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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제플린..해체 그 이후..

월간 팝송 86년 6월호

  • Honeydrippers와 활동 시작한 로버트 프랜트

존 보넴의 사망에 이은 레드 제플린 해산 발표는 이들 그룹 구성원들이 어쩔수 없이 휴식기를 갖게 해주었다. 하지만 12년간을 한 그룹으로서 열심히 일하던 세 연주인들에게 어쩔수 없이 밀어닥친 이 활동 정지 상태는 견디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으나 그 중에서 존 폴 존스의 경우는 문제가 좀 덜 심각했다. 음악적인 역량은 제쳐두고라도 그는 대중들에게 그다지 뚜렷한 이미지라는 것을 심은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이미지에 생활을 맞출 필요가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제플린 해산후에도 과다한 기대에 억눌리지 않고 자기만의 생활을 얼마든지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플랜트와 페이지의 경우는 달랐다. 그들은 팬들의 우상이었으며 그들의 이미지는 한 세대 사람들의 뇌리속에 크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 보넴의 사망으로 제플린의 해산이 결정되자 이들은 여러가지 문제에 부딪혀야 했다. 우선 언젠가 이들이 다시 공연과 레코드 활동을 원한다고 할 때 어떤 종류의 음악을 연주할 수 있으며 또 누가 이들의 연주를 보러 오겠는가 하는 데에 대한 불안이었다.
분명한 것은 한가지 있었다. 어떤 단계를 취하든간에 극도로 신중한 태도로 임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팝 음악계에서는 한번 은퇴했다가 재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플린과 함께 활동할 때는 너무 편했기 때문에 난 우리 레코드나 투어, 그 이상의 것은 생각해보질 않았어요. 난 정말 완전히 제플린의 일에 정력을 다 소모했죠. 사회적으로 보아서는 내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더 좋았을뻔했죠.'
플랜트의 말이다.
존 보넴의 사망시 플랜트 다른 드럼 주자를 가입시켜 그룹 활동을 계속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만일 다른 드럼 주자가 가입한다면 매 공연때마다 그를 '임시 대역'이라고 소개하느라 정신적인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며 또 그 드럼 주자 당사자에게도 유쾌한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하튼 존 보넴의 죽음으로 인한 여러가지 일 덕분에 플랜트는 당황하고 혼란스러웠던 것이 사실이었고, 이런 이유로 그는 7개월간 외부와는 접촉을 끊은 채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 창법 달라진 첫 솔로 앨범

