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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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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어) Tystnaden
;(스웨덴어) Tystnaden

2023년 7월 2일 (일) 12:38 기준 최신판

  다른 뜻에 대해서는 침묵(slience)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개요[ | ]

(스웨덴어) Tystnaden
(영어) The Silence
침묵

 

2 줄거리[ | ]

에스타(추린)와 여동생 안나(린드브롬)와 안나의 아이인 7살짜리 요한(린드스트룀)은 휴가 여행에서 돌아오던 중 어떤 호텔에 숙박하게 되는데 거기서는 스웨덴어가 통하지 않는다. 안나는 사나이를 구해 가지고 시내로 들어가고 인텔리인 에스타는 호텔의 침대에서 혼자 자위(自慰)한다. 그날 밤 안나는 언니의 위선적인 태도에 대한 반발도 있고 해서 동행한 남자를 호텔로 끌고 들어가 육체적인 향락에 빠진다. 그리하여 자매(姉妹)의 단절은 결정적인 것으로 된다.

3 # 거북이[ | ]

Tystnaden 침묵 관련자료:없음 [25234] 보낸이:정철 (zepelin ) 1999-06-25 22:57 조회:79

흔히 말하길 '신의 3부작'이라는 이 영화들-'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겨 울빛','침묵'-을 모두 보고 드디어 확신이 섰다. 이 영화들을 신성에 관계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것은 그다지 적절치 못하다.
이 영화들은 '관계의 3부작' 아니면 '이성과 감성의 3부작'이라고 해야 어 울린다. '사랑의 3부작'이라고 말하면 너무 해석의 범위가 넓다.

베르히만의 영화들은 무척 연극적이다.
절제된 대사가 보는이를 긴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잔잔한 이미지가 주조이나 종종 극적인 장면이 나타나서 표현하고자하는 바를 극대화한다.
장소의 변화가 그리 크지 않고 등장 인물 수가 최소한으로 제한된다.
하지만 연극에서는 할 수 없는 빛의 처리라거나 편집을 통한 적재적시에 맞는 장면전환은 연극에서 담기 힘든 것들을 담게한다. 그리고 이건 칼라보 다 흑백이 적절하다.

등장인물 세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티비나 식탁보처럼 소품이다.
수년간 쌓인 갈등속에서 사이가 틀어져버린 자매와 동생의 아이가 그 주인 공이다. 언니는 이성적인 사람이며 동생은 그에 반발하여 감정적인 면이 더 부각되는 사람이고 아이는 양쪽을 오갈 수 있는 순수함의 상징이다.
대개 형제든 자매든 나이 많은 쪽이 먼저 성격이 형성되고 동생은 그에 반 한 성격이 더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 그 과정에서 연장자가 형이나 언니 노 릇을 잘 못하면 갈등의 크기는 계속 커진다. 여기서의 자매는 그런 사이다.
병에 걸린 언니는 꽤 지적 소양이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을 잃 어간다. 여자로서의 성적 매력도 없어져가고 일할 수 있는 기력도 떨어져가 고 자신감을 상실하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무력감과 고독감이 짓누른다.
반면 동생은 언니를 동경했으나 그 과정에서 좌절감을 느끼고 하고싶은대 로 하며 산 인물이다. 성적인 터부가 별로 없고 가식을 싫어한다.
영화의 내용은 이들이 결코 소통하지 못하는 과정을 그냥 보여주는 것이다.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침묵이다.
말과 몸짓은 있지만 결국 침묵과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 양자는 모두 괴로 워한다. 악감정이 있는것은 아니지만 너무 살아온 것이 달라서, 둘이 쓰는 말이 너무나 달라서 그들은 대화를 하지 못한다.
침묵을 깨보려 하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아이지만 역부족이다.

동생의 대사중에 무작정 하게된 섹스파트너에게 '당신과 말이 안통해서 참 다행이야. '라고 말하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저 동물적인 욕구를 언어가 아닌 몸짓으로 의사소통한 것이다.
언니의 대사중엔 '고독은 토론할 필요가 없지. '라는 말이 인상깊다.
정말 고독은 토론할 필요가 없다.

내 생각엔 베르히만은 분명히 인간의 불완전성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몸짓 을 기록으로 남겨보고 싶어하는 심리학자이다. 그리고 그가 거장 대접을 받 는 것은 그의 영화를 본 사람들이 뭔가 들킨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화하지 않더라도 나는 정말 들킨 기분이었다.
삼부작 모두에서 이성을 대변하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들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않으려야 않을수가 없었다. 그들과 같은 상황일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들보다 낫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감정을 언제 터뜨려야 하는지 잘 모른다.
내가 어쩌다가 관용을 가지고 있다고 비춰진다면 그것은 언제 화를내야하 는지 잘 몰라서일 것이다. 이러다보니 또 말은 하지만 소통이 되지않는 상 황이 생긴다. 나와 주위사람은 동시에 침묵속으로 빠진다.

영화에서 해결책을 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품을 생각은 없다.
자신의 약점을 삼자적 입장에서 보게 되는것만 해도 그게 어딘데.
다음에 또 볼때 좀 더 편안한 기분으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4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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