적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이 사회의 역사적 진화라는 것이었다. 개인의 이익이 사회적 목적을 규정할 수 없다고 하는 한편 진화에 대한 그의 개념은 어떻게 한 순간에서의 행동이 진보의 결말과 연결되며 따라서 예시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카토오의 견해 속에 담긴 의미는 카토오와 많은 점에서 생각을 같이하고 있던 메이로쿠샤의 창립회원인 니시무라 시게키가 정형화한 사상의 종합 속에 보인다.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 1866년 출판된 두 책 《일본도덕론》과 《도덕입국론》에서 니시무라는 근대국가로서 일본의 도덕적 기반에 관한 그의 생각을 세세히 밝혔다. 그는 유교적 인간주의와 서양의 과학적 실증주의를 결합한 새로운 윤리를 제창하였다. 그가 논한 실증주의의 장점은 사회적 진보의 과학적인 관리였다. 비록 인간적 의도의 도덕적 특성을 적절히 설명하는데에 실패했고 따라서 사회가 획득해야 할 마땅한 목표의 설정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실증주의의 경험주의적, 논리적 방법은 근대 생활에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유교의 결점은 심각한 것이었다. 혈연, 친족, 가게, 불평등한 상하 및 남녀 관계의 강조, 또 고대 세계에 대한 지나친 미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릇된 문화적 우월감, 이모든 것은 근대 일본에서는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더 나아가 유교에는 과학적 방법과 진보의 개념이 빠져있었다. 그러나 유교는 내던질 수 없는 본질적인 윤리적 진리를 전달해주고 있었다. 사화를 사는 인생의 의의는 기독교나 불교가 가르치듯 내세에서의 구원을 좇는데 있지 않고 인간적인 신뢰와 인간됨됨이에 대한 기본적 자각,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인을 위한 충직한 행동에 대한 신념, 이러한 것들 위에 구축된 사회의 각 구성원들간의 관계를 잘 갈고 닦아 나가는 데 있다고 유교는 가르쳤다. 니시무라의 결론은 유교의 이 세속적 윤리를 근대 일본의 생활 속에 하나의 값진 자양분으로써 통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카토오니시무라에 의한 이념적 확실성의 추구는 지적 우상타파주의로부터 근대적 보수주의로 완전히 선회하였다. 그들에 의하여 역사의 중요성이 사회의 존속과 발전을 위한 결정적 원리로서 확인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견해는 아직도 자신의 존속 여부가 확실치 않은 사회로서는 사치로 보일 수도 있는 합리적 향락주의와 비교할 때 사상적으로 비난받을 가능성이 훨씬 적은 중성의 논리에 정녕 새로운 초점과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결론


카토오와 니시무라의 입장이 합리적 사리사욕 이론과 자연권 이론보다 정부에 의하여 더 선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자의 두 사상은 그때 일본의 이론적 명제로서 여전히 그 중요성을 지녔다. 후쿠자와가 장려한 개인적 진취의 윤리는 메이지 시기의 뿌리깊은 유산으로서 카토오나 우에키와 나카에가 전개하였던 보다 엄격한 윤리와 대조를 이루며 남게된다. 비록 20세기에 들어 국가주의적 그리고 사회주의적 관점 때문에 중대한 재구성을 겪기는 하지만 우에키와 나카에가 민권운동을 통해 함양한 급진적인 저항정신 또한 살아남았다. 20세기의 저항운동은 민주화와 사회적 변혁을 요구함에 있어 명백히 우에키나 나카에와 같은 사람들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강조되어야 할 점은 여기에서 이야기한 세 가지의 사상의 체계가 상호 대조적인 이론적 전제에도 불구하고 1868년의 유신 이후 일본의 급격한 변신을 지탱해주는 어떤 묵시적인 목적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세 가지의 사상체계는 모두 산업주의와 입헌정치를 봉건적 농본주의와 막부 전재보다 우열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세 사상 모두 메이지유신을 과거와의 근본적인 단절로 보았다. 그러나 내용상 각기 다른 방법을 택하기는 하였지만 세 사상체계는 일본의 국가적 발전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선택적으로 역사를 이용하였다. 카토오의 ꡐ국체ꡑ이용, 후쿠자와 유키치의 끈기에 대한 언급 그리고 우에키 에모리의 도덕적 저항의 전통에 대한 논의 등은 모두 그 공통점의 실증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세 사상 모두가 근대라는 신시대를 위한 새로운 사상적으로 통합을 추구하였던 이는 그들의 각기 다른 이론적 구조 탓으로 간과하기 쉬운 대목이다. 각 사상체계는 혼란한 현재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과 이해를 내어놓고자 힘썼다. 그들의 서로 다른 시각에서 출발했지만 이상주의, 헌신의 정신, 그리고 경쟁적 에너지를 포함하는 기존의 실천윤리에 폭넓은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며 새로운 ꡐ계약ꡑ 즉 입헌 질서 안에서 이론적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요컨대 메이지유신이 20세기로 넘긴 유산은 조화라기보다는 한편의 장대한 논쟁이었다. 1900년 일본사회의 지적 구조는 아무리 뜯어보아도 다원적인 것이었으며 하나의 지배적인  이념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이후 태평양전쟁의 전야까지 수십년 간, 지적 분열은 깊어지면서 정치 생활의 질적인 면에 대한 분방한 비판과 항의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헌법체제 그 자체가 내부로부터 특히 입헌사상과 권력관계에 연관된 극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메이지 헌법체제의 창제자들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움직여 가게 된다.