얼마후 플랜트는 친우 존 보넴의 사망으로 인한 슬픔에서 벗어나 예전의 그의 생활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즉 열광적인 팬들앞에서 실황 공연을 벌이는 드릴이며 정상급 연주인들과 함께 서로의 창작욕을 격려하여 앨범을 만드는 일 등이었다. 그래서 그는 영국 미들랜즈 주위의 소규모 클럽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팬들에게는 새로운 수퍼 그룹이 출현하리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소문인즉 역시 당시에 해산한 그룹 Yes와 레드 제프린 구성원들이 모여 그룹을 결성하리라는 것이었고 그 이름은 XYZ(예전 예스와 제플린 구성원들이란 뜻으로 Ex-Yes-Zepplin을 줄인 것임)가 되리라는 루머였다.
플랜트는 이 소문을 일축했지만 예전 예스의 Chris Squire와 지미 페이지가 함께 Cinema라는 그룹을 결성할 계획이 진행중인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도 예스의 구성원들이 제플린의 도움 없이 재결성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그후 플랜트는 꼭 일정한 구성원은 갖추지 않은채 밴드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 밴드는 별다른 사전 광고나 떠벌림 없이 뒤에 Honeydrippers로 변신하게 된다.
플랜트가 만일 자신이 이 밴드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면 공연을 취소하겠다고 흥행 업자들에게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에 허니드리퍼스는 요란한 소문없이 등장할 수 있었다. 이것은 폴 매카트니가 Wings를 결성해 출발하던 상황과 비슷했다. 플랜트는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말했다.
'당시 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새로 활동한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힘든 일이었죠.
난 누구하고도 함꼐 연주하고 싶질 않았어요. 하지만 그때 허니드리퍼스가 날 다시 사로잡은 거죠. 우리는 영국 전역을 돌면서 소규모 클럽에 출연했죠.
제플린 시절에 느끼던 압박감 없이 또 다시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히 즐거운 일이었죠.'
기타리스트 Robbie Blunt, Andy Sylvester, 드럼 주자 Kevin O'Neil, 색소폰 주자 Rincy Cool, Kevin Davis 등이 참가한 허니드리퍼스는 그 그룹명을 '50년대의 불루스 스타 Roosevelt Sykes가 썼던 그룹명에서 빌려 왔다.
'허니드리퍼스와 가진 공연은 내게 있어선 확신을 새로 얻고 또 내가 아직도 노래를 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자 한 시험같은 거였죠.'
허니드리퍼스의 연주곡은 주로 50년대와 60년대의 불루스나 소울곡들이었고 여기에 초기 로큰롤 취향의 사운드도 가미한 것이 그들의 레퍼터리였다.
허니드리퍼스가 초기에 벌인 공연은 흥미로운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안있어 이들 그룹 내에서는 긴장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사실 플랜트 말고는 이 그룹 구성원들은 모두 스타덤에 올라 인기를 누려본 적이 없는 인물들이어서 플랜트가 소규모 클럽 공연을 고집하는 데에 반해 이들은 더 큰 대형극장에서 공연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대중들의 시선을 피해 공연을 하는 플랜트에게 있어 자신들이 보조자 역할에 불과하다는 회의를 품게 되었던 것이다. 또 플랜트 자신도 예전 시대의 블루스와 록 스탠더드 곡들만을 연주하는 일에 따분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플랜트는 기타리스트 로비 블런트와 함께 새로운 창작곡을 써내는 일에 착수했다. 사실 당시 플랜트는 솔로 앨범 발매를 구상하던 때였던 만큼 그가 블런트와 손잡고 작곡팀을 구성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플랜트의 솔로 앨범에는 Paul Martinez(베이스), Gerald 'Jess'Wodroffe(키보드), Cozy Powell(드럼)등이 우선 참가했다. 하지만 파웰은 당시 기타리스트 마이클 쉥커와 함께 일하도록 계약 되어 있었기 때문에 허니드리퍼스의 새 구성원으로는 참가하지 못했다. 앨범의 나머지 곡들에서는 Phil Collins가 드럼을 맡게 되었다.
'처음에 나는 시간이 없어서 이 일을 거절했지만 로버트가 은근히 위협하는 바람에 떠맡게 되었죠.'
콜린스의 말이다.
81년 12월네는 플랜트와 페이지, 존 폴 존스가 만나는 뜻밖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들이 만난 이유는 한 어린이 자선단체를 위한 기금 마련 공연에 출연해야 했기 때문인데 이 일은 매스컴을 크게 장식하지는 않았다.
한편 플랜트는 솔로 앨범을 낼 준비를 완전히 갖추었던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토로했다.
'사실 지미 말고 다른 누구와 작곡을 한다는 일은 내게 있어선 대단히 긴장되는 일이었죠. 지미하고 나는 예전에 몇시간이고 계속 함께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거든요. 왜냐하면 무언가 새로운 것을 탄생시킨다는 기쁨이 서로에게 있었으니까요.'
이에 비해 다른 연주인들과 작곡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다소 실망스러웠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었다.
'그들은 두세시간만 나와 일하고 나면 곧 지쳐떨어지곤 했으니까요.'
코지 파웰은 이 녹음 세션시 플랜트에게 예전 레드 제플린 시절처럼 '울부짖어 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플랜트는 곡들 자체가 워낙 강렬하니 만큼 굳이 예전의 창법까지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 덕분에 플랜트의 첫 솔로 앨범 'Pictures At Eleven'에서는 플랜트의 그런 강한 샤우팅 창법은 그다지 찾아볼 수 없다.
'Pictures~~~'는 82년 6월에 발매되었고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플랜트가 안도의 숨을 내쉬는 가운데 제플린 시절의 팬들은 이 앨범을 기쁘게 받아 들였고 80년대의 새로운 팝팬들도 그의 이 앨범에 환영을 보냈다.
이 앨범의 사운드는 여러 사람들에게 의외의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우선 아주 최신 감각을 갖춘데다가 '꼭 레드 제플린의 사운드 같다'고 한 코지 파웰의 말과는 달리 레드 제플린 사운드와 비슷한 점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가락이 등장한 셈이죠.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하드 사운드, 이것이 내가 시도하려는 겁니다.'
플랜트의 말이다.

