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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re Tapes 1975 ==
== Last Tapes 1975 ==
## 아르크티스, 1970년대 진보 록의 숨겨진 보석에서 컬트적인 존재로 부상
**본** – 1973년 3월, 보컬 카린 퇴피히, 기타 클라우스 블라후트, 베이스 클라우스 괴르너, 드럼 해리 코텍을 주축으로 결성된 아르크티스는 본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당시 유행하던 진보적인 록 음악에 심취한 그룹이었다. 클라우스 블라후트와 해리 코텍은 이미 1971년 7월부터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플랑크톤과 서든 데스에서 함께 활동하며 음악적 기반을 다졌다. 플랑크톤에서는 해리 코텍이 기타를, 클라우스 블라후트가 베이스를 맡았고, 서든 데스에서는 해리 코텍이 드럼으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1973년 3월, 보컬 카린 퇴피히가 합류하고 몇 주 후 클라우스 괴르너가 새로운 베이시스트로 영입되면서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괴르너는 이전에 재즈 록 그룹 비어 암 바스에서 베이스를 연주한 경력이 있었다. 아르크티스의 첫 공식 공연은 1973년 5월 29일 바트 혼네프에서 열렸다. 이 라인업은 클라우스 블라후트와 클라우스 괴르너가 학업을 마치기 직전 시험 준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 밴드를 떠난 1975년 가을까지 유지되었다.
아르크티스는 1974년 3월 LP "아르크티스"를 300장 한정으로, 1975년 5월 LP "아르크티스 테이프"를 1,000장 한정으로 자체 제작하여 발매했다. 첫 번째 LP "아르크티스"는 철저하게 편곡된 곡들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음향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지만, 두 번째 LP에서는 그룹의 표준 레퍼토리에 속하지 않은 곡들을 주로 선택했다. 이 곡들은 리허설 작업 전 "웜업" 세션이나 친한 음악가들과의 잼 세션 도중에 만들어져 녹음되었다(이 때문에 LP 제목이 "아르크티스 테이프"가 되었다). 녹음은 탠드베르크 테이프 장비와 젠하이저 및 AKG 마이크를 사용하여 이루어졌다. 비용상의 이유로 첫 번째 LP에는 실제 커버가 사용되지 않고, 대신 아르크티스 로고가 새겨진 검은색 스티커를 인쇄되지 않은 흰색 LP 커버에 붙였다. 보너 송베르크슈타트 에리히/회르네만 주최측과의 협력을 통해 발매된 두 번째 LP에서야 비로소 사진이 담긴 "일반적인" 커버를 갖게 되었다.
각 에디션에서 약 100장씩 레코드 회사와 음악 출판사에 샘플링용으로 사용되었으며, 나머지 수량은 공연과 지역 소매점에서 판매되었다. 방송국에도 샘플 사본이 보내졌고, WDR(라디오테크, 록 인) 및 SWF(팝 샵) 등에서 방송되기도 했다.
모든 노력과 저명한 사운드 엔지니어 코니 플랑크와의 새로운 데모곡 녹음에도 불구하고, 그룹은 기존 LP의 유통이나 새로운 제작을 위해 레코드 회사를 찾을 수 없었다. 두 LP에 대한 열망은 1970년대에 소량으로 발매된 이러한 자체 제작 음반에 수집가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생겨났다. 수집가 시장에서의 가격은 급격히 상승하여 LP당 1,000 DM에 달하기도 했다. 이러한 수요는 1993년과 1994년에 두 LP를 CD로 재발매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LP에 발매된 적이 없는 미발표 녹음이 담긴 CD "모어 아르크티스 테이프"마저도 대중의 큰 호응을 얻었다. 국내외 전문 언론의 수많은 리뷰에서 아르크티스 음악의 예술적 퀄리티를 인정받았다.
이 지속적인 관심은 이제까지 발표되지 않은 자료가 담긴 테이프 세션에서 세 번째 CD를 발매하기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스타일적 다양성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의 전체 창작 기간을 대표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폭넓게 설정된다. 초기 녹음(5, 8, 9) 외에도 뮤지션들의 연주력과 공동으로 아이디어를 즉흥적으로 개발하고 음악적으로 흥미진진하게 구현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긴 즉흥 연주곡(6)이 다시 포함된다. (10)과 (11)은 1975년 5월 30일 저녁 "제1회 본 송베르크슈타트"의 일환으로 아르크티스가 1,000명 이상의 관객 앞에서 다른 여러 본 그룹과 함께 공연한 본 베토벤 할에서의 라이브 녹음이다. 1975년 5월 30일 오후, 아르크티스는 저녁 행사에 다시 한 번 주목을 끌기 위해 본 시청 앞 광장에서 프로모션 공연을 펼쳤다. 이 공연에서 촬영된 사진은 9~11쪽과 13쪽에 나와 있다. 이 날의 사회자, 즉 오후와 저녁에는 주최측이 당시 인기 라디오 방송국 SWF 3(팝 샵)에서 유명한 진행자였던 프랑크 라우펜베르크를 섭외했다. 사진 속 그는 막 발매된 LP "아르크티스 테이프"를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1975년 가을, 초기 멤버들의 활동이 끝난 후 카린 퇴피히와 해리 코텍은 멤버를 교체하며 밴드를 계속 이끌었고 새로운 자료도 발표했다. 클라우스 블라후트는 1982년 솔로 LP를 200장 한정으로 발매하여 전기 기타 외에도 키보드와 콘서트 기타, 부주키와 같은 어쿠스틱 악기를 사용하고 단순히 "1982"라고 명명했다. 2000년에는 아르크티카라는 이름으로 록적인 솔로 CD를 500장 한정으로 발매하여 전기 기타가 다시 주류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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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KTIS wurden 1973 gegründet und bestanden aus Karin Töppig (Gesang), Klaus**
