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학

1 개요

Rangaku
(らんがく)
난학
  • 일본 도쿠가와 시대에 발달한 서양학
  • 일본 에도시대에 네덜란드에서 전래된 지식을 연구한 학문
  • 에도 시대 네덜란드를 통해서 들어온 유럽의 학문, 기술, 문화 등을 통칭해서 이르는 말
  • 일본 에도 시대에 유럽, 특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통해 유입된 서양의 학문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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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쇄국정책과 난학수용

1.서론

일본의 양학수용사는 포루투갈 상선이 다네가시마에 기착한 1543년부터 시작돼 명칭도 시대, 교류 대상과의 변화에 따라 남만학→난학→양학→서학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져왔다.
우선 남만학은 1543년부터 도쿠가와 시대 초기까지 포루투갈,스페인 상인들과 료류하면서 서양문물을 배우고 수용할 때 사용한 말이고, 난학은 1623년부터 1850년대 중반까지 오란다의 문물, 특히 난의학을 집중적으로 수용할 때 사용한 말이다.
그리고 양학은 쇄국정치를 포기하고 서구 열강에 문호를 개방한 1858년부터 서양문물의 수용을 총칭하여 사용한 말이다. 그러나 1860년대 후반부터는 동양과 대칭되는 서양의 학문이라는 뜻에서 서학이라는 용어도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아무튼, 학자들은 난학을 수용한 도쿠가와 시대260여년 간의 역사를 쇄국주의 시대로 규정한다. 그러나 이 쇄국의 시대에도 일본은 나가사키의 오란다 사완을 통하여 서양문물을 수입하였고, 일본은 우리나라와도 대규모의 조선통신사를 받아들이면서 왕성한 문화 교류를 하였다. 그러나 엄격한 쇄국,통제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서양의 인문학은 수용하지 못하고, 자연과학 분야의 난학만을 받아 들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일본의 서양문물 수용이 1700년대 초반에는 이미 엄청난 수준에 이르고 있었고, 1980년대 초에는 화란어와 화란의학을 수업한 난학의 전문가들이 1천 여명을 넘어서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근세 일본의 양학 수용이 외형적으로는 자연과학 분야에 한정 되었지만, 공식,비공식으로 전래된 서양서적들을 통하여 지식인들이 새로운 정치,사회제도와 합리주의 사상을 턱득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들이 일본의 양학 수용사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난학자들이 서양의 실체를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또 하나의 지향성을 지녔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
그리고 도쿠가와 시대를 간단히 쇄국주의 시대라고만 규정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근세일본의 해외통상이 밀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이 밀무역을 통하여 한역양서를 비롯한 서양서적들이 적지 않게 수입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2.기독교의 전래 수용과 기독교 금지령

1549년에 스페인의 예수회선교사 사비엘과 토레스가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기독교를 포교하기 시작하는데 일본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남만교라 불렀다.
이들은 지속적인 포교활동을 벌인 결과 유력 다이묘들을 포함하여 세례자70만이라는 엄청난 교세를 구축하게 된다.
이렇듯 일본에 기독교가 급속도로 파급된 것은, 우선 서일본제국의 다이묘들이 선교사들이 포교활동을 묵인하고 도와주었고 군웅쟁패의 전란기에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못한 민초들이 기독교의 박애정신과 평등사상에서 위로를 구하고 구원의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같이 기독교의 포교활동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커다란 사회운동이요, 새로운 문화운동이었으며, 일본 최초의 사상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를 수용한다는 것은 서양의 문화와 사상을 받아들이고, 기존의 일본적인 가치관과 행동양식에 변혁을 예고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치자들은 그것을 위험한 사상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기독교 박해는 전국시대 말엽 히데요시정권 하에서 시작되었다. 히데요시는 기독교를 억제하기 위하여 파테렌추방령을 내리고,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이에야스도 기독교에 대하여 철저한 억압정책을 펼쳐 나갔다.
물론 히데요시나 이에야스가 처음부터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는 해외무역을 독점하기 위하여 점차 쇄국정책을 실시해 갔다.
한편 막부는 1612년 순푸의 이에야스 측신들까지 천주교를 믿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받아 전국에 걸친 금교령을 내린다. 그리고 이때부터 막부는 십자가를 밟게 하여 신자를 가려내는 등 잔혹한 방법으르 기리시탄을 색출하여 처형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원화의 대순교였다. 이후 일본의 천주교는 번창했던 교세를 잃고 1637년에 일어난 시마바라의 난을 계기로 급격한 소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는 대규모의 시마바라 민란에 충격받아 더 엄격한 쇄국,통제정책을 펼쳐 나갔다.
포루투갈 상인들의 내항을 금지하고 천주교 교인이 아니라는 증명서를 받아야 하는 단가제도를 실시하는등의 법령을 철저하게 적용해갔다.
이 즈음에 반란을 음모하다가 발각된 유이쇼세츠의 변은 강경 일변도의 막부정책에 큰 경종을 울렸다.