  • 두번째 앨범 역시 최신 감각에 치중

이 새 앨범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플랜트는 옛 친구 지미 페이지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다.
'앨범 녹음 도중 나는 테이프를 지미에게 보내 의견을 구하곤 했죠. 어떨 때는 울거나 그의 손을 잡고 싶은 때도 있었죠. 내가 완성된 앨범을 그에게 들려주었을 때 그는 이제 내가 단독으로 새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을 수긍해주었죠.'
같은 해에 레드 제플린의 마지막 앨범 'Coda'가 발매되어 플래티넘을 기록한 데에 비하여 'Pictures ~~'는 골드를 기록했다. 또 팬들중에는 예전 제플린 시절의 플랜트의 요란한 창법을 아쉬워한 팬들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예전처럼 그렇게 길게 목소리를 끄는 요란한 창법은 요즘 추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예요.'
그의 말이다.
팬들중에는 또 이제 중년을 향한 나이이니 만큼 플랜트의 전성기는 지나지 않았느냐고 빈정대기도 했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하기만 한다면 나이 먹는 일에는 신경쓸 필요가 없어요. 나이가 내 노래에 영향을 끼쳤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82년 중반 그는 미국에서 가진 여러 인터뷰에서 레드 제플린의 재결합은 없을거라고 못박았다. 또 앨범을 한장 더 낼 때까지는 투어 계획도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83년 1월에는 플랜트의 이혼이 발표되었다. 그의 아내였던 모린 윌슨은 플랜트가 레드 제플린에 가입하기 전부터 그와 함께 동고동락한 처지였지만 플랜트의 당시 심경에 변화가 왔던 터라 결혼 생활이 위태해졌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제는 그룹의 일부분으로서 지냈던 지난 13년간을 청산하고 독자적인 인생 행로를 본격적으로 꾸며야할 때라고 생각했죠.'
그의 말이다.
83년 6월에는 그의 두번째 앨범 'The Principle Of Moments'가 플랜트의 독자적인 레이블 Es Paranza사에서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서는 싱글로 < Big Log >이 발매되어 국내 팬들의 인기를 끌었고, 싱글 차트에서도 상위에 올랐다.
이번 앨범에서도 플랜트는 가사 전부를 담당했고 작곡은 'Pictures At Eleven'에 참가했던 구성원들과 공동으로 했다. 드럼연주에는 예전 Jetro Tull 출신의 Barrienmore Barlow가 2곡을 맡았고, 필 콜린스가 그 나머지를 담당했다. 지난 앨범보다 이 앨범은 한층 개성이 뚜렷해지고 또 사운드에서도 일관성이 있다고 평가되었는데 최신 감각에 맞는 사운드 경향은 여전했다. 또 격정적인 보컬에 절제를 담으려고 노력한 흔적도 여전하다.
역시 골드 앨범을 획득한 새 앨범의 인기에 힘입어 플랜트는 미국 전역과 영국 투어를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어 8월에 솔로로서는 첫 투어가 개시되었다. 투어는 성공적이었다. 팬들은 그에게 예전 레드 제플린의 곡들을 들려달라고 아우성치거나 하지 않고 플랜트의 솔로 곡들을 환영해 그를 흐뭇하게 해주었다.
사실 미국 팬들이 플랜트의 새로운 80년대식 로큰롤 사운드를 어떻게 받아들여줄 것인가는 큰 관심거리였다. 하지만 팬들은 < In The Mood >가 공연 첫곡으로 연주되자마자 열렬한 박수 갈채를 보내 플랜트로 하여금 이제야 자신이 레드 제플린의 그늘에서 벗어났다는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이 공연에서 참가한 구성원들은 로비 블런트(기타), 폴 마티네즈(베이스), Jess Woodroffe(키보드), 그리고 Bob Mayo(기타/키보드), 예전 Little Feat 출신의 Ritchie Hayward(드럼)이었는데 미국 공연시에는 필 콜린스가 드럼을 맡아 해주었다.
플랜트의 투어에 대해 미국의 한 비평가는 이렇게 썼다.
'제플린의 주무기였던 거칠고 소박한 감정 표현, 그리고 즉흥 연주에 강한 점등은 플랜트이 공연에서는 별로 찾아볼 없었다. 이 새 밴드는 제플린에 비해서 차분한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룹 구성원들은 모두 빼어난 연주인이기는 해도 이들중 지미 페이지나 존 보넴, 로버트 플랜트 수준의 카리스마나 재능을 지닌 인물은 없다. 여하튼 83년에 거둔 성공은 로버트로서는 당연한 결과이다.'

