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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 소개]
[간단 소개]


개국 30년만에 어떻게 일본은 강국이 될 수 있었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따라가다보면 메이지 시기의 인물들에게 관심가질 수 밖에 없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개화를 논하고 곧이어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와 국민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하지만 그에게 민권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었다. 민권과 국권이 충돌할 때 그는 서슴없이 국권의 손을 들기도 했다. 국권과 민권이 어떻게 밀고 당기며 국가를 만들어나가는가는 메이지 시기를 바라보는 핵심 관점이다.
이 점은 오쿠마 시게노부에 있어서도 비슷했는데 민권파의 리더격이었던 그는 의회정치의 지지자이자 선거건 확대를 위해 노력했지만, 정작 수상이 된 이후에는 대중의 인기를 노려 청일전쟁에서 강경노선을 취하는 등 현실 정치가로서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자유민권운동 진영에도 권력지향형 정치가는 많았으며 메이지 정부의 번벌정치에 반발한 인물 상당수가 참여했다. 그 가운데서 오쿠마 역시 안으로는 입현주의, 밖으로는 제국주의라는 현실을 보여주는 정치가였다.


== 책속 한구절 ==
== 책속 한구절 ==

2023년 11월 29일 (수) 17:19 판

1 개요

근대 일본인의 국가인식 - 메이지 인물 6인의 삶을 관통한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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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인의 국가인식 - 메이지 인물 6인의 삶을 관통한 국가
1판 1쇄 발행 2023년 12월 1일
박훈·이새봄·조국·박완·오윤정·박은영·이은경 지음
편집 정철 표지 디자인 김상만
발행 정철 출판사 빈서재
이메일 pinkcrimson@gmail.com
ISBN 979‑11‑980639‑5‑3 (94910)

가로 128mm X 세로 188mm
399페이지. 22000원.

913 일본사 > 메이지 시대
991 아시아전기 >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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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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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 . . . . . . . . . . . . . . . . . . . . . . . . . . 6
서장 : ‘대외론’이라는 ‘사상의 실상’ . . . . . . . . . 13

제 1 장 임오군란 ·갑신정변 시기의 대외론 . . . . 35
들어가며 . . . . . . . . . . . . . . . . . . . . . . 35
1.1 ‘조선 개조론’의 구조와 ‘탈아론’ . . . . . . 41
1.2 ‘청일협조론’과 ‘탈아론’ . . . . . . . . . . . 70

제 2 장 청일 ·러일전쟁에 걸친 대외론 . . . . . . . 97
들어가며 . . . . . . . . . . . . . . . . . . . . . . 97
2.1 『일본신문』의 ‘북수남진론’ . . . . . . . . . 105
2.2 ‘중국 분할’의 개시와 ‘북수남진론’ . . . . . 111
2.3 의화단 운동과 ‘북진론’의 대두 . . . . . . . 123
2.4 청일 ·러일전쟁 사이의 대외론 . . . . . . . 132

제 3 장 신해혁명 전후의 대외론 . . . . . . . . . . . 137
들어가며 . . . . . . . . . . . . . . . . . . . . . . 137
3.1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탈아론적 대외론 . . . 141
3.2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아시아주의적 대외론 147
3.3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위안스카이 배척 정책 159
3.4 약간의 전망 . . . . . . . . . . . . . . . . . 171

제 4 장 결론 . . . . . . . . . . . . . . . . . . . . . . 179
후쿠자와 유키치로 본 메이지 초기의 내정과 외교 . . . 199

후기와 해설 . . . . . . . . . . . . . . . . . . . . . . . 225
초판 후기 . . . . . . . . . . . . . . . . . . . . . 225
문고판 후기 . . . . . . . . . . . . . . . . . . . . 231
해설 : ‘탈아론’과 ‘아시아주의’라는 환영 . . . (가루베 다다시) 235
역자 후기 . . . . . . . . . . . . . . . . . . . . . 243
찾아보기 . . . . . . . . . . . . . . . . . . . . . . . . . 247

4 출판사 책소개

[헤드카피]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인들의 충성 대상은 다이묘, 쇼군에서 천황으로 바뀌었다. 충성심이 애국심으로 바뀌는 과정 속에서 근대 일본인들에게 국가란 어떤 것이었는지 읽어본다.

