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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8985247751
==개요==
 
;西游見聞
;서유견문
*저자:유길준(兪吉濬, 1856-1914)
*저자:유길준(兪吉濬, 1856-1914)
*원제:西游見聞
*연대:1889년 탈고, 1895년 출판
*연대:1889년 탈고, 1895년 출판
*ISBN 8985247751


== [[거북이]]의 서평 ==
== [[거북이]]의 서평 ==
유길준의 서유견문이 사실 지금에 와서 뭔가 심각한 의미를 가지기는 힘들 다. 백년 조금 전의 사람이 서양에 유학가서 느낀 것을 적었는데 그것에서 사실 우리가 뭔가 실용적인 것을 얻는것은 웃기는 일이니까.
유길준의 서유견문이 사실 지금에 와서 뭔가 심각한 의미를 가지기는 힘들 다. 백년 조금 전의 사람이 서양에 유학가서 느낀 것을 적었는데 그것에서 사실 우리가 뭔가 실용적인 것을 얻는것은 웃기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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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학술]]
[[분류: 1895년 책]]
[[분류: Pinkcrimson]]

2016년 3월 28일 (월) 15:47 판

1 개요

西游見聞
서유견문
  • 저자:유길준(兪吉濬, 1856-1914)
  • 연대:1889년 탈고, 1895년 출판
  • ISBN 8985247751

2 거북이의 서평

유길준의 서유견문이 사실 지금에 와서 뭔가 심각한 의미를 가지기는 힘들 다. 백년 조금 전의 사람이 서양에 유학가서 느낀 것을 적었는데 그것에서 사실 우리가 뭔가 실용적인 것을 얻는것은 웃기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는 선비였다.

유길준이 미국에 건너가서 겪은 것은 신세계였다. 그 신세계는 프랑스의 도움과 자력으로 걸선한 나라로 뭐든 하면 이룰 수 있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쳐있었으며 바야흐로 산업혁명의 결과로 고도 기계문명의 세계를 열어가 고 있는 프런티어였던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합리성이 가지고있는 엄청난 힘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일단 받아들였다. 말과 풍습 문명을 접하며 그는 인간사의 보편성과 특수성 을 동시에 체험하였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결코 자긍심을 잃지 않았 다. 그 사회에는 있지않은 조선사회가 가지고있는 도덕성의 힘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길준의 태도는 분명 선비의 그것이었다. 그는 자신과 이질감을 느끼는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며 그 것을 적고있다. 섣부른 판단은 유보한 채로 그 문화적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는 누구나 지켜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쉽게 지킬 수 있는 모습은 아 니다.

그리고 그는 똘망똘망한 학생이었다. 자연과학, 철학, 지리학, 역사, 사회 학, 정치, 경제 등 전반에 걸친 서구문화를 총체적으로 인식하는데 많은 힘 을 쏟았다. 물론 그의 수준을 학문이라고 말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제아무 리 천재라 하더라도 몇년만에 그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잖은가. 하지만 그의 인식 수준은 현재의 똘똘한 대학생 수준의 것이다. 당대에 그런 수준 에 도달했다는 것은 그가 편견없고 성실한 학생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읽다가 나는 놀라고 말았다. 백년전 사람이 몇년만에 이런 수준에 도 달했는데 나는 너무 나태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섬�쓺하게 들었던 것이 다.

몇몇 문화의 전달자들은 유길준의 태도에서 배워야 할 점이 있다. 일단 그 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용어를 우리말화(물론 여기서 말하는 우리말 이란 당시 지식인들의 용어인 한자다)하였다. 또 대부분의 척도를 우리식으 로 변환하였다. 이것은 그가 독자들을 위해서 세심하게 배려하며 문화를 전 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과연 요즘 사람들은 얼마나 주체적으로 문화를 받 아들이며 얼마나 독자들을 배려하는지 심히 의문이 든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잘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이 접하 는 정보라는 것이 상당히 편협하고 많은 곳을 다녀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자신의 글은 무척 한정된 것이며 오류 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인용했던 정보들은 대 개 십년 내외의, 당시로서는 꽤 최신정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었으며 그 는 가능한한 다양한 세계의 정보를 소개하려 여러곳의 정보를 소개하고 있 다. 이는 일찌기 그가 비교문화적인 방법론을 잘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가하면 그는 종종 다른 나라의 그것과 조선의 상황을 연계시키기도 하 는데 그러한 것을 통해서 조선이 결코 뒤떨어진 나라가 아님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하겠다. 그가 민주정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의 장점을 밝히면 서도 입헌군주제를 들어 조선 역시 훌륭한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요즘 학자들은 조선후기에 자생적 자본주의가 태동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 조선사회는 분명 상업이 융성하려 하 고있었다.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상업이 매우 억제되었던 조선에서도 유통 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던 시기였는데 애석하게도 그 중요한 시기에 세도 정치가 극을 치달았고, 악순환을 끊지 못한 채 일본의 침략을 맞이했던 것 이다.

유길준이 최초라면 그의 뒤를 잇는 이들이 줄을 이었어야 했다. 허나 역사 는 그렇지 않았고 그와 같은 길을 걸었던 개화파는 열린 사고에도 불구하고 주체적 인식이 상당히 결여되어 결코 긍정적인 결과를 낳지 못했다.

허나 그가 가지고 있던 선비정신과 그것에 입각한 주체적 세계인식은 여전 히 유효하다. 아직도 유교를 과거지향적이고 보수반동적이라고 여기는 사람 들이 많이 있는데 그 높은 도덕성과 다른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보편주의 는 포기하기엔 정말 너무나 아까운 것이다.

유길준의 행동은 담담하게 그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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