  • 허니드리퍼스에선 50년대 복고풍 살려

미국 공연후 가진 영국 공연에서는 지미 페이지가 무대에 올라 잠깐동안 잼세션을 벌인 일도 있었다.
영국 비평가들은 플랜트의 새로운 사운드가 '아주 세련되고 프로적인 것'이어서 불만인 사람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비평가들은 이들 밴드의 연주 솜씨나 플랜트의 새 창법에 대해 호평을 했다.
이 세계 투어 후 플랜트는 84년 대부분을 별 활동이 없이 보냈다. 하지만 연말에는 팬들에게 놀라움을 던져준 10인치 LP'The Honeydrippers Volume One'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제프 백과 지미 페이지가 참가한 가운데 녹음되었는데 이들 양인의 기타 솔로 연주는 언뜻 들어서는 이들의 것이라고 여길 수 없을 만큼 크게 부각되지는 않고 있다.
이 앨범에서는 싱글로 < Sea Of Love/ Rockin' At Midnight >가 발매되어 차트 상위에 올랐고 또 국내에서도 인기를 모았다.
앨범 전체로 보아서 이 '- Vol. 1'작품은 플랜트의 두장의 솔로 앨범들이 진지하고 최신 사운드 감각을 살린 앨범들이었던 데에 비해 50년대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어서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팬들중에는 < Sea Of Love >에서 현악기 등을 사용한 것에 대해 옛날 제플린 시절의 플랜트와는 격세지감을 느끼고 서운해하는 겨우도 많았다.
'- Vol.1'앨범은 여러 가지 비평에 비해서 좋은 판매고를 보여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이 앨범의 인기에 힘입어 플랜트는 밴드 구성원들을 한동안 모아 Skinnydippers라는 이름으로 투어에 나섰다.
85년 중반에 플랜트는 다시 솔로 앨범 'Snaken 'n' Stirred'를 발매했다.
이 앨범 역시 앞서 두장의 솔로 앨범들과 마찬가지로 최신 감각을 살린 곡들이 수록되었다. 하지만 이 앨범은 앞서 두장의 앨범에 비해서는 약간 판매고가 떨어졌고(20위), 뚜렷한 인기 싱글도 없었다.
앨범 발매후 가진 투어에서는 현악기 파트와 여성 보조 가수들이 역시 등장했는데 비평가들은 공연중 연주된 앨범의 신곡들보다는 허니드리퍼스의 곡들을 더 평가해주었다. 한편 플랜트는 이 공연에서 한팬의 말에 따르면 '20대나 다름없이' 활기찬 무대를 보여주어 여전히 팬들의 갈채를 받았다.
'내 솔로 앨범과 허니드리퍼스 앨범의 차이라면 솔로 앨범의 경우는 몇 시간이고 작업을 계속하지만 허니드리퍼스의 경우에는 연주 한두번에 녹음을 끝내는거죠.
< Sea Of Love >같은 곡은 제플린 시절에는 꿈꾸지도 않았던 곡이었지만 그냥 '재미'로 녹음한 곡이예요.'
그의 말이다.
85년 7월 13일에 있은 'Live Aid' 공연에서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 존 폴 존스는 필 콜린스 등의 드럼 연주로 제플린 시절의 곡 < Rock n' Roll >, < Stairway To Heaven >, <Whole Lotta Love >등을 연주했다. 연습도 한번 없이 가진 이 공연으로 록계에서는 레드 제플린 재결합설이 분분하게 나돌았다. 이를 부채질하듯 제플린의 소속 레이블이었던 애틀랜틱사에서는 이 재결합 소문을 '신중히 고려하고 있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 제플린 해산으로 가장 충격이 컸던 페이지

