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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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을 걷다
  • 저자: Jjw
  • 2017-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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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 곳곳 담벼락이며 건물벽엔 채만식과 고은이 가득하다. 채만식의 탁류가 군산을 그려내었고, 고은은 고향이 군산이니 그럴만 하다. 게다가 관광자원에 목마른 기초자치단체에서야 이 훌륭한 소재를 그냥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성탄절이 월요일이어서 내리 3일을 쉬는 연휴를 맞았다. 오랜만에 친구가 어디든 바람을 쐬러 가자고 한다. 예전부터 한 번은 가야지 한 번은 가야지 하고 벼르던 군산을 가자고 하였다. 친구는 예전에 한 번 답사를 하였던 곳이지만 좋다고 한다. 그 덕에 나는 든든한 가이드를 한 명 옆에 두고 제대로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도시는 어디건 지난 세월이 켜켜히 쌓인 퇴적층이다. 그 퇴적층 어디선가 옛 건물들이 남고 그 위로 다시 쌓이는 역사의 흔적이 새로운 지층을 만든다. 건물들은 도시를 흐르는 시간을 따라 어떤 것은 무너지고 어떤 것은 없어지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건물들과 옛 건물이 마주하는 교차로는 마치 단층처럼 지난 시절을 뚝 잘라 나눈다. 우리의 역사가 격동의 시기였던 만큼 우리 도시의 모습도 무수한 절리와 단층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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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 거리 - 제일 왼쪽 새롭게 단장 한 2층 건물 오른쪽으로 80년대 쯤이지 싶은 단층 시멘트 건물이 있고 그 오른쪽은 또 딱보아도 새마을 운동 시절 지었을 법한 지붕을 이고 있다. 다시 그 오른쪽 80년대의 특징적인 "문화주택"을 앞에두고 아파트가 자리잡고 있다. 도시의 모습은 차곡차곡 쌓이는 지층과 같다.

군산은 오래된 항구다. 개항 이후 빠르게 무역항으로 성장하여 각종 은행이며 창고가 들어서고 세관이 세워졌다. 물론 그 시기는 일제의 식민지 시기였고 군산은 식민지 정책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상태에서 도회지가 되었다.

군산은 국제도시였다. 일본인들 외에도 중국인도 건너와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 뒤 이어진 풍파 속에 군산의 화교 커뮤니티는 흔적조차 희미하다. 군산에 있는 화교소학교는 7-8년 전에 화교 입학생이 없어 운영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아직도 운영되고 있던가? 잘 모르겠다. 한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화교에 대해 자산 억제 정책과 동화 정책을 매우 강하게 시행하였다. 한국 사회는 이래저래 다양성을 관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현재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들도 일본의 것들 뿐인데, 이는 심지어 아직 화교 커뮤니티가 강한 인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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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군산세관 - 고딕풍이 많이 섞인 일제 시기 건물이다. 90년대까지 세관으로 쓰였다. 그 뒤로 최근 관공서 표준 양식에 따라 지어진 세관 건물이 보인다.

군산의 근대 건축물은 그래서 일제 시기 일본에 의해 지어진 것들이다. 전시공간에는 일제의 수탈이라던가 항일이라던가 하는 이야기로 빼곡하다. 물론 식민지배 시기 일제는 조선을 수탈하였고, 우리를 강압하였다. 그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군산은 무역항이자 자본주의적 경제와 문화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그 속에는 상인, 노동자, 지식인, 소작인 그 밖의 각양 각색의 인물상이 섞여 있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나 빈약한데 민족주의적 수난과 저항만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당시의 군산을 다 보여주는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어찌 20년대의 모던 뽀이와 모던 걸이 경성에만 있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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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내항 부잔교 - 서해는 간조차가 심해 사진 처럼 썰물일 때엔 배가 정박하기 어렵다. 1930년대에 새워진 이 부잔교는 썰물일 때에도 멀리 뻗어 놓은 뜬부두를 통해 화물을 부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밀물이 되면 뜬부두와 함께 다리가 들어올려진다. 12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3기가 남아 있다.

군산의 주요 수출물은 쌀이었다. 인근의 호남 평야에서 생산된 쌀이 이리로 모였다. 항구와 철도는 모든 식민지적 자본주의 성장의 공통적 모습이기도 하다. 밀물과 썰물을 가리지 않고 화물을 부리기 위해 부잔교를 세웠다. 물산이 모이니 금융이 따라오게 마련이라 지금의 기준으로 보아도 매우 큰 은행 건물들이 남아 있다. 항구와 은행이 있으니 그 앞은 채만식의 말 마따나 “마도로스”들이 들락거리는 유흥가였을 것이다. 지금도 한 켠엔 단란주점이니 노래방이니 하는 유흥업소가 골목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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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투 류헤이의 별장.