3. 아라이 하쿠세키의 서양인식과 난학의 발흥

이에쓰나가 열한 살의 나이로 4대 쇼군에 취임한 1651년에 막부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종래의 억압정책을 버리고 문치주의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한다.
우선 막부는 낭인무사들에 대한 관용책을 강구하고 특권상인들만 보호해온 이토왓부제를 폐지하는등 새로운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부는 해외무역을 독점하고 기독교를 금압하는 쇄국정책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한편, 나가시키 이외에는 외부와의 교류통로를 완전히 차단한 막부도 정기적인 오란다 상관장의 쇼군 알현이 해외 정세를 파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가 되었다.
이 쇼군 알현은 해마다 상관장이 바뀌면 그들은 많은 선물을 갖고 와서 쇼군을 알현하고 바깥소식을 소상하게 전해주었다. 이 때 상관장이 유럽정세를 설명한 자료를 오란다풍설서라고 했는데 막부의 요청으로 해마다 공식적인 문서로 제출되었다.
이 풍설서는 당시의 막부 관리들에게도 중요한 대외 정책자료가 되고 있다.
일본 근세의 양학 수용은 바로 이 오란다 상관을 통하여 서양의 천문,지리,풍속 등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고 그들로부터 이른바 홍모류의학을 배우는 것에서 시작된다.
한마디로 도쿠가와 초기의 난학 수용은 대부분 오란다 상관에서 근무한 통역간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나 1708년, 천주교 포교를 위해 규슈 서남해안에 잠입했다가 체포도니 시도치사건은 일본의 서양인식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되는데, 그를 심문한 아라이 하쿠세키가 서구제국의 지리와 문화를 서술한 채람이언 5권과 기독교를 체계적으로 논의한 서양기문 3권을 저술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부터 널리 유포된 채람이언과는 달리 서양기문은 기독교 비판서 였음에도 오히려 기독교 해설서로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때문에 상당 기간동안 대외 유포를 금지하는 비서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하쿠세키의 두 저술은 널리 유포되었는데 이렇듯 유포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획기적인 저술이었고 그에 따른 영향력도 컸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의 저술은 상기한 두 권외에도 무가정치의 역사를 서술한 독사여론과 제도개혁을 논의한 경세전례, 일본의 고대사의 신비적인 기록들을 비판한 고사통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쿠세키는 서양을 오랑캐의 나라로만 인식했던 쇄국주의 시대에 방대한 지리서를 저술하여 세계 각국의 실상을 소개하고, 서양문물의 합리성과 과학성, 그리고 그 우수성을 적극적으로 인식시킴으로써, 일본의 양학 수용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4. 스키타 겐파쿠의 해체신서와 난학의 시대

일본의 난학 연구는 다시 서양문물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8대 쇼군 요시무네에 의해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다.
요시무네의 사양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에 그는 기독교의 교리서 이외에는 한역양서 등 서양에 관한 서적들을 수입할 수 있도록 양서금지령을 완화했으며, 1940년에는 막신 아오키 곤요와 노로 겐조에게 화란어를 배우도록 명함으로서, 많은 지식인들에게 난학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같이 극성스럽고 호기심 많은 요시무네의 행각은 가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그가 근세 일본의 농업과 과학사에 발전적인 계기를 주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는 난학의 중흥을 주도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사상계에서는 이미 17세기 후반부터 여러 유학자들이 주자학의 초월적인 이(理)의 세계를 거부하고 현실적인 일용인륜의 도를 제창하였고 유학도 이미 관념적인 이론체계를 벗어나 경험적,실증적인 조리지학,실용지학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적풍토는 결과적으로 양학 수용의 내적인 여건을 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1766년 봄, 이미 난학의 기초 지식을 습득한 마에노 료타쿠와 아직 화란어를 배워보지 못한 스키타 겐파쿠도 에도의 화란인 숙사를 찾아가 화란어 학습을 희망했으나 무척 어렵다는 설명을 듣고 그대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3년후에 화란인 외과의 파웰의 환자 수술 장면을 보고 난학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기 시작하고 서양 해부학을 이해하기 위해 스기다 켄파구등 동료들과 함께 3년 수개월의 고군부투 끝에 번역서 해체신서를 세상에 내놓게 되는데 이책은 근세 난학의 전성기를 알리는 새로운 이정표가 된다.
이책의 번역 출간은 일본 의학사에있어서도 양의학의 신기원을 여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겐파쿠가 난의학 수용의 체험담을 기술한 난학사시와 오츠키 겐타쿠가 난학 입문서로 저술한 난학해재도 해체신서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이 두 저술은 주로 난학의 문제를 논의한 책이지만 단순한 화란어,화란의학의 학습을 넘어서서 서양사람들을 야만인으로 규정하는 일본의 대외인식에 심각한 자기반성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학자들의 도쿠가와 막번체제와 대외저액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확산되어 하야시 시헤이와 혼다 도시아키의 해방론가 경세론에 이어지고, 1800년대 초의 야마가다 반토,호야시 반리,와타나베 가진으로 연결되며, 막말의 요코다 쇼인 등의 경세론에 이어진다.

5. 결론

근세 난학수용의 계보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그 특징적인 성격을 정리해보자.
우선 난학 수용의 첫 번째 계보는 난학의 주류로서 오란다 상관에서 학습하기 시작한 홍모류 외과의학에서 비롯되어 마에다 료타쿠와 스키타 겐파쿠에서 본격화되고, 오츠키 겐타쿠와 그의 사숙 지란당의 제자군으로 확산되는 제과의학,본초학,박물학계통이다. 이 계보는 이미 스기타 겐파쿠가 그랬듯이 현실비판론을 산출하고, 19세기로 접어들면 때로는 체제 비판론과 연결되고 그리고 때로는 막부어용의 경세론과 연결되어 적극적인 양학수용을 주도하게 된다. 두 번째 계보는 세계지리와 서양사정의 연구에서 출발하여 하야시 시헤이의 해국병담과 혼다 도시아키의 서역물어 그리고 가츠라가와 호슈의 북사문략등의 해방론을 산출하고, 19세기초반을 넘어서면 대체로 대외교류론,개방론을 지향하게 된다.
세 번째 계보는 막부가 해외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서양지리서를 수용하고 해양,선박,천문등을 연구하는 관주도의 양학이다.
이 계통은 필요에따라 서양 오랑캐의 문물을 은밀히 수입하는 2중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1700년대, 오랑캐 문화라는 폐쇄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저극적인 수용자세를 취하게 되는데, 척문학자 아사다 고류와 다카하시 고레키요등이 이 계보에 속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란어나 화란의학을 배운 난학자는 아니지만 난학에 영향을 받아 난학계열의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그룹이있다. 하라가 겐나이와 겐파쿠와 동시대인으로 화가였던 시바 고칸등 현실적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이후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에 속한다.