1980년에 있은 존 보넴의 사망, 레드 제플린의 해산은 누구보다도 지미 페이지에게 있어 가장 충격적인 일이었다. 레드 제플린은 페이지 그의 완전히 독창적인 창작물이자 그의 인생 전부를 건 그룹이었기 때문이었다. 존 보넴의 죽음으로 인해 페이지는 가뜩이나 위험 상태에 있던 그의 건강이 이제 완전히 쇠진하게 된 셈이었다.
덕분에 80년말에 있은 제플린의 해산후 페이지는 자신이 세운 Sol 스튜디오에서 Mick Fleetwood, Bill Wyman, Elton John, George Harrison등의 몇몇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외에는 얼마동안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가 Paul Rodgers와 함께 Firm을 결성한 것은 84년 말인데 그동안 그는 플랜트가 허니드리퍼스와 규칙적인 밴드 활동을 한 데에 비해 불규칙적인 녹음 활동과 연주 활동을 해왔다. 또 그동안 그는 마약 중독등 별로 좋지 못한 사건도 뿌려왔다. 게다가 영국 팝계에서는 그의 침잠에 대해 냉정한 태도를 보여 페이지는 더욱 정신적인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페이지가 다시 활동을 하도록 도와준 인물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서 첫번째 인물은 영화감독 Micheal Winner였다. 평소 페이지를 존경하던 그는 페이지에게 자신이 감독한 영화 'Death Wish 2'의 음악 제작을 부탁했다.
보통 앨범들과는 달리 영화 음악이라는 한계와 불과 몇초인 짧은 음악도 만들어야 하는 이 작업을 하면서 페이지는 음악적 훈련이라는 차원에서 대단한 경험을 한 셈이었다.
이 앨범에서 그는 생전 처음으로 신서사이저 연주도 했다.
한편 플랜트와 자기 자신간에 아무런 갈등도 없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페이지는 그와 함께 Foreigner의 뮌휀 공연에 함께 게스트로 출연했다. 하지만 이 공연에서 팬들의 환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페이지는 연주자로서의 그의 시대가 지났다고 생각한 나머지 청중들을 두려워 하게 되었다. 즉 팝그룹들의 사운드를 들으면서 자라 최신 사운드에 익숙해져 있고 자기같이 나이 먹은 기타 영웅의 공연은 보러오지 않는 새로운 팝세대들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81년 12월 페이지는 영국에서 코카인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감옥행을 선도받았으나 얼마 후 집행 유예로 풀려났다. 앞서 플랜트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이 무렵은 Yes의 크리스 스콰이어 등과 수퍼그룹 결성 소문이 떠돌았는데 이런 루머보다는 당시 플랜트의 말이 더 신빙성 있다.
'지미는 자기 스튜디오에서 여러 가지 음악적 계획에 몰두하고 있어요. 그가 어떤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그가 내게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퍽 재미있고 자극적인 것은 틀림없어요.'
한편 지미의 말은 이러했다.
'난 정말이지 하루빨리 사람들앞에서 다시 연주하고 싶어요. 연주는 내 인생에서 너무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것을 못하게 된다면 나는 내 생애의 일부분이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 들어요.'
그가 스튜디오 작업에 몰두한 결과로 나온 것은 우선 제플린의 마지막 앨범 'Coda'였다. 그 전에도 그는 제플린 시절의 미발표곡을 연대순으로 수록한 두장짜리 앨범을 제작해보고 싶다고 했는데 'Coda'는 어느 정도 그 조건에 맞은 앨범인 셈이다.