Blachut (Gitarre), Klaus Göllner (Baß) und Harry Kottek (Schlagzeug). Alle stammten aus
der Gegend um Bonn und waren dort bereits in verschiedenen anderen Gruppen aktiv
gewesen. So hatten Klaus Blachut und Harry Kottek seit Juli 1971 in den Progressiv-
Rock-Bands Plankton und Sudden Death zusammen gespielt, bei Plankton mit Harry
Kottek an der Gitarre und Klaus Blachut am Baß, bei Sudden Death wechselte Harry
Kottek zum Schlagzeug. Im März 1973 stieß Sängerin Karin Töppig zu den beiden und
wenige Wochen später wurde Klaus Göllner als neuer Bassist gewonnen; der hatte
zuvor bereits in der Jazzrock-Gruppe Wir am Baß gespielt. Erster öffentlicher Auftritt war
am 29.5.1973 in Bad Honnef. In dieser Besetzung bestanden Arktis dann bis Herbst
1975, als Klaus Blachut und Klaus Göllner ausstiegen, weil sie – kurz vor Studienende –
mehr Zeit für die Examensvorbereitung benötigten. Arktis veröffentlichten als Eigenproduktionen im März 1974 die LP „Arktis“ in einer Auflage von 300 Stück und im Mai 1975
die LP „Arktis tapes“ in einer Auflage von 1000 Stück. Während die erste LP „Arktis“
ausschließlich durcharranjierte Werke enthielt und in einem Tonstudio aufgenommen
worden war, wählte man für die zweite LP Stücke aus, die überwiegend nicht zum
Standard-Repertoire der Gruppe gehörten, sondern während des „Warmspielens“ vor
der Probenarbeit oder bei Jam Sessions mit befreundeten Musikern entstanden und auf
Band mitgeschnitten worden waren (daher auch der LP-Titel „Arktis tapes“). Die Aufnahmen wurden mit einem Tandberg-Bandgerät und Mikrophonen von Sennheiser und
AKG gemacht. Aus Kostengründen wurde bei der ersten LP auf ein echtes Cover verzichtet, stattdessen pappte man einfach einen schwarzen Aufkleber mit dem Arktiss-
Schriftzug auf eine unbedruckte weiße LP-Hülle. Erst die zweite LP, die in Zusammenarbeit mit den Veranstaltern der Bonner Songwerkstatt Ehrich/Hörnemann veröffentlicht
worden war, erhielt ein „normales“, mit Photos versehenes Cover. Jeweils etwa 100
Exemplare von jeder Auflage wurden zur Bemusterung von Schallplattenfirmen und
Musikverlagen verwendet, der verbliebene Rest wurde bei Auftritten und im örtlichen
Einzelhandel verkauft. Auch den Rundfunkanstalten wurden Musterexemplare zugesandt, und es kam zu Rundfunkeinsätzen z.B. im WDR (Radiothek, Rock In) und SWF
(Pop Shop). Trotz aller Bemühungen und auch der Einspielung neuer Demosongs bei
dem angesehenen Toningenieur Conny Plank gelang es der Gruppe jedoch nicht, eine
Schallplattenfirma für den Vertrieb der existierenden LPs oder für eine neue Produktion