일제 시기 총독부는 조선에 일본인이 지주로서 정착할 수 있도록 갖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군산에 자리 잡은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는 이렇게 자리잡은 일본인 지주의 대표적 인물이다. 1만2천평의 논밭에 3천명의 소작인을 두었다. 구마모토는 농지 매입 자금을 일본에서 모집하고 그 돈으로 대규모 농장을 만들었다. 그의 농장은 아마도 최초의 기업형 농업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당시 소작료는 소출의 5할이 기본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이 수탈이었다. 구마모토는 소작인들이 너무 자주 질병에 걸리자 자신의 자금으로 의료원을 만들고 한국인 의사를 앉혔다. 물론 노동력 상실을 우려한 조치였다. 그렇게 하여 의료원장이 된 이영춘은 해방 후에도 계속해서 의료원을 운영하였고 구마모토의 별장을 자신의 집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간호학교를 세웠는데 그 군산간호대학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구마모토 류헤이의 별장은 아주 양호한 상태고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데 학교가 창업자를 기념하기 위해 관리하기 때문이다. 이 역시 건물과 공간이 만들어내는 지층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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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276호 발산리 5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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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 농장의 창고

일본인 농장이 만들어낸 또하나의 지층은 조금 그로테스크하다. 군산 발산초등학교 뒷뜰엔 대한민국 보물 234호인 군산 발산리 석등과 보물 276호인 발산리 5층 석탑을 비롯한 많은 석물들이 놓여 있다. 원래 이자리는 시마다니 야소야의 농장이 있던 터였고, 그는 이곳 저곳에서 문화재들 들여와 여기를 꾸몄다.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를 아우르는 비석이며 부도며 돌조각이며 탑과 같은 것이 아무런 역사적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맥락이 끊긴 채 그저 어느 고급 요릿집 장식물마냥 이리 저리 자리를 채우고 있다. 친구가 말하길 농장주는 종전후 이 석물을 가지고 가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고 한다. 학교 한 켠엔 농장에서 사용하던 창고가 남아 있다. 각지에서 긁어 온 문화재와 단단한 시멘트 구조물의 창고가 초등학교와 뒤섞여 있는 모양처럼 기괴한 풍경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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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사는 일본의 조동종이 조선으로 건너와 세운 절이다. 전형적인 일본식 사찰이다. 마치 한국이 아니라 일본을 여행하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으킨다. 해방 후 이 절은 조계종의 절이 되었다. 1992년 일본 조동종은 참회와 사과의 글을 보내와 이 절 한켠에 세웠다. 자신들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어기고 일본 제국주의의 앞잡이가 되어 아시아 여러 민족의 침략을 옹호하고 심지어 가담하였으며 조선에 대해 말과 글 뿐만아니라 창씨 개명을 통해 이름마저 빼앗은 죄를 참회하고 두 번 다시 잘못을 범하지 않겠노라 맹세하고 있다. 그 앞엔 군산 시민들이 세운 평화의 소녀상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이 두 기념물 사이에 놓인 부조화가 약간은 당혹스러웠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글 앞에 세운 우리는 아직 사죄를 받아야 할 것이 남았다는 기념물. 물론 사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혹시 우리는 아무 것도 고려하지 않고 일본을 마치 단일한 하나의 개체처럼 싸잡아 묶고 퉁쳐서 증오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일본에게 사죄를 요구하는 것은 지난 일에 대한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물론이요 서로 평화와 인권위해 할 일을 찾고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일본이라는 국가와 일본인이라는 사람은 하나의 동일체가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일이 국제 사회에 알려지도록 노력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많은 일본인도 있었음을 기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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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물을 리모델링한 테디베어 박물관

테디베어 박물관은 사설 박물관이고 입장료가 만만치 않아서 겉모습만 구경하고 말았다. 딱 보아도 교회 건물이다. 건물 위엔 희미하게 교회라는 글자가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리모델링을 하면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테디베어로 바꿔 넣었다. 이 역시 도시가 갖는 또 다른 지층이다. 이제는 더 이상 원래의 용도로 쓰이지 않는 건물은 이렇게 리모딜링이되거나 헐려나간다. 군산 내항은 근대건축물과 박물관을 중심으로 관광자원이 되었다. 당연히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났고 일어나는 중이다.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건축물의 색상을 맞추고 특색을 살리려 고심한 흔적이 보이긴 하지만 이미 식당이며 가게는 어디서든 보이는 고만고만한 모습으로 변해갈 채비를 하고 있다. 온갖 프랜차이즈들이 지역 상인들을 밀어내고 들어서는 끔찍한 결말만은 보고 싶지 않다. 부디 특색있는 거리로 살아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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