  • 소문대로 폴 로저스와 Firm 결성

스튜디오 작업 외에도 페이지는 영국의 여러 록스타들과 함께 특별 자선 공연에 참가했다. 이 자선 공연은 Small Faces, Faces등을 거친 베이스 주자겸 가수, 작곡자인 Ronnie Lane을 위한 공연이었다. 그는 불치성 복합 동맥 경화증을 앓고 있었는데 이를 안 록계의 친구들이 그의 치료를 돕고 그 질병 연구에 도움을 주기 위해 기금마련 공연을 벌였던 것이다. 83년 9월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양일간 열린 이 공연에는 Andy Fairweather Low, Traffic 출신의 Stevie Winwood, 롤링 스톤즈의 Bill Wyman과 Charlie Watts, Eric Clapton, Jeff Beck등 영국 록계의 거물들이 대거 참여했다.
영국 찰즈 황태자와 다이애너비도 참관한 이 공연에서 페이지는 휀더 텔레케스터 기타로 < Stairway To Heaven >을 연주해 갈채를 받았다. 모처럼의 공연이어서 긴장한 그는 끊임없이 담배를 피웠고 손가락도 좀 떨었다는 후문이 있었으나 성과는 썩 좋은 셈이었다.
이 로니 레인 돕기 자선 쇼는 ARMS(복합 경화증을 위한 활동 및 연구)라는 이름으로 미국 공연까지 연장, 계획되었다. 미국 몇개 도시에서 열린 이 공연에는 영국 공연에 참여했던 스타들외에 Joe Cocker, Ron Wood 등 여러명이 추가로 참가했다.
페이지는 미국 공연중 폴 로저스를 초청해 함께 공연했는데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결국 이들 양인은 얼마후 Firm을 결성하게 되었다. 페이지는 로저스를 Bad Company로 스완송 레이블에 입적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이번 ARMS 공연을 계기로 이들 양인은 서로가 함께 음악 활동을 해나갈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셈이다.
미국 공연에서 펜들이 보여준 열렬한 반응은 페이지에게 대단한 격려를 주었고 그 덕분에 그는 또다른 그의 옛 친구이자 작곡자 Roy Happer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같이 앨범 한장을 녹음하게 되었고 또 여러 실황 공연에 참가, 팬들을 놀라게 했다. 하퍼와 함께 공연하면서 페이지는 James McGregor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다.
85년에 페이지는 하퍼와 함께 앨범 'Whatever Happened To Jugula'라는 작품을 발매했다. 이 앨범중 키보드에 Nik Green, 드럼은 Steve Broughton이라는 인물들이 각각 맡아주었다.
사실 오랜동안의 휴식기를 가진 덕분에 페이지의 기타 연주는 예전의 빠르고 일관성 있는 솜씨가 둔해졌다. 또 능숙했던 손가락 놀림도 느리고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평도 들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를 비웃던 사람들을 반격할만한 솜씨를 되찾아 가고 있었고 아울러 그가 폴 로저스와 함께 자신의 독자적인 밴드를 결성하리라는 소문도 돌았다. 베이스 주자로는 로이 하퍼와 활동했던 젊은 연주자 토니 후랭클린이 가입했고 한동안 물색한 끝에 Tom Jones부터 Manfred Mann 그룹까지 다양한 인물들과 활동했던 대머리 드럼 주자 Chris Slade가 참여했다.
이제 소문이 사실로 드러났고 이들 밴드는 Firm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어 데뷔 앨범이 제작되었고, 투어도 계획되었다.
이들의 첫 공연은 84년 12월에 있었는데 이 공연에서 페이지는 자신의 장기였던 연주 솜씨를 되살려 보여주었다. 그 일례로 그는 제플린 시절처럼 반짝이는 녹색 레이저 광선으로 둘러싸인 바이얼린 활로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을 훌륭하게 연출해 냈다. 또 이 앨범 'Firm'의 신곡들과 더불어 페이지가 처음으로 출연한 비디오 < Radioactive >도 소개되었다.