zu finden. Die Begehrlichkeit nach beiden LPs erwachte erst, als sich Sammler für der-
artige in kleiner Auflage erschienenen Eigenproduktionen aus den siebziger Jahren zu
interessieren begannen. Der Preis auf dem Sammlermarkt stieg rapide an und erreichte
teilweise die Höhe von 1000 DM pro LP. Diese Nachfrage war dann auch der Grund für
die Wiederveröffentlichung der beiden LPs als CDs in den Jahren 1993 und 1994. Sogar
die später nachgeschobene CD „More Arktis tapes“ mit bisher unveröffentlichten Auf-
nahmen, die nie auf LP erschienen waren, fand beim Publikum regen Anklang. Zahlrei-
che Besprechungen in der inländischen wie ausländischen Fachpresse haben inzwi-
schen die künstlerische Qualität der Arktis-Musik bestätigt. Dieses nachhaltig beste-
hende Interesse ist nun ausschlaggebend dafür, noch eine dritte CD aus den Tapes-
Sessions mit weiterem bislang unveröffentlichtem Material herauszubringen. Die stilisti-
sche Vielfalt ist wieder breit angelegt, denn es ist die vollständige Schaffensperiode von
1973 bis 1975 vertreten. Die Auswahl umfaßt neben Mitschritten aus den Anfangstagen
(5, 8, 9) auch wieder ein langes improvisiertes Stück (6), das die Spielfreude der Musiker
und ihre Fähigkeit dokumentiert, gemeinsam spontan Ideen zu entwickeln und musika-
lisch spannungsreich umzusetzen. Bei (10) und (11) handelt es sich um Live-Mitschnitte
aus der Beethovenhalle in Bonn, wo Arktis im Rahmen der „1. Bonner Songwerkstatt“
am Abend des 30.5.1975 zusammen mit mehreren anderen Bonner Gruppen vor mehr
als 1000 Leuten auftraten. Am Nachmittag des 30.5.1975 spielten Arktis auf dem
Marktplatz vor dem Rathaus in Bonn einen Promotion-Gig, um auf die Abendveranstal-
tung nochmals aufmerksam zu machen. Bei diesem Auftritt entstanden die Photos, die
auf den Seiten 9 bis 11 und 13 abgebildet sind. Als Moderator für diesen Tag – sowohl
nachmittags wie abends – hatten die Veranstalter Frank Lautenberg verpflichtet, damals
bekannter Sprecher beim beliebten Hörfunksender SWF 3 (Pop Shop). Auf dem Bild
zeigt er dem Publikum die LP „Arktis tapes“, die gerade veröffentlicht worden war. Nach
dem Ende der ursprünglichen Besetzung im Herbst 1975 führten Karin Toppig und Harry
Kottek die Band mit wechselnden Musikern fort und veröffentlichten auch neues
Material. Klaus Blachut brachte 1982 eine Solo-LP in einer Auflage von 200 Stück her-
aus, in der er neben elektrischer Gitarre auch Keyboards und akustische Instrumente
wie Konzertgitarre und Bouzouki einsetzte und die er einfach „1982“ nannte. Im Jahr
2000 veröffentlichte er unter dem Namen Arctica eine Solo-CD in einer Auflage von 500
Stück, die rockiger daherkam und auf der die elektrische Gitarre wieder dominie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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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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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6일 (일) 15:13 판