3 난학

蘭學(난학)는 17세기초 일본과 네덜란드의 교섭이 개시된 이래 히라도와 나가사키에 네덜란드어를 해독할 수 있는 일본인들이 '오란다 통사'[阿蘭陀通詞]라는 직업적인 통역관 겸 상무관(商務官)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은 네덜란드 상관을 출입하는 가운데 네덜란드 의사를 통해 서구의학을 접하면서 그 기술과 지식을 익히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아직 네덜란드 의사의 시술을 모방하거나 설명을 듣고 지식을 축적하는 단계에 불과했다. 그러나 18세기를 전후해서 에도[江戶]를 중심으로 서구의 학문과 기술에 대한 관심이 적극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니시카와 조켄[西川如見]이 〈화이통상고 夷通商考〉를 저술하여 세계지리를 소개하는 한편, 저명한 유학자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가 서구의 풍속,역사,지리 등을 기록한 〈채람이언 采覽異言〉,〈서양기문 西洋紀聞〉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제8대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가 정책적인 뒷받침을 해줌으로써 더욱 진전되었다. 그 배경에는 상품경제의 발달과 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실용적 과학기술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는 사정이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다누마 시기[田沼時期 : 1768경~86경]에 한층 활발해졌는데, 그 기념비적인 성과가 〈가이타이신쇼〉의 간행이었다. 이 책은 독일인이 저술한 해부학 책의 네덜란드 번역본을 4년에 걸쳐 재번역한 것으로, 서양 의학에 대한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소개이자 연구로 난학 발전에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가이타이신쇼〉의 간행 이후 본격적인 단계에 접어든 난학는 크게 세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의학, 또는 이와 밀접한 본초학(本草學)이며, 둘째는 천문역학, 세째가 세계지리학이다. 이들은 더욱 세분화되어 의학의 경우 식물학,약학,화학으로, 천문역학의 경우 물리학 계통으로, 지리학은 서구 역사 연구와 전반적인 인문,사회과학 연구로 발전되었다. 이들 연구의 기반이 된 네덜란드어 연구로는 이나무라 산파쿠[稻村三伯]가 편찬한 최초의 난일(蘭日)사전 〈하루마와게 波留麻和解〉가 있다. 난학가 발전하는 데에는 난학주쿠[蘭學塾]의 역할도 컸다. 1823년 네덜란드 상관의 의사로 부임한 독일인 시볼트는 막부의 허가를 얻어 나가사키 교외의 나루타키[牧瀧]에 진료소를 겸한 나루타키주쿠를 열어, 의학을 비롯해 천문학,역학,지리학,식물학 등을 가르치면서 이토 겐보쿠[伊東玄朴] 등을 배출했다. 또 1838년 오카타 고안[緖方洪庵]이 오사카[大阪]에 설립한 데키주쿠[適塾]에서는 하시모토 사나이[橋本左內], 후쿠자와 유키치[澤諭吉] 등이 배출되었다.
이와 같은 난학의 발달에 있어서 공통적인 특징은 실용주의적 성격이었다. 그 때문에 19세기초 러시아,영국 등 서구 열강이 접근해오자 이에 대항하기 위한 지식과 기술을 난학에서 기대하게 되었다. 즉 난학에 의해 서구의 군사학,항해술,축성술 등 군사적 과학기술과 외국 지리학을 좀더 깊이 배울 필요성이 생겨났던 것이다. 특히 아편전쟁과 페리 내항(來港) 이후 난학는 '기술의 학문'이라는 성격을 강화하게 되었다. 또한 개국 이후 서구 열강과 외교,무역관계가 형성되자 영어,프랑스어,독일어 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해졌고, 특히 에도,요코하마[橫浜] 등지에서는 영어의 습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네덜란드어 대신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던 것은 이러한 시대상을 대변해 주는 일례일 것이다. 이때부터 '양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막부는 1811년 양학 연구기관으로서 반쇼와게고요[蕃書和解御用]를 설치하고 일류 학자를 모아 백과사전 등 서구 저작의 번역물을 간행해내고 1855년에는 이를 독립시켜 요가쿠쇼[洋學所]로, 이듬해에는 반쇼시라베쇼[蕃書調所]로 개칭해서 난학뿐 아니라 영어,프랑스어,지리학,화학,군사학 등 서양 과학을 가르쳤다. 또한 다카시마 슈칸[高島秋帆]을 초빙해 양식포술(洋式砲術)을 가르치고 반사로(反射爐)를 설치해 총포를 주조하기도 했다.