참고서적.

쓰다 소키치, 『중국사상과 일본사상』, 소화, 1995.

구노 오사무․쓰루미 슌스케, 『일본의 근대 사상가』, 문학과지성사, 1994.

이마이 쥰․오자와 도미오, 『논쟁을 통해 본 일본사상』, 성균관 대학교 출판부, 2001.

석전일양,『일본사상사개론』,제이앤씨,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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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NAME="#FOOTNOTE1">

1) 1873년 7월, 미국대리공사의 임무를 마치고 귀국한 모리아리노리는 “미국에서는 학자가 전문분야에 따라 학사를 만들어 서로 학술을 연구하거나 그 성과를 발표해서 세상에 도움을 주고 있는데 일본에서도 이러한 학사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여 니시무라 시게키에게 먼저 뜻을 전달하고 다시 후쿠자와 유키치, 츠다 마미치, 니시 아마네, 나카무라 마사나오, 카토 히로유키, 미즈쿠리 슈헤, 미즈쿠리 린쇼, 스기 코지 등으로부터 동으를 얻어 메이로쿠사를 결성. 회원들은 모여서 담론을 하고 나중에는 비회원들에게도 공개. 1874년 4월부터 기관지 『메이로쿠 잡지』를 월 2회 내지 3회 간행하고 회원들이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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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의 계몽가, 교육가.

2) 일본의 계몽가, 교육가.

1858년 에도에 네덜란드 어학교인 난학숙(蘭學塾)을 열고, 1860년 이후 바쿠후[幕府] 견외사절(遣外使節)로 3회에 걸쳐 해외를 여행하며 새로운 문물을 접함. 1868년 학숙을 이전하면서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로 개칭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게이오기주쿠대학의 기원.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후 신정부의 초빙을 사양하고 교육과 언론활동에만 전념. 1873년 메이로쿠사[明六社]를 창설한 후로는 동인으로 활약하면서 실학(實學)을 장려하였으며, 부국강병을 주장하여 자본주의 발달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 1882년 《시사신보》를 창간하였고, 만년에는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하여 크게 공헌. 저서에는 《서양사정》(1866) 《학문의 권유》(1872) 《문명론의 개략》(1875) 등 후쿠자와 3부작을 비롯하여 《복옹자전(福翁自傳)》 《신여대학(新女大學)》 등이 있음.

1858년 에도에 네덜란드 어학교인 난학숙(蘭學塾)을 열고, 1860년 이후 바쿠후[幕府] 견외사절(遣外使節)로 3회에 걸쳐 해외를 여행하며 새로운 문물을 접함. 1868년 학숙을 이전하면서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로 개칭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게이오기주쿠대학의 기원. 메이지유신[明治維新] 후 신정부의 초빙을 사양하고 교육과 언론활동에만 전념. 1873년 메이로쿠사[明六社]를 창설한 후로는 동인으로 활약하면서 실학(實學)을 장려하였으며, 부국강병을 주장하여 자본주의 발달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 1882년 《시사신보》를 창간하였고, 만년에는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하여 크게 공헌. 저서에는 《서양사정》(1866) 《학문의 권유》(1872) 《문명론의 개략》(1875) 등 후쿠자와 3부작을 비롯하여 《복옹자전(福翁自傳)》 《신여대학(新女大學)》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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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NAME="#FOOTNOTE3">

3) 1829~97 계몽사상가(啓蒙思想家) 쓰와노(津和野)번 의사집안에서 출생. 카이세이쇼(開成所) 교수. 유신(維新)후 신정부에 들어가서 군인칙유(軍人勅諭)등을 기초. 군인정신의 확립에 공헌. 메이로쿠샤(明六社)에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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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NAME="#FOOTNOTE4">

4) 1836~1916 정치학자 타지마 이즈시번(但馬出石蕃)출신. [진정대의(真政大意)], [국체신론(国体新論)]등으로 천부인권(天賦人権)을 제창했지만 국회개설에는 시기상조론을 주장. 1882년 인권신설(人権新説)을 쓰고 국권론자(国権論者)로서의 입장을 명확히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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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NAME="#FOOTNOTE5">

5) 1828~1902 교육 도덕 사상가. 사쿠라번(佐倉蕃)출신. 메이로쿠샤(明六社)에 참가. 1876년 동경수신학사(東京修身学社)를 설립하고 87년 일본 홍도회(日本弘道会)로 확대 [일본 도덕론(日本道徳論)]을 간행하여 황실 중심의 국민도덕을 제창. 국수주의의 선구적 모델을 만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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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건 누군가가 레포트로 작성한 것이지만 내용은 나지타 테츠오의 '일본 근대 정치의 지적 토대'라는 책의 번역본을 그대로 베낀 것이다. 국내 번역 제목은 '근대 일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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