1 개요

Arktis
  • 독일의 록밴드

2 Arktis 1973

아르크티스(ARKTIS)는 1973년 3월에 결성되었다. 밴드 멤버는 카린 퇴피히(보컬), 클라우스 블라후트(기타), 클라우스 괴르너(베이스), 해리 코텍(드럼)이었다. 모든 멤버는 본 지역 출신으로, 이전에 다양한 그룹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

결성 직후, 밴드는 자체적으로 LP를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이 LP의 주요 목적은 대형 레코드사와 음악 출판사에 데모용으로 보내 아티스트 계약을 따내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공연 주최측에 홍보용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1973년 여름 내내 집중적인 연습을 거친 후, 녹음은 1973년 10월 16일과 19일 쾰른의 돔 녹음실에서 이루어졌다. 단순히 "Arktis"(R 4040)라고 명명된 LP는 1974년 3월에 발매되었다. 발행 부수는 단 300장에 불과했으며, 대부분 레코드사, 음악 출판사, 방송국, 음악 잡지사로 발송되었다. 이를 통해 WDR(Rock In, Radiothek)과 SWF(Pop Shop) 등의 라디오 방송 출연 기회를 얻었다.

더불어 음악계 인사들과 많은 접촉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밴드는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음향 기사 중 한 명인 코니 플랑크(크라프트베르크, 크란, 울트라복스 등과 작업)와 만났는데, 그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밴드의 추가 곡을 녹음하고 레코드 계약을 주선하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1974년 12월 3일 데모 자료로 3곡을 녹음했으며, 이는 후속 LP 제작의 기반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Arktis" LP를 대형 레코드사를 통해 유통시키거나 새로운 제작 계약을 체결하는 데 실패했다. 아르크티스는 1975년 5월 마지막 시도로 다시 한 번 자체적으로 LP "Arktis tapes"(Bonn-Bons-Records bbr 7502)를 발매했다. 이는 밴드가 1974년과 1975년 연습실에서 직접 녹음한 것이었다. 이 두 번째 LP로도 음악 출판사와 레코드사에 접근했지만, 협상이 다시 한 번 성과 없이 끝나자 1975년 10월 그룹은 해체되었다.

이번 CD로 재발매되는 Arktis LP에는 보너스 트랙으로 1974년 12월 3일 녹음된 3곡이 추가로 수록되었으며, 원본 마스터 테이프에서 변환되었다. 이번 재발매는 LP가 수집가들 사이에서 최고가(약 1000 독일 마르크)에 거래되고 있으며 관심 있는 음악 애호가들이 실질적으로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고려한 것이다.


3 Tapes 1975

본, 1973년 3월 - 아르크티스(ARKTIS)가 결성되었다. 밴드 멤버는 카린 퇴피히(보컬), 클라우스 블라후트(기타), 클라우스 괴르너(베이스), 해리 코텍(드럼)으로 구성되었다. 모든 멤버는 본 지역 출신으로, 이전에 여러 밴드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

결성 1년 후인 1974년 3월, 첫 자체 제작 앨범이 발매되었다(Penner Records CD 005로 CD 재발매). 그러나 밴드는 대형 레코드사와의 유통 계약이나 새로운 제작 계약을 얻는 데 실패했다. 유명 독일 음향 기사 코니 플랑크와의 협업에도 불구하고 계약 성사에는 이르지 못했다. 플랑크는 새로운 데모 음원을 녹음하고 계약을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아르크티스는 1975년 초, 또 다른 자체 제작 앨범을 발매하기로 결정했다. 이 앨범은 출판사와 레코드사에 보내 계약을 따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결정은 리허설 녹음 중 발매할 만한 흥미로운 트랙들이 있다는 사실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결국 밴드는 전문 스튜디오에서의 추가 녹음 대신, 이미 녹음된 수 시간 분량의 곡들 중 적합한 트랙을 선별했다.