▶ 참고문헌 석전일양『일본사상사개론』,제이앤씨, 2003/02, 298쪽

▶ 참고 싸이트

3.1 난학에 대한 일본인의 정의

글자 그대로 해석된다면 서양학술을 넓은 의미로 일컫는 말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메이지 이전에 도입,연구 된 서양의 학술,지식을 가리키는 역사용어이다. 넓은 범위에서 해석하면 근세초기의 "서양학"도 포함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쇄국기에 네덜란드어를 통해서 들어온 '난학'과, 에도막부 말기에 유입된 영어와 불어 그리고 독일어,러시아어에 의존하는 서양학술인 것이다. 그러나 난학과 양학이라고 하는 용어는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어, 그 구별이 반드시 명확한 것은 아니다. 네덜란드가 서구제국 중에서도 특히 부강함을 자랑한 17,18 세기 무렵의 난학 내용에는, 네덜란드 독자적 학술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지만, 그 후 영국,프랑스,독일의 제국이 네덜란드를 함락시켜서 강대국이 되고 학문문화도 융성해져 가자, 모든 열강 학술서의 네덜란드 번역이 태반을 차지하는 형태가 된다. 그래서 양학이라는 건 주로 네덜란드어를 통해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양학술의 총칭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정의일 것이다. 스기타 겐타쿠는 그 회상록 『난학사시』로, 화란통사의 여기-전문 이외의 기예-로서의 네덜란드 연구에 대해 『해체신서』의 번역 이래, 동지와 함께 시작한 신학문을 가지고 난학이라고 자칭하고, 양자를 명료하게 식별하고 있다. 난학이 마에노 료타쿠, 스기타 겐타쿠, 나가카와 준안 등의 번의(番医 )와 막부의관의 가쓰라가와 호슈 등이 1771년(메이와 8)의 3월, 부분해부의 결실을 보게 된 것을 동기로, クルムス 해부서의 번역을 출발점으로써 창시한 것은 너무나도 저명하지만, 오오스키 겐타쿠 이하, 宇田川玄随, 同玄真 등의 좋은 후계자를 얻고, 의학의 분야에서 기초의학부터 내과, 외과, 약학으로도 분화발전 해왔다. 이윽고 물리, 화학 등의 신과학도 도입되었다.
에도 난학의 자극을 받아서 나가사키의 통역관들의 난어학도 현격히 진보하고 오시오 고규는 많은 네덜란드어 학생들을 양성해, 외과의 일파를 흥하게 했다. 또 모토키 요시나가의 지동설의 소개에 이어 시즈키 타다오는 네덜란드어 문법과 함께 천문역학 위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원래 경제, 문화의 선진지로 있던 교토에서도, 고이시 겐슌, 이나무라 산파쿠, 하시모토 소우키치 등에 의해 각종 난학의 기반이 쌓여져 갔다. 그 밖에 野村栄栄이랑 요시오 조산(耕牛의 손자) 들의 활약한 나고야나 가고시마의 시마즈 시게히데, 후쿠치야마의 쿠츠키 아키츠네, 후쿠오카의 黒田斉清, 나카츠의 奥平昌高 등 소위 난학 영주의 출신 지방성하정에도 빠른 시기에 난학이 생겨났다. 난학에는 번의들에 의해 창시당시부터 민간 성격이 강했지만, 에도의 시바 고칸, 오사카의 야마카타 반토 등 거리의 지식인 사이에서도 난학 계몽의 역할을 담당하는 일이 나타났다.
그런데 당초, 겐바쿠의 天真楼랑 겐타쿠의 芝蘭堂등의 사설글방으로 익혀지고 있던 난학은, 寛政부터 에도 말기에 걸쳐서 대외관계가 긴박해 해안 방비 문제가 국론이 되어오자, 막부도 무거운 태도를 들고 蕃書和解御用(蘭書訳局)으로부터 반쇼시라베쇼등의 시설을 두고, 네덜란드어의 학습, 산업 장려와 함께, 군비의 충실을 꾀하는 목적의 군사과학 기술의 도입, 증강을 도모했다. 제번도 이것에 추종하고 결국은 사가, 사츠마와 같이 막부를 능가하는 세력있는 큰 영지도 출현했다. 이 단계가 되자, 난학의 담당자도 의학 이외에 무사의 진출이 두드러져 왔다. 이렇게 해서 난학은 "사립학교"부터 "공학"으로도 크게 확대하는 것과 동시에 외교상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로 대상도 확대하고, 더하여 종래의 자연과학 중심부터 세계지리, 서양사, 정치, 경제 등 인문과학분야에 이르러 명백히 양학이라는 부름에 걸맞은 서양과학기술 전반의 수입시대에 돌입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근대화의 가장 유력한 요인으로서, 양학사는 더없이 중요한 과제인 것으로, 메이지 이래 각 개별학술사의 연구는 물론, 양학의 역사적 성격이랑 사상성의 규명도 진전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양학을 막번봉건 체제의 보강자이며 전통적인 유학에 봉사해서 남의 장점을 본받아 자기 단점을 보완하는 학문이라는 견해와, 서양학문에 봉건사회, 봉건 이데올로기의 비판자, 극복자로서의 지위를 주려고 한다는 견해가 대립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 해결방법은 근세사의 더 높은 진전과 함께 양학사 전체의 정밀한 규명 이외에 부족함을 보태는 것이다.

