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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6 jj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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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빗과 반지의 제왕, 실마릴리온에 이르는 톨킨의 방대한 가운데 땅 세계관 만큼이나 김용의 강호는 이후 모든 무협소설의 마르지 않는 젖줄이 되었다. 무림에 구대 문파가 있고 세외가 있으며 여러 기인이 취생몽사 하는 이야기는 아직도 무협소설과 영화의 표준이다.
호빗과 반지의 제왕, 실마릴리온에 이르는 톨킨의 방대한 가운데 땅 세계관 만큼이나 김용의 강호는 이후 모든 무협소설의 마르지 않는 젖줄이 되었다. 무림에 구대 문파가 있고 세외가 있으며 여러 기인이 취생몽사 하는 이야기는 아직도 무협소설과 영화의 표준이다.



2024년 6월 30일 (일) 23:09 기준 최신판

1 개요[ | ]

오늘의 잡생각 - 무림의 경제적 기원
  • 2021-07-16 jjw

호빗과 반지의 제왕, 실마릴리온에 이르는 톨킨의 방대한 가운데 땅 세계관 만큼이나 김용의 강호는 이후 모든 무협소설의 마르지 않는 젖줄이 되었다. 무림에 구대 문파가 있고 세외가 있으며 여러 기인이 취생몽사 하는 이야기는 아직도 무협소설과 영화의 표준이다.

김용의 소설들은 이야기에 따라서 멀리는 당나라에서 가까이는 명나라 시기까지 배경이 다양하지만, 그의 대표작 사조영웅전이나 천룡팔부 등은 북송 시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 딱히 뭐 어쨌다는 건 아니지만, 사회상은 분명 명나라 쯤에나 어울리는 데 굳이 북송을 배경으로 하는 건 그가 중화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생전에 김용은 홍콩의 대표적인 친중파 인사였다.

실제 강호 무협의 경제적 기원은 아무래도 표국이 아닐까 싶다. 표국은 명나라 때야 비로소 모습을 갖추었다. 그 이전이라고 상단이 없었을까만, 상단을 호위하는 유료 경호 서비스는 그 때가 시작이다. 이전까지 상단의 호위가 상단 자체적인 인력이나 지방관의 공권력에 의지했다면, 표국은 표사를 선발하여 유료 보안 서비스를 제공했다.

명나라 시기 천하에 이름을 떨친 표사들은 산동성 출신이라고 한다. 그 수가 2천명이었다니 아무리 땅덩이 큰 중국이라도 만만찮은 숫자다. 이들은 전문적으로 호송 업무를 수련하였고 무술을 익혀 화물이 약탈당하지 않도록 지켰다. 당시 기록에 소림 승병과 산동 표병을 거론하는 것을 보면 소설 속 각종 방파니 문파니 하는 것의 모티브는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늘 그렇듯 오래되었다는 전통은 실제로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소림사의 신화 역시 마찬가지.

여기까지가 오늘 대충 중국어 위키백과 얼른 번역해서 올린 문서의 출처를 보며 들었던 생각이고,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명나라의 상업 정책도 표국의 성립과 관련이 있을 듯 하다. 명나라는 원래 남경에서 출발하였으나 북경으로 천도하였다. 그 덕분에 건국공신들의 근거지는 강남이고 황실은 화북에 있는 상황이 벌어진다.

명나라도 초기에는 원나라 시기처럼 해상 운송을 통해 강남과 화북을 연결했지만, 극심한 왜구(왜구라고 다 일본인은 아니었다 그냥 그 배에 올라타면 다 왜구라 불렸다. 심지어 중국인도 많았고 기록에는 제주 사람들도 끼어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해금 정책을 펴면서 대운하를 주요 수송로로 이용하였다. 수송로가 바다에서 내륙으로 이전된 뒤 각 거점에서 거점까지는 육로를 이용하게 되니 자연스레 화물의 안전 문제가 부각되었을 것이다. 근대 이전의 세계는 동서를 막론하고 공권력이 지방을 제어하기 어려웠다. 로빈훗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암튼.

이러한 수송은 소금 판매와 같은 국가의 전매 사업을 끼고 막대한 부를 거머쥐게 된 몇몇 상가가 주도적으로 하였는데 휘주 상인이 특히 유명하다. 문제는 중국이 워낙 크다보니 대규모 물산 집하지에서 소비지 까지의 연결로는 중소 상인까지 나서야 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무협지 속 무슨 무슨 세가의 실제 모습이다. 화주인 상인이 비용을 대고 표국과 회계사, 각종 대관업무를 처리할 문사까지 동업하여 운영하고 이득을 분배하였다. 아무려면 무림인이라고 이슬만 먹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명의 뒤를 이은 청나라는 상업 문제 쪽은 중국의 관습과 제도를 그냥 계승하였다. 해금도 그대로였고, 운송도 그대로 였다. 하지만 산업과 인구의 발달은 꾸준하여 청말쯤 되면 각종 표국이 넘쳐나게 되고, 이들에게 인원을 공급할 무술 도장인 각종 무관도 성행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무슨무슨 권이니 하는 무공을 대중에 배포한 사람들이다.

19세기 말을 넘어서면 중국의 상업 역시 양행 조직으로 변화한다. 유한양행할 때 그 양행 맞다. 무역회사를 뜻하는 양행과 더불어 근대 문물의 도입으로 표국의 시기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총이 일반화 된 시기에 칼 창이 무슨 소용이었겠나. 그래서 무공은 드디어 우슈 또는 쿵후가 되어 스포츠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게 황비홍 때 쯤이다.

平遥古城的镖局.JPG

2 같이 보기[ | ]

3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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