첫 앨범이 잘 정돈된 트랙으로 구성되었다면, 두 번째 앨범은 즉흥 연주에 더 중점을 두었다. 이는 리허설 전 워밍업 세션과 예술가 친구들과의 잼 세션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아르크티스의 더욱 확장된 음악적 스펙트럼을 보여주고자 했다. 기존 멤버에 세션 기타리스트로 폴커 그렌츠와 캐롤 크나우버가 추가되었다.

1975년 5월 30일, "Arktis tapes" 앨범이 밴드 매니지먼트 에리히+회르네만의 자체 레이블 "bonn-bons-records"를 통해 500장 한정으로 발매되었다. 본 송 워크숍 1975에서 소개되었으며, 시장과 본 베토벤 홀에서의 밴드 공연도 포함되었다.

앨범은 라디오 방송과 일부 긍정적인 언론 보도를 받았지만, 대형 회사와의 아티스트 계약 체결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결국 아르크티스는 1975년 10월 해체되었다.

이번 "Arktis tapes" 앨범의 CD 재발매는 원본 LP가 현재 수집가들 사이에서 수백 마르크에 거래되고 있어 음악 애호가들이 구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사운즈지 마프레드 길리그는 1975년 11월호에서 "원래 리허설용으로만 계획되었고 발매 목적이 아니었음에도... 이 곡들은 화려한 기교 없이 다재다능하고 여유로운 록을 연주하는 밴드의 명백한 장점을 보여준다. 앞으로 밴드의 기준에 부합하는 앨범이 나오길 기대한다"고 평했다.


4 On the Rocks 1976

본 - 1973년 3월, 카린 퇴피히(보컬), 클라우스 블라후트(기타), 클라우스 괴르너(베이스), 해리 코텍(드럼)을 주축으로 결성된 아르크티스는 당시 유행하던 프로그레시브 록에 헌신적인 본 지역 출신의 밴드였다.

1974년 3월, 밴드는 자체적으로 첫 번째 LP를 발매했는데, 그 이름은 단순히 "아르크티스"(R 4040)였다. 1974년 12월 3일, 코니 플랑크의 지휘 아래 그의 스튜디오에서 세 곡이 추가로 녹음되었으며, 그중 "스카이 드라이브(Sky drive)"는 1975년 LP "송베르크슈타트 본(Songwerkstatt Bonn)"(Bonn-Bons Records bbr 7503)에 수록되어 이 지역의 여러 그룹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1975년 5월 30일, 두 번째 아르크티스 LP인 "아르크티스 테이프(Arktis tapes)"(Bonn-Bons Records bbr 7502)가 1,000장 한정으로 발매되었다. 이 두 앨범은 모두 CD로 재발매되었는데, "아르크티스"는 1993년에 (CD 005) 플랑크의 세 곡을 보너스 트랙으로 추가하여 발매되었고, "아르크티스 테이프"는 1994년에 (CD 012) 미공개 곡 두 곡을 추가하여 발매되었다. 두 CD 모두 마스터 테이프에서 추출되었으며, 테이프 상태가 양호함에도 불구하고 최상의 결과를 얻기 위해 EMI 스튜디오에서 Sonic Solutions의 Nohloise 프로세스를 사용하여 복원 작업을 거쳤다.

1975년에는 "본 여름 축제"를 기념하여 베토벤알레에서 열린 아르크티스 공연이 SWF의 프랭크 라우펜베르크의 사회와 함께 녹음되었다. 이 테이프는 여전히 존재하며 그룹이 소유하고 있다. 같은 해, 아르크티스 내부에서 긴장이 고조되어 클라우스 블라후트와 클라우스 괴르너가 밴드를 떠났고, 이는 그룹의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해리 코텍과 카린 퇴피히는 새로운 멤버들과 함께 활동을 이어가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기타에 만니 딕, 키보드에 악셀 마우러, 베이스에 베른트 콜프를 영입했다. 이들과 함께 1976년에는 세 번째 아르크티스 LP인 "온 더 록스(On the rocks)"(ARK-76-1)를 250장 한정으로 자체 발매했다. 이 앨범에는 모든 노래 가사와 다음과 같은 소개가 담긴 리플릿이 포함되어 있다.