4 에도 난학과 나가사키 난학

일본의 난학은 표류하던 서양인의 표착과 교항하던 상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長崎가 서양문물의 유입창구였고 長崎에서 江戶로 통하는 길이 그 문화도로였고, 江戶의 잘 발달된 교통로는 長崎로 유입된 서양문물을 전파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일본의 난학은 직접적으로 난학서가 전래되었고 그 난학서를 번역하기 위한 번역소가 江戶에 설치되었고 포르투칼어를 배우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통사, 영어를 위한 통사, 네덜란드어를 전문으로 하는 통사들이 대거 양성되었다.
일본의 난학은 처음에는 포르투칼 상선이 1543년 種子島에 표착하여 총을 전래하고 1549년 사비에르(Francisco Xavier)가 가고시마에 상륙하여 기독교를 전하였다. 그 후 기독교의 유포와 포르투칼과의 무역으로 서양과의 접촉이 활발해졌다. 그에 따라 포르투칼이나 스페인의 서양학을 남만학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쇄국령이 선포되어 내항이 금지되는 1639년까지 약 80년간에 걸친 일본에서의 서양연구였다. 그러나 이 쇄국령은 기독교인 포르투칼이나 스페인에 대해서였지 비기독교 국가인 네덜란드에 대해서는 무역활동과 내항을 허락하였다. 즉, 양학의 理적 측면인 기독교를 거부한 것이지 器적 측면인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일본은 長崎라는 하나의 대서양 창구를 통해 쇄국정책을 유지하게 된다. 일란교섭의 시작은 1600년 3월 다 리프데호의 도착으로 시작되며 1609년에 호란 동인도 화사의 일본 상관이 九州의 平戶에 설치되었고, 33년후인 1641년에 長崎의 出島로 이동된다. 이후 이곳은 쇄국 일본의 유일한 대서양의 창구가 된다. 長崎를 통해서 네덜란드의 문물, 즉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게 되고 이러한 것이 학문으로 전환하면서 난학을 이루게 된다. 난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大槻玄澤이 『蘭學階梯』이다. “ 난학이란 즉 화란의 학문이며 阿蘭陀(아란타)의 학문을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난학의 시작에 대해 衫田玄白은 『蘭學事始』의 하의 권 제 2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崎에서 시작된 난학은 화난상선을 통한 끊임없는 지식의 공급을 통해 계속해서 성장해 나갈 수 있었으며, 江戶에 까지 이어지게 된다. 長崎에 체제하는 네덜란드 상관장의 江戶參府나, 長崎에 거주하던 통사와 그 자손들 그리고 의술을 배우기 위해 모여든 의사, 그리고 長崎로의 遊學등은 지방확산을 가능케 했으며 그 습득계층 또 다양하다.
일본의 난학은 1609년 平戶에 네덜란드 상관이 설치되면서부터 시작되는데 일본역시 1612년 기독교 금지령을 시작으로 쇄국의 길을 가게 된다. 1633년에는 1차 쇄국령이 내려지고 1639년에는 포르투칼선의 내항을 금지하는 5차 쇄국령에 이른다. 이리하여 일본과의 교역이 허락된 나라는 비카톨릭 국가인 네덜란드 뿐이었다. 이어서 막부는 1641년에는 네덜란드의 상관을 出島로 옮기게 된다. 出島를 시작으로 江戶까지 난학은 확산되어 간다. 처음에는 화란통사들을 중심으로 난학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들 통사들은 出島로 이동하기 전인 平戶시절부터 있었다. 통사들은 직무상 네덜란드어를 할 수 있어야 했다. 이들은 대를 이어가며 네덜란드어를 배웠으나 쇄국정책에 의해 그들의 문자를 배울 수 없었고, 단지 구전에 의해 배웠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1745년 德川吉宗에 의해 문자를 배울 수 있도록 허가받음으로써 난학의 발전이 일로에 섰다고 말할 수 있다. 통사들이 자신들의 직무상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네덜란드의 말은 배우되 문자를 배울 수 없으므로 그들에게 속아도 방법이 없음을 얘기하고 그것을 상부에 요청하여 허가받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네덜란드인들이 도착한지 100년정도 후의 일이다.
언어학습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문법을 연구하는 통사도 나오게 되었다. 즉, 志筑忠雄의 『和蘭語品考』가 그것이다. 1790년에는 江戶를 중심으로 稻村三伯, 小石元俊, 山村才助, 安岡玄眞(후의 宇宙川玄眞)등에 의해 『江戶Halma』라 불리는 蘭日사전이 간행된다. 長崎에서는 中山時十郞등 10여명의 통사들의 합작으로 1855년에 『長崎Halma』즉 『和蘭字彙』를 간행하였다.
長崎통사들의 난어 학습이 진척되면서 병학, 의학, 천문학 등 실용과학을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일본은 처음에 일본에 표착한 포르투칼인에게 총의 제작술, 그리고 총상의 치료를 위한 의술등을 일찌감치 익혀왔으며, 蘭學事始에서 말하는 대로 「西流」라고 하여 이미 오래전에 남만류의 의술을 배운 사람도 있었고 이 사람들이 네덜란드의 의술 역시 이어서 배우게 된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중 통사들에 의해 횡문자의 학습이 허락되면서 네덜란드의 의술 및 난학이 성행하게 된 획기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에도로 난학이 유입되는 경로는 두 가지인데 ① 長崎의 出島에 있던 네덜란드 상관장의 江戶참부를 통해서였고 ② 난학에 흥미를 가진 江戶人이 長崎로 유학을 간 것에 의해 유입되었다.

① 네덜란드 상관장의 江戶參府

長崎에 체류하고 있던 네덜란드 상관장의 江戶참부는 1633~1789년 사이에는 연2회, 1790~1850사이는 매년 1회로, 약 27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것은 德川막부의 최고권력자인 將軍에 대한 예방절차였고, 막부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제도이기도 했다. 그들의 長崎에서 江戶로의 행로는 시볼트의 『1826년의 에도참부기행』에도 자세히 나와 있다. 가는 곳곳마다 호기심 어린 일본인들의 눈이 있었고, 의사나 학자, 그리고 장군 吉宗의 명령에 의해 네덜란드語를 배우고 있었던 江戶난학의 선구자 靑木こん陽나 野呂元丈 등이 있었다. 이밖에도 많은 일본인들이 江戶參府의 기회를 이용하여 난학을 습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나 江戶에 체류하는 기간이 짧은 탓에 쉽사리 난학을 익힐 수는 없었다. 이러한 고심 역시『蘭學事始』에 세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衫田玄白이 良澤을 따라 江戶에 와 있는 네덜란드 일행을 만나러 갔을 때 거기서 대통사인 西善三郞을 만났다. 그는 “ 野呂, 靑木 두 선생님이라 해도 장군의 명령으로 해마다 이 숙소로 행차하셔 아주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좀처럼 눈에 보이는 진전은 없습니다. 당신도 그만두시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 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그 당시 長崎이외의 지역에서 난학을 배우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長崎로 직접 유학하여 난학을 배우는 사람들이 늘어가게 되었다.