  • 후쿠자와 유키치의 국가론은 독립된 주체인 개인이 모여 한 나라의 독립으로 이어진다는 발상에 기초한다. 관에 의존하지 않는 민의 존재를 강조했으나 그의 이상론은 국가적 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현실론에 종종 가려졌다.
  • 오쿠마 시게노부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같은 정치가·군인에게는 나라가 망할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있었고 민권도 중요하지만 시기상조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들에게 국민은 국가가 이끌고 가야 할 대상이었고 국가는 그만큼 절대적이었다.
  • 다카무라 고운·우치무라 간조·쓰다 우메코 등의 문화인에게는 예술·종교·여성교육이라는 주요 과업이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시대적 한계로 그들의 과업은 국가라는 대명분의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본인들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간단 소개]

개국 30년만에 어떻게 일본은 강국이 될 수 있었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따라가다보면 메이지 시기의 인물들에게 관심가질 수 밖에 없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개화를 논하고 곧이어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와 국민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를 고민한다. 하지만 그에게 민권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었다. 민권과 국권이 충돌할 때 그는 서슴없이 국권의 손을 들기도 했다. 국권과 민권이 어떻게 밀고 당기며 국가를 만들어나가는가는 메이지 시기를 바라보는 핵심 관점이다.

이 점은 오쿠마 시게노부에 있어서도 비슷했는데 민권파의 리더격이었던 그는 의회정치의 지지자이자 선거건 확대를 위해 노력했지만, 정작 수상이 된 이후에는 대중의 인기를 노려 청일전쟁에서 강경노선을 취하는 등 현실 정치가로서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자유민권운동 진영에도 권력지향형 정치가는 많았으며 메이지 정부의 번벌정치에 반발한 인물 상당수가 참여했다. 그 가운데서 오쿠마 역시 안으로는 입현주의, 밖으로는 제국주의라는 현실을 보여주는 정치가였다.

5 책속 한구절

후쿠자와의 국회에 대한 낙관은 정부가 초연주의를 주장하고 의원내각제를 사실상 부정하는 상황 속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장차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 정당 내각이 실현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국회가 개설된 이후에도 몇 년 간은 ‘회의의 훈련’이나 ‘의사議事 연습’의 단계에 머물 수밖에 없으리라는 전망 속에 어떻게 하면 그 시간을 무탈하게 보낼 것인가가 관민조화론의 초점이었다. 하지만 제국의회의 현실은 그의 기대를 계속해서 배신했다. 결국 후쿠자와는 정부와 정당 사이의 대립이 격화될수록 관민조화론을 스스로 부정하는 듯한 국회 해산 등의 수단에 호소해 정당과 힘으로 대결하라는 주장을 펼치게 된다.– 관민조화를 지향했으나 현실정치 속에서 종종 국권파의 입장에 서기도 했던 후쿠자와 유키치 [p92]

문제는 이같은 일관된 인식과 정치활동이 내재적으로 완결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주지하듯 근대 일본의 역사는 한국, 중국 등 주변 국가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배의 역사이기도 했다. 오쿠마의 시대 흐름에 대한 민감한 포착은 일본 국내에서의 헌정 실시에 대한 일관된 인식으로 나타났으나, 대외적으로는 일본의 팽창주의에 대한 안이한 인식으로 이어졌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우세로 전황이 전개되는 가운데 오쿠마는 일본이 산동성, 나아가 양자강 지역까지 점령할 것을 주장하는 강경론을 내세웠다. 물론 오쿠마가 중국에 대한 침략 행위 자체를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중일 간 우호 관계를 심화할 수 있다 보았다. 실제로 청일전쟁, 의화단 사건 이후 와세다대학은 청국 유학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들을 위한 별도의 교육기관인 청국유학생부를 신설하는 등 중일 간 교류와 우호관계 수립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와중에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21개조 요구를 강요한 것도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쿠마 내각 시기에 이뤄졌다. 중국과의 우호 관계 수립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국익이라는 관점 속에서만 이해되었던 것이다.– 주변국과의 공존을 지향하면서도 청일전쟁에서 강경하게 나아갔던 오쿠마 시게노부 [p143]