" 때는 1976년, 아르크티스는 죽었다! ...정말일까? 아니, 아르크티스는 살아있다! 우선, '엔트클라우숭(Entklausung)'을 소화해야 했다 (클라우스 블라후트와 클라우스 괴르너가 밴드를 떠났다는 것을 기억하는가?) 그리고 두 번째로, 어떻게 계속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카린과 해리는 기타리스트와 베이시스트 없이도 아르크티스의 성공 시대를 이어갈 계획을 세웠다. 해리는 아르크티스 이전 시대를 떠올렸고, 잠시 함께 연주했던 만니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리는 만니에게 물었고, 만니는 자유로웠고 승낙했다. 아르크티스에는 기타리스트가 있었다. 그 후 두 명의 뮤지션이 빠르게 합류했고 시작할 수 있었다... 인적 변화 외에도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고 무엇보다도 첫 번째 LP와 완벽하게 연결되는 음반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그룹의 몇 곡을 이미 프로듀싱한 코니 플랑크의 지원으로 모든 사람이 '최고'라고 칭하는 곡 자료가 이 세 번째 LP에 담겨 있다. 예를 들어 해먼드 오르간은 이 LP의 모든 곡을 지원하고 활기를 불어넣는다. 우리는 이것이 풍요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전보다 스튜디오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는 곡의 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크림과 헨드릭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새로운 기타리스트 만니 덕분에 곡은 사이키델릭과 언더그라운드의 분위기를 갖게 되었다. 카린은 노래를 부를 때 스튜디오가 아닌 감정을 생각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 일에 헌신했다. 마지막으로, 20분짜리 곡 (B면)을 다시 만들 수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힘든 작업이었다. 이 LP가 모든 팬들의 취향에 맞기를 바라며 이미 LP 4 작업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겠다..."

자화자찬이 지나치지 않다는 것은 특히 긴 곡에서 드러난다. 해리 코텍은 앨범 커버 이미지로 해골을 제안했지만 카린 퇴피히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래서 그들은 촌스러움에 빠져 LP 커버 앞면과 뒷면에 얼음 조각 위에 있는 여성의 그림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 커버 이미지는 이 음악 장르에 너무나 부적절하여 CD 발매 시 다른 이미지로 교체되어 누구도 겁먹지 않도록 했다. 뒷면에는 수집가에게 인상을 주기 위해 보존되었다. 모든 가사는 카린 퇴피히가, 음악은 해리 코텍이 썼다.

세 번째 LP로 아르크티스는 처음 두 LP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수집가들 사이에서도 완전히 묻혀버렸다. 부족한 노력으로 인해 원래 발행 부수가 적었던 앨범은 거의 판매되지 않았고 대부분 그룹 소유로 남아 먼지를 뒤집어썼다. 그래서 예정되었던 네 번째 LP는 발매되지 않았다. 카린 퇴피히는 자신의 노래에 대한 공간이 점점 줄어들면서 점점 불만을 느끼게 되었고 1976년 말 아르크티스를 떠났다. 그녀는 그 후 Bright를 포함한 여러 다른 그룹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1982년 컴필레이션 "Germany's rock sensation no. I, Vol. 4"(Nitribitt Records 005ENMP)에 그녀가 보컬로 참여한 두 곡 "Otono"와 "Life is crazy"가 수록되었다.