② 長崎 유학을 통한 난학의 유입

江戶參府의 네덜란드인이나 통사들을 통해서만 배우는 것이 부족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長崎로 유학하였다. 衫田玄白의 친구이자 의사이며 난학자였던 前野郞澤도 長崎로 유학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前野郞澤은 주군의 수행원으로 中律에 가게 되었을 때 그 기회에 제후에게 부탁하고 長崎에 가게 되어 거기서 백일정도 머물면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네덜란드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靑木선생으로부터 배운 일이 있는 『類語』라는 책에 실린 단어들을 근거로 하여 그것을 복습하고 정정하여 700여 단어를 습득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어의 글자체와 문장법등을 기록하여 江戶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 난서도 약간 사왔다고 한다. 이것은 長崎에 의과 수업외에 네덜란드어 학습을 위해 유학한 최초의 일이기도 하다.
蘭語를 습득하여 직접 난서를 읽고 이해하는 방식의 일본의 난학 연구는 漢譯西學書에만 의존했던 조선의 西學과는 다른 일본 난학의 큰 특징이다.

이러한 일본의 난학은 江戶난학과 長崎난학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江戶난학

江戶에서 난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의사출신의 衫田玄白과 前野郞澤에 의해서이다. 이 두사람은 모두 의사로서 서양의 의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1771년 사형수의 사체해부를 구경하고 그들이 갖고 있던 의서와 일치함을 보고 감탄하여, 그 의서를 번역하기로 결심하였다. 우선, 衫田玄白가 같은 藩의 藩医 中川渟庵가 네덜란드 사람으로부터 빌려온 의서 『ターヘル アナトミア』를 보고 필요한 것이라 생각되어 藩주에게 요청하여 그 책을 衫田玄白이 소장하게 되었다. 우연히 前野郞澤도 같은 책을 소장하게 되고 시체해부를 참관하게 되었을 때 책의 내용과 같음을 알고 감탄하였다. 그후, 郞澤, 渟庵, 玄白등은 『ターヘル アナトミア』를 번역하기로 결심하고 실천에 옮겼다. 郞澤을 중심으로 번역을 시작하여 “신경”이라든가 많은 어려운 의학용어를 번역함에 있어 고심이 많았지만, 1774년에는 『解体新書』라는 제목으로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작업과정에서 난학이라는 말도 처음나왔고, 이 『解体新書』로부터 난학은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다.
衫田玄白과 前野郞澤을 이어 江戶에서의 난학을 이은 사람은 大槻玄澤과 宇田川玄隨, 小石元俊, 山村丈助, 石井垣左衛門, 桂川甫周, 宇田川玄眞 등의 사람들이 있었다.

② 長崎난학

長崎의 난학은 서양학자와의 내왕에 따라 발전하였다. 특히 ケンプェル、 ツンベルグ、 シーボルト의 세 사람은 일본에 난학을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저서를 통해 일본을 유럽에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ケンプェル는 『日本志』를 통해 シーボルト는 그의 대작 『日本』을 통해 유럽에 일본의 문화를 알렸다. 『일본』은 19세기전반에 있어서 가장 권위있는 일본연구의 성과였다. 이러한 그들의 역할이 유럽에서의 일본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한편 이들은 長崎에서의 난학발전에도 공헌을 하였다. 특히, シーボルト는 鳴瀧塾를 설립하여 서양 의학과 난학을 가르치면서 수많은 난학도를 키워냈다. 그의 문하생으로서 伊東玄朴, 高野長英 등 다수의 문하생과, 最上德內, 桂川甫賢등 많은 인사가 그로부터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이와같이 일본의 난학은 남만학의 뒤를 이어 長崎의 화난통사들 사이에서 일어나 江戶로 옮겨지면서 학문으로 발달하였던 것이다. 일본난학은 서양의 理적 측면은 금지하고, 器적 측면의 실용성만을 추구하였다. 분권적 江戶막부체제하에서는 각각의 번에서 서로의 세력 확장을 위해 난학의 실용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난학은 1853년 페리의 내항과 함께 개항함으로써 난학 뿐만이 아니라 다른 서양학문을 받아들임으로써 약 250년간 일본전국에서 연구되어진 것이다.
일본의 난학은 네덜란드의 학문을 뜻하나 그것은 네덜란드의 학문이 그 대상은 아니었다. 난학은 유럽전체 학문과 과학이 그 연구대상이었고 그 축적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일본에서의 난학연구는 그 대상 학문의 언어를 체득하고 원서를 읽고 각고의 노력으로 그것을 일본어로 번역하였으며, 서양인과의 직접적인 교섭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것은 그들이 난어를 체득함으로써 영어체득에 있어서도 용이하게 작용했음을 볼 때 그 근대적 의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즉, 일본에서의 난학은 언어의 자유로운 구사를 바탕으로 서양근대와의 접근이 이루어졌고, 따라서 일본자신들에게 필요한 서양문물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난학을 통해 유교세계만을 의식하던 중세적 세계관에서 세계를 하나로 한 근대적 세계관으로 발전하였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의식을 확대하고 국민적 자각에 근대적 사회사상의 얻은 것이다. 이러한 근대적 사상은 각 藩에 난학에 정착함에 따라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세기 후반에 들자 난학 뿐만 아니라 서양 전체의 학문의 학습을 목표로 그 양학의 범위가 넓혀지면서 幕末(막부말기), 明治초의 일본양학으로 발전해 간다.
1853년 페리내항 이후, 개국이후 양학이 더욱 발전하게 되는데 난학의 습득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그 언어를 습득하여 원서를 읽었던 것은 후의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던 영어를 더욱 쉽게 익힐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논문⇒ 조선「 서학 (西學)」과 일본「 난학 (蘭學)」- 대서양 (對西洋) 학문적 대응의 비교적 접근 -이원순. 1982