  • 재결합 소문 부채질한 '라이브 에이드'

사실 처음 유럽 공연을 훰은 입장권 판매에 다소 곤란을 겪었는데 이유는 팬들이 이 그룹에 누가 재적하고 있는지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그룹에 페이지와 로저스가 참가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팬들은 곧 몰려왔다.
폴 로저스는 플랜트의 창법과는 정반대의 보컬을 구사하는 인물이다. 그의 창법은 주로 온화하고 절제된 토운(tone)에 짙은 블루스 감각을 담은 성량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플랜트와 마찬가지로 페이지의 기타 연주에 잘 어울려 들었다.
페이지는 훰의 사운드에서는 솔로 연주를 되도록 짧게 그리고 긴박감 있게 처리했다. 이러한 변화는 다소 있었지만 팬들의 열광은 여전했다.
페이지는 이 훰의 사운드와 팬들의 반응에 썩 만족하긴 했지만 이 그룹을 장기적인 그룹으로 보지는 않았다. 당시 그의 말에 의하면 원래 이 그룹은 한번 같이 일하고 말 그룹으로 출발했다는 것이었으며 이 그룹외에도 자신은 활동 계획이 여럿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레드 제플린이 설립했던 이블 스완 송은 해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예요. 그 레이블의 설립 취지는 정말 좋은 것이었는데....플랜트나 나도 이 일에 유감을 느끼고 있어요.'
페이지는 또 플랜트가 해온 솔로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훌륭해요. 그는 이제 자기 자신만의 개성을 확립한 셈이죠. 그의 목표는 바로 '현재'에 있고 또 그것을 이룬 셈이니 잘된 일이죠. 그런데 'Honeydrippers-'
앨범에 실린 음악들은 우리가 옛날에 언제나 연주했던 리듬 앤 블루스로 되돌아간 음악이며 그런 점에선 좀 모순이죠.'
그는 또 털어놓길 팬들이 자신이 로버트 플랜트와 다시 손잡고 옛날의 곡들을 연주해주길 바라 마지 않는 때에 훰의 사운드와 다시 적응 하는 일은 힘든 과제였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방향을 바꾸는 것은 직업적인 면에서 자살 행위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곤 했어요. 물론 레드 제플린이나 베드 컴퍼니 시절의 옛 곡들을 연주하는 것은 그지없이 쉬운 일이죠. 하지만 그런 것은 우리가 원하는 일이 아니예요. 물론 나는 < Stairway - > 같은 곡을 연주하길 즐기지만 과거의 면류관에 기댈 생각은 없어요.'
첫 앨범 'Firm'이 골드를 기록한 가운데 가진 미국 공연에서 이들 그룹은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또 미국 순회공연중 페이지는 플랜트와 함께 'Live Aid' 공연에 참석했다.
85년 하반기와 86년초, 레드 제플린의 재결합 소문이 분분했던 가운데 훰은 두번째 앨범 'Mean Business'를 발매해 팬들을 놀라게 했다. 이번 앨범 역시 차트 15위권에 들어 첫 앨범에 못지 않은 호응을 받은 셈이다.
훰의 두번째 앨범 발매는 그간 나돌았던 레드 제플린 재결합 소문을 뒤엎은 것이었지만 플랜트나 페이지를 비롯, 존 폴 존스 역시 재결합 가능성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부인을 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어서 결과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한편 훰은 올 여름에 두번째 미국 공연을 앞두고 있는데 현재 지미 페이지의 건강이 다시 심상찮은 소문이 떠돌고 있다. 그의 건강 상태는 85년에도 여러번의 기복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공연을 앞두고 건강이 악화돼 주위를 근심케 했다.
만일 제플린의 재결합이 이루어 진다면 그동안 이들과 활동하던 연주인들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가도 미지수이며 과연 팬들이 기대했던만큼 옛날의 명성을 살려줄런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페이지와 플랜트의 솔로 활동에 어느 정도 불만이 있는 펜들로서는 양인이 결합함으로써 뭔가 그 불만을 메꾸어 주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듯 싶다. 어쩌면 팬들은 이들 양인만은 세월과 반비례하여 나이를 거슬러 올라가주었으면 하는 다소 무리한 기대를 하는 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들을 사랑하니까.

┌────────────┐ │ LED ZEPPELIN 選 │ └────────────┘

제플린의 70여곡에서 몇개를 골라낸다는 것은 다른 그룹에 비해 힘이 든다. 별로 신통치 않은 곡을 고르는게 빠를텐데 그것도 내생각에 한두곡이 고작이다.
가령 1집에 있는 <your time is gonna come> 그리고 [HOUSES OF THE HOLY] 앨범에 있는 <dancing days> <d'yer mak'er> [PHYSICAL GRAFFITI VOL.2]앨범에 있는 몇곡정도 ..
굳이 객관성을 유지해 더 긁어낸다면 [PRESENCE]앨범의 몇곡 .. 더 이상은 내가 볼때 찾기 힘들다.
그 만큼 제플린의 곡은 전체적으로 우수하고 졸작 앨범이 없 다고 보여진다. 내가 제플린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착각일 수 도 있지만 ...