아르크티스에서 해리 코텍은 보컬과 기타를 맡았고 이후 자주 멤버를 교체하며 활동했다. 카린 퇴피히 없이 녹음된 곡 중 하나인 "Y.T.T."는 이번 CD에 추가 트랙으로 수록되었다. 그 후 상황은 점차 나아졌다. 1977년 뒤셀도르프 필립스할레에서 열린 신인 밴드 경연 대회에서 약 70개 그룹 중 5위를 차지하여 TV에 방영되었다. 1979년 여름에는 록팔라스트에서 열린 경연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여 TV에 방영되기도 했다. 또한 루시퍼스 프렌드와 프리티 씽스의 오프닝 밴드로도 활동했다.

1985년에는 해리 스톤 (본명 해리 코텍)이 베이스를 맡았고, 보컬에 비 피셔, 기타에 스티븐 스트랫, 키보드에 볼프 레디히, 드럼에 마크 제임스가 참여했다. 이 라인업으로 라인-지크 지역의 록 그룹을 소개하는 LP "록 엑스트라!(Rock extra!)"(E.S.T. Music 30100185)에 1974년 코니 플랑크가 녹음한 곡과 우연히 이름이 같은 "이즈 잇 리얼?(Is it real?)"과 딥 퍼플을 연상시키는 "어라운드 더 코너(Around the corner)" 두 곡이 수록되었다. 또한 니트리비트 레코드의 LP "Germany's rock sensation no. I., Vol. 2"에도 아르크티스가 수록될 예정이었으나 확실하게 확인되지는 않았다.

1986년 해리 코텍은 흥미를 잃고 그룹을 해체하고 음악가로서의 경력을 마감했다. 유산으로 각 앨범이 수백 마르크에 거래되는 세 장의 LP가 남았다. 아르크티스의 미공개 녹음 자료는 초기 라인업과 후기 라인업 모두 풍부하게 남아 있다. 앞으로 CD로 발매될지는 미지수이다.

참고로 1983년 LP "노벰버모르겐(Novembermorgen)"(383)을 자체 발매한 독일어 하드 록 그룹 아르크티스는 이번 그룹과는 관련이 없으며 우연히 이름이 같을 뿐이다. "록 오퍼스(Rock offers)" 시리즈 컴필레이션에 참여한 그룹도 같은 이름의 그룹이다.

처음 두 장의 아르크티스 CD는 클라우스 블라후트의 도움으로만 발매되었지만, 이번에는 해리 코텍에게 감사를 표한다.


5 More Tapes 1975

6 Last Tapes 1975

    1. 아르크티스, 1970년대 진보 록의 숨겨진 보석에서 컬트적인 존재로 부상
    • 본** – 1973년 3월, 보컬 카린 퇴피히, 기타 클라우스 블라후트, 베이스 클라우스 괴르너, 드럼 해리 코텍을 주축으로 결성된 아르크티스는 본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당시 유행하던 진보적인 록 음악에 심취한 그룹이었다. 클라우스 블라후트와 해리 코텍은 이미 1971년 7월부터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플랑크톤과 서든 데스에서 함께 활동하며 음악적 기반을 다졌다. 플랑크톤에서는 해리 코텍이 기타를, 클라우스 블라후트가 베이스를 맡았고, 서든 데스에서는 해리 코텍이 드럼으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1973년 3월, 보컬 카린 퇴피히가 합류하고 몇 주 후 클라우스 괴르너가 새로운 베이시스트로 영입되면서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괴르너는 이전에 재즈 록 그룹 비어 암 바스에서 베이스를 연주한 경력이 있었다. 아르크티스의 첫 공식 공연은 1973년 5월 29일 바트 혼네프에서 열렸다. 이 라인업은 클라우스 블라후트와 클라우스 괴르너가 학업을 마치기 직전 시험 준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 밴드를 떠난 1975년 가을까지 유지되었다.