그리고 슈타인이 본 일본의 이익 강역은 바로 조선이었다. 다만 그는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각 육 · 해상 교전국에 대해 조선의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참으로 조선의 중립은 일본의 권세 강역을 보전하기 위해 발생하는 모든 이익을 충족하는 것이다” 라고 하여 일본은 조선 점령이 아닌 “조선의 현상을 보존”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일본의 이익 강역은 조선의 중립을 인정하는데 있으므로 적어도 이를 방해하려 하는 자가 있을 때는 힘을 다하여 이를 간섭해야 한다” 라는 조선에 대한 간섭을 정당화하는 논리이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은 적군의 통행 또는 일부 영토 점령도 저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러한 경우에 전력을 다하여 막아야 하기 때문에 항상 병력을 파견해둘 수밖에 없다” 라고 하여 조선의 독립 유지 가능성을 부정하고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상주시킬 필요성까지 언급하였다. 이는 앞서 ‘군사 의견서’에서 확인한 야마가타의 대조선 방침 및 조선 인식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남하를 두려워한 야마가타가 조선을 일본의 이익선으로 정의하게 된 계기 [p207]

6 저자 소개

  • 박훈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등을 집필했다.
  • 이새봄 세이케이대학 정치학과 교수. 근세 ·근대의 일본 정치사상사를 연구하고 있다.
  • 조국 성신여자대학교 사학과 조교수. 근대 일본의 법제사 ·외교사를 연구하고 있다.
  • 박완 한앙대학교 창의융합교육원 조교수. 근대 일본의 정치 ·군사사를 연구하고 있다.
  • 오윤정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조교수. 근대 일본의 미술사와 시각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 박은영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일본 그리스도교사와 근대 일본 여성의 사상 형성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 이은경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부교수. 근대 일본의 역사를 여성 인물과 운동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다.

[출판사 / 총서 소개]

에도 말기와 메이지유신 전환기를 주로 공부하는 박훈 교수는 도쿠가와 시대를 다룬 연구서가 매우 적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변의 연구자들을 모으고 때를 기다리다가 플라톤 아카데미와 함께 연구서를 출간할 기회를 마련했다. 한일관계가 나빠질수록 서로를 알아야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간 외면되었던 일본 근세와 근대의 주요 연구를 소개하고자 한다. 빈서재 출판사는 이에 호응하여 연구총서를 준비했다.

7 띠지의 추천서 목록

메이지 시대 인물 고전/사료 소개
  •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후쿠자와 유키치, 이산)
  • 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시부사와 에이이치, 21세기북스)
  • 일본인이 말하는 대표적 일본인 (우치무라 간조, 인문사)
메이지 시대 인물 연구서/교양서 소개
  •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 - 그들은 왜 칼 대신 책을 들었나 (박훈 / 21세기북스)
  • 후쿠자와 유키치 다시 보기 (마츠다 고이치로 / 아포리아)
  •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 (한상일 / 까치)
  • 이토 히로부미 (이토 유키오 / 선인)
  • 근대 일본 여성 분투기 - 일본과 여성의 관계사 (이은경 / 한울)
  • 나의 일본미술 순례 1 - 일본 근대미술의 이단자들 (서경식 / 연립서가)
  • 『도련님』의 시대 (세키카와 나쓰오, 다니구치 지로 / 세미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