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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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

여관
  • 여객을 묵게 하는 집

2 서양에서의 여관[ | ]

  • 서양에서 숙박업소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바빌로니아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교역의 범위가 넓어 바그다드와 바빌론을 잇는 대상로(隊商路)에 일찍부터 숙박업소가 생겨났다.
  • 그리스시대에는 레스케라는 공공시설이 있어 여기에서 집회나 숙박을 하였으며, 판도케이온에서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숙박업을 하였다. 로마시대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넓은 영토를 통제하기 위하여 도로망을 건설하고 역체제(驛遞制)에 따라 도로변에 숙박할 수 있는 역을 건설하였다. 여기에서 군인과 관리들이 잠을 자거나 물자를 수송할 때 중간에서 쉬어갔다.
  • 그러나 점차 일반 여행객이 많아지면서 민간인이 경영하는 숙박업소도 생겼다. 예를 들면 마굿간이 딸린 스타블룸, 실내 목욕탕을 갖춘 데웨르소리움, 하층계급용 카우포나, 음식점과 술집을 겸한 타베르나, 일류요리집을 겸한 포피너 등의 여관이 생겼다.
  • 중세에 들어서는 교통이 거의 두절되면서 여관업도 쇠퇴하였으며, 유일하게 서민의 순례가 이루어지면서 교회나 수도원이 숙소로 무료로 제공하였다. 십자군 원정이 이루어지면서 대량의 물자와 병사가 오가게 되었다. 따라서 여관이 영리를 목적으로 하여 발달하였는데, 당시에는 침구•음식물•연료 등을 숙박하는 사람이 직접 준비하였다.
  • 여관은 르네상스시대부터 융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이 때부터 술집을 겸한 곳이 나타나 오늘날의 호텔 원형이 되었다. 17세기 중엽 역마차가 등장하면서 여행자가 늘었으며, 19세기 중반에는 산업혁명을 치르면서 철도교통을 이용하여 쉽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근대적 시설을 갖춘 호텔이 발달하여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 호텔의 기원이 되었다.

3 한국에서의 여관[ | ]

  • 한국의 전통적인 숙박시설의 특징은 국가에서 하는 공설기관이 사설기관보다 월등히 많아 공설기관을 중심으로 숙박시설이 발달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전통사회에서는 개인적인 여행이 많지 않았으므로 개인여행자를 대상으로 한 사설 숙박시설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 487년(신라 소지왕 9)에 등장한 역(驛)이 공설 숙박시설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역에서는 주기능이 아닌 부기능의 일부로 숙박업무를 담당하였는데, 그 기능은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다. 역 이외의 공용여행자를 위한 공설 숙박시설은 빈객을 접대하는 각 주현(州縣)의 관(館), 즉 객사(客舍)와 교통상 중요한 곳에 설치한 원(院)이 있었다.
  • 17세기 후반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부보상을 비롯한 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사설 숙박업소가 생기게 되었다. 사설 숙박업소의 효시는 객주(客主)와 여각(旅閣)이며, 이 때부터 주막도 등장하였다.
  • 개항이 이루어지자 수많은 열강이 한국에 진출하여 외국인들이 찾아오게 되었다. 방문객과 거류자 수가 많아지면서 새로운 업종들이 들어왔는데, 1883년(고종20)에서 90년 사이에 여관업이 국내에 소개되었다. 이로써 1880년대가 근대적 숙박업소인 여관이 시작된 때라고 할 수 있다.
  • 1910년 이후 근대식 여관은 일제의 식민지정책으로 발달한 도시와 함께 번성하였다. 도시 인구의 증가, 상공업과 교통의 발달은 숙박시설의 발달을 함께 가져왔다. 처음 등장한 근대식 여관은 주로 일본식이었으나, 점차 서양식의 여관도 생기고 또한 일본에서 전해진 근대식 여관에 자극을 받아 온돌방으로 된 한국식 여관도 생겨났다.
  • 60년 이후 공업화•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인구 이동이 심해짐에 따라 여관의 수도 급격히 늘어났다. 수적인 팽창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발달이 거듭되었고, 2000년부터 여관이나 여인숙 등 모든 숙박업소가 '호텔'이라는 명칭을 쓸 수 있게 되었다.

4 같이 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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