일반적으로 제플린의 명곡은 어떠한 것들일까?

1집 : <dazed and confused> <communication breakdown> 2집 : 2집의 쌍두마차격인 <whole lotta love> 3집 : <since i've loving you> <immigrant song> 4집 : <stairway to heaven> <rock and roll> <black dog>

[HOUSES OF THE HOLY] : <the song remains the same> [PHYSICAL GRAFFITI] : <in my time of dying> [PRESENCE] : <achilles last stand> [THE SONG REMAINS THE SAME] : 실황앨범 [IN THROUGH THE OUT DOOR] : <all my love> <i'm gonna crawl> [CODA] : <we're gonna groove> <bonzo's montreux>

이 외에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곡들은 블루스락적인 <you shook me> 통기타에 고음과 저음이 오고가며 정신을 긴장하게 만드는 <babe i'm gonna leave you> 군더더기 없이 현대적인 감각과 잘 조화하는 <good times bad times> 컨트리한 하모니가 울리더니 갑자기 급박해지는 <bring it on home>, 가 끝나고 이어지는 강한 긴장감속에 응축점이 해체되며 경쾌하게 전환되는 <celebration day> 플랜트의 가히 환상적인 보컬을 들을수 있는<the battle of evermore> 몽환적인 드럼이 잠이오게하는건지 잠을 깨우는 건지 헤메게 만드는<four sticks> 둑이 무너지고 거센 물이 우리에게 강한리듬을 타고 오며 두려움과 희열을 주는<when the levee breaks> 빗소리가 기타에 실려 감상적으로 만드는 <the rain song> 존 폴존스의 신비스런 키보드가 안개를 뿌리는 <no quarter> 겉으론 변화가 적어 보이는 곡인데 자주 들으면 감칠맛이 나고 짜임새가 느껴지는 <the rover>

제플린의 앨범들은 각각 특색이 있습니다. 1집에선 그들의 잠재력을 충분히 느끼게 해준 영원한 고전<dazed and confused>가 있고 블루스 한 곡들이 눈에 띄고 2집은 그들의 전형적인 하드락의 모습을 보여 주고 4집은 락의 역사에 남을 명반으로 대중적으로도 많이 어필한 보기드문 앨범입니다.(천만장이 넘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IN THROUGH THE OUT DOOR>앨범은 블루스한 바닥에 간간히 클래식을 세워놓은 모습으로 비취는데 감정이 많이 이입된 곡들이 여러개 보 이는 군요

제플린은 저에게 엄청난 거부감으로 처음에 다가왔습니다.
고등학생일때로 생각되는데 그래서 버릴라고 하다가 아까와서 참은 기억이 나는군요 그래도 오기가 있어 다른 앨범은 좋을 거라는 희망으로 사서 들은 곡이 바로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었습니 다. 그 곡은 저의 청각주파수를 새로운 차원으로 갖다 놓았고 레드제플린의 다른 곡들도 다 들을 수 있게 귓구멍 평수?를 늘려 주었습니다.
<in my time of dying>의 드럼은 저의 혼을 사정없이 두들겨 대더 군요 근데 하나도 아프지가 않아요 ..하하

혹 제플린과 접하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제플린과 깊은 만남을 가져 보시는게.. 성실하게 접근한 만큼 제플린은 음악을 진동시켜 당신의 뇌를 자극할 것입니다. 비행선은 폭발하고 재만 남았지만 제플린은 당신이 다시 이 비행선에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비행선은 더 좋은 음악을 찾으려 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프로그래시브로도 운이 좋으면 국악을 듣게 해줄수도 있어요 너무 비약이 센가요..

그럼 이만 비행선에서 만나뵙죠 .... 얍 9191 4327 2538 1994 7.18 월요일 유한한 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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