5 난학자

스기타 겐파쿠

5.1 오오츠키 켄타쿠(大槻玄澤, 1757-1827)

오오츠키 켄타쿠는 리쿠쥬(陸中)의 미주사와(水澤)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을 시게카타(茂質), 호를 한수이(般水)라 하였다. 그는 ꡔ난학계제(蘭學階梯)ꡕ라는 네덜란드어 입문서를 만들었다. 또 그는 스키타가 시작한 하이스터 (LorenzHeister,1683-1758)의 외과서 번역을 끝내었고 ꡔ상의신서(傷醫新書)ꡕ를 저술하였다. 또 스키타의 명을 따라 ꡔ해체신서ꡕ의 번역을 다시 바로잡고 ꡔ해체신서ꡕ에는 빠져 있던 원서의 주를 보충해 넣은 ꡔ중정해체신서(中訂解體新書)ꡕ 13권을 1826년에 출판하였다. 이 책의 원고는 1798년에 대체로 완성되었으나 사정에 의해 그때 출판하지 못하고 뒤에 출판하게 되었다. 이 ꡔ중정해체신서ꡕ에는 쿨무스 책의 범위를 넘어서 켄탁이 여러 종류의 네덜란드 서적을 읽고 얻은 지식이 함께 수록되어 있으며 발레리의 신경액유동설도 기록되어 있다.

5.2 시즈키 타다오(1760~1806)

시즈키 타다오는 『난학사시』1)에 의하면 모토키요시나가의 문인이었다. 그는 43세때 서양 천문학학서의 란역을 시작해 네덜란드어의 문법을 조직적으로 연구한 제일인자였다. 네덜란드어의 문법 체계를 조직적으로 저술한 『화란사품고(和蘭詞品考)』가 나오고 나서 네덜란드어의 연구는 일변해 에도시대에 있어서의 난학 발달에 크게 공헌을 했다. 바바사주로(馬場佐十郞)가 본서를 교정, 『정정난초 구품집 (訂正九品集)』으로서 출판했다. 한편 존 케일(1671~1721)의 천문 물리서 “Inleidinge tot de waa re Natuuren Sterre Kunde"(1741)의 번역에 힘써 16년간의 노력의 끝에 『역상신서(曆象新書)』를 저술했다(1798~1802). 이것은 뉴턴 역학의 체계를 소개한 것이다. 상중하 3편 5책으로 상편은 1798년, 중편은 1799년, 하편은 1802년에 뉴턴 역학의 수리를 잘 이해해, 번역문중에 많은 보충 설명을 더하고 독창적인 새로운 학설을 더해 원서로부터 독립한 성격의 내용을 가진다. 상편권 상에서는 케프라의 제3법칙을 처음 소개하고 있고, 상편권 하에서는 케프라의 제2법칙(면적 속도 일정한 법칙)을 말하고 있다. 부록으로 지동설을 말하고 있지만 결국 인정하지 못했다. 중편권 상에서는 일상의 역학 문제를, 중편권 하에서는 인력론을 나타내고 있다. 하편권 상에서 타원 기하학을, 하편권 하에서는 타원 운동과 구심력을 말하고 있다.

5.3 이나무라 산파쿠(稻村三伯 1759~1811)

이나무라 산파쿠 (일본 최초의 난화사전 편찬자) 는 1758년, 톳토리시(鳥取市)에서 태어났다. 13세 때 이나무라산쿄우의 양자가 되어, 한방의학과 유학을 배워, 번의가 되지만, 오오쓰키 겐타쿠가 저술한 난학의 입문서 「난학계제」를 읽고 감명을 받아, 35세 때에 에도의 영주의 저택에 근무하면서「芝蘭堂(시란도우)」2)에 입문했다.
에도시대, 쇄국 정책에 의해, 네델란드만이, 서양과의 유일한 창구였습니다. 당시 , 네델란드어의 사전은 없었고 1774년, 스기타 겐파쿠가 네델란드의 의학서 「타헬,아나트미아」를 번역해 「해체신서」를 저술했다.
산파쿠는, 친구들과 프랑소와,하르마의 난불사전의 번역을 기획고생끝에, 1796 년에 일본에서 최초의 난화사전 「하르마 화해(ハルマ和解)」를 완성 30부를 간행했다. 이것에 의해, 난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5.4 이노우 타다요시(伊能忠敬 1745~1818)