아르크티스는 1974년 3월 LP "아르크티스"를 300장 한정으로, 1975년 5월 LP "아르크티스 테이프"를 1,000장 한정으로 자체 제작하여 발매했다. 첫 번째 LP "아르크티스"는 철저하게 편곡된 곡들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음향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지만, 두 번째 LP에서는 그룹의 표준 레퍼토리에 속하지 않은 곡들을 주로 선택했다. 이 곡들은 리허설 작업 전 "웜업" 세션이나 친한 음악가들과의 잼 세션 도중에 만들어져 녹음되었다(이 때문에 LP 제목이 "아르크티스 테이프"가 되었다). 녹음은 탠드베르크 테이프 장비와 젠하이저 및 AKG 마이크를 사용하여 이루어졌다. 비용상의 이유로 첫 번째 LP에는 실제 커버가 사용되지 않고, 대신 아르크티스 로고가 새겨진 검은색 스티커를 인쇄되지 않은 흰색 LP 커버에 붙였다. 보너 송베르크슈타트 에리히/회르네만 주최측과의 협력을 통해 발매된 두 번째 LP에서야 비로소 사진이 담긴 "일반적인" 커버를 갖게 되었다.

각 에디션에서 약 100장씩 레코드 회사와 음악 출판사에 샘플링용으로 사용되었으며, 나머지 수량은 공연과 지역 소매점에서 판매되었다. 방송국에도 샘플 사본이 보내졌고, WDR(라디오테크, 록 인) 및 SWF(팝 샵) 등에서 방송되기도 했다.

모든 노력과 저명한 사운드 엔지니어 코니 플랑크와의 새로운 데모곡 녹음에도 불구하고, 그룹은 기존 LP의 유통이나 새로운 제작을 위해 레코드 회사를 찾을 수 없었다. 두 LP에 대한 열망은 1970년대에 소량으로 발매된 이러한 자체 제작 음반에 수집가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생겨났다. 수집가 시장에서의 가격은 급격히 상승하여 LP당 1,000 DM에 달하기도 했다. 이러한 수요는 1993년과 1994년에 두 LP를 CD로 재발매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LP에 발매된 적이 없는 미발표 녹음이 담긴 CD "모어 아르크티스 테이프"마저도 대중의 큰 호응을 얻었다. 국내외 전문 언론의 수많은 리뷰에서 아르크티스 음악의 예술적 퀄리티를 인정받았다.

이 지속적인 관심은 이제까지 발표되지 않은 자료가 담긴 테이프 세션에서 세 번째 CD를 발매하기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스타일적 다양성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의 전체 창작 기간을 대표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폭넓게 설정된다. 초기 녹음(5, 8, 9) 외에도 뮤지션들의 연주력과 공동으로 아이디어를 즉흥적으로 개발하고 음악적으로 흥미진진하게 구현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긴 즉흥 연주곡(6)이 다시 포함된다. (10)과 (11)은 1975년 5월 30일 저녁 "제1회 본 송베르크슈타트"의 일환으로 아르크티스가 1,000명 이상의 관객 앞에서 다른 여러 본 그룹과 함께 공연한 본 베토벤 할에서의 라이브 녹음이다. 1975년 5월 30일 오후, 아르크티스는 저녁 행사에 다시 한 번 주목을 끌기 위해 본 시청 앞 광장에서 프로모션 공연을 펼쳤다. 이 공연에서 촬영된 사진은 9~11쪽과 13쪽에 나와 있다. 이 날의 사회자, 즉 오후와 저녁에는 주최측이 당시 인기 라디오 방송국 SWF 3(팝 샵)에서 유명한 진행자였던 프랑크 라우펜베르크를 섭외했다. 사진 속 그는 막 발매된 LP "아르크티스 테이프"를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1975년 가을, 초기 멤버들의 활동이 끝난 후 카린 퇴피히와 해리 코텍은 멤버를 교체하며 밴드를 계속 이끌었고 새로운 자료도 발표했다. 클라우스 블라후트는 1982년 솔로 LP를 200장 한정으로 발매하여 전기 기타 외에도 키보드와 콘서트 기타, 부주키와 같은 어쿠스틱 악기를 사용하고 단순히 "1982"라고 명명했다. 2000년에는 아르크티카라는 이름으로 록적인 솔로 CD를 500장 한정으로 발매하여 전기 기타가 다시 주류를 이루었다.

7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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