에도(江戶)시대의 지리학자이면서 측량가이다. 치바현(千葉縣)에서 태어나 치바현 사하라의 주조가,군주인 이노우가의 양자가 되어 , 50세에 은거. 에도에 나와 다카하시 요시토키에게 서양의 측량,지리,역법을 배웠다. 1800년부터 막부의 명령을 받아 이후 , 17년에 걸쳐서 전국 각지를 실측, 그 측량 결과를 기초로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圖)』의 작성에 착수했다. 우선 훗카이도(北海道)의 측량으로부터 시작해 이후 17년에 걸쳐 전국의 측량을 끝마쳤다. 타다요시는 지도의 완성을 보지 않고 사망하였다.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景保)가 타다요시를 이어서 1821년에 지도를 완성했다.
『대일본연해여지전도(大日本沿海輿地全圖)』는 일반적으로「이노우도」라고불리며 해안선과 가도를 측정한 선과 거기서부터 보이는 산의 모습을 새의 눈으로 본 것처럼 그린 자필의 그림으로, 내륙부는 공백으로 두고 스스로가 측량한곳만을 그려, 걷지 않은 곳은 미측량이라고 적는 등, 실증적인 정신을 관철하고 있다. 축척 3만 6천 분의 1의 대도, 21만 6천 분의 1중도, 43만 2천 분의 1의 소도화 기본형이고 전측량 결과를 정리해 1821년에 막부에 제출된 최종판 「대일본 연해여지전도」(대도 214매, 중도 8매, 소도 3매) 외에도 측량의 여행 마다 제작되어 약 400 종류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 중 200종 이상이 부본이나 사본의 형태로 남아 있지만, 막부에 제출된 최종판의 원본은, 메이지(明治)시대 초의 황궁의 화재로 소실했다고 한다.
에도시대에는 막부의 비도로서 공개되지 않았지만, 메이지가 되어, 이것을 기초에 근대적인 지도의 제작이 진행되었다. 또, 에도 말기에 이노우도의 사본을 몰래 가지고 돌아간 Siebold에 의해, 유럽에 처음으로 일본의 정확한 모습이 전해졌다

5.5 기타

,宇田川玄随 津山候의 藩医로 宇田川玄随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원래 漢学의 소양이 깊고, 博覧強記의 인물이었다. 난학에 뜻을 두고, 玄沢에게 난학을 배우고, 玄沢의 소개로 나와 亮庵한테 출입하고 결국 桂川君과 良沢과도 친분을 맺게 되었다.
그 후, 원래 長岐의 通詞로 白河候의 가신이 된 石井恒右衛門이라는 사람한테 오란다어의 공부를 했는데 원래 수재인데다가 끈기도 있는 사람이었기에 무사히 학업을 진전시키고 난학을 번역하게 되고, [内科撰要]라 제목붙여 全十八巻의 책을 집필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일이지만, 우리나라에서의 내과서번역의 최초의 책이었다. 진정으로 애석한 것은 玄随는 사십에 죽었다.

,小石元俊,橋本宗吉 오사카와 쿄토의 난학은 에토보다는 늦게 일어났다. 난학이 처음에는 에토로부터 들어왔지만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이르러 자체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었다. 에토로부터 난학을 들여오는 데에 주된 역할을 한 사람은 코이시 켄슈우(小石元俊), 하시모토 소우키치(橋本宗吉) 등을 꼽을 수 있다. 코이시는 에토 유학 기간도 짧았고 네덜란드 어도 조금밖에는 알지 못했으나 난학을 진흥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는 특히 해부학에 대단한 열의를 가지고 있어 1783년에는 40세 남자 사형수의 시체를 해부하고 기록을 남겼으며, 1798년에는 미쿠모 칸젠(三雲環善), 야마와키 토카이(山脇東海)와 함께 34세 남자 사형수의 시체를 해부하고 기록을 남겼다.

,宇田川玄眞,中伊三郞 켄이의 양자 우타카와 켄진(宇田川玄眞)의 저서 ꡔ의범제강(醫範提綱)ꡕ 3권은 1805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간결한 문장으로 서양해부학의 대략적인 내용을 설명하였고, 사람의 생리와 병리에 대해서도 설명하였다. ꡔ해체신서ꡕ보다는 이 책이 당시에 더 많이 읽혔던 것 같다. 이 책에 실려있는 52개의 해부도는 일본 최초의 동판해부도로 1808년에 나왔다. 이 동판의 제작자는 아오우도우 덴첸(亞歐堂田善)이었다. 동판해부도의 제작에는 오사카의 나카이 사부로우(中伊三郞)도 공적을 남겼다. ꡔ중정해체신서ꡕ에 실린 해부도는 바로 그가 제작한 것이었다. 그는 또 따로 ꡔ해부도보(解剖圖譜)ꡕ 상하편을 1822년에 출판하였다. 나카이는 오사카의 난학자로 어렸을 때 화상을 입어 손가락이 오그라들었지만 이를 이겨내고 동판제작의 기술을 익혀 동판해부도를 제작하였다. 이러한 책들 외에도 19세기 중반에 와서는 보다 다양한 서양의 해부학 서적들이 소개되고 번역되었다.3)

,필립 프랜츠 폰 시볼트 일본 난학의 형성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독일 출신의 의사인 필립 프랜츠 폰 시볼트(1796~1866). 그는 네덜란드를 통해 일본으로 들어왔고 그후 일본 여인과 결혼해 나가사키 교외에 살며 일본인에게 의학과 서양의 과학 사상을 전했을 뿐 아니라 일본의 문화를 서구에 소개하는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를 통해 전해진 서양의 문화와 과학정신은 이후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는 한때 일본 지도를 서구로 빼돌린다는 혐의를 받아 아내와 딸을 일본에 두고 추방되기도 했지만 끝내는 다시 돌아와 가족 및 문하생들과 재회했다. 그에 대한 나가사키 사람들의 애정은 각별하다. 그가 머물렀던 집터는 깨끗이 보존돼 있고 그 옆에는 기념관이 세워져 그의 업적을 일년내내 상설전시하고 있다.

  • 참고 www.naver.com

www.yahoo.co.kr

6 참고

7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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