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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노 준지 지음(1977), 조국 옮김(2023)
* 반노 준지 지음(1977), 조국 옮김(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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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NS 공유를 위한 이 페이지의 URL : https://zetawiki.com/wiki/9791198063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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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정철 출판사 빈서재
발행 정철 출판사 빈서재
이메일 pinkcrimson@gmail.com
이메일 pinkcrimson@gmail.com
ISBN 979‑11‑980639‑8‑4 (94910)
ISBN 979‑11‑980639‑1‑5 (94910)


가로 128mm X 세로 188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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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결론 . . . . . . . . . . . . . . . . . . . . . . 179
제 4 장 결론 . . . . . . . . . . . . . . . . . . . . . . 179
후쿠자와 유키치로 본 메이지 초기의 내정과 외교 . . . 199
후쿠자와 유키치로 본 메이지 초기의 내정과 외교 . . .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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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책소개 ==
== 출판사 책소개 ==
[헤드카피]
[헤드카피]
근대 일본의 아시아 협력 논리는 명백한 허구였고 팽창을 위한 핑계였다. 일본의 대표적 역사가가 건조하게 논증하는 신체와 사상의 불일치를 읽는다.
근대 일본의 아시아 협력 논리는 명백한 허구였고 팽창을 위한 핑계였다. 일본의 대표적 역사가가 건조하게 논증하는 신체와 사상의 불일치를 읽는다.


* 후쿠자와 유키치는 '탈아론' 이전에도 아시아협력에 큰 관심이 없었다.강한 청나라와의 정면승부는 피하려고 했을 뿐이다. 청불전쟁 패배로 약한 청나라를 확인했고 갑신정변으로 청일간 충돌 계기도 마련된 이상 더이상의 중일협조를 고려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탈아론'이다.  
* [[후쿠자와 유키치]]는 '탈아론' 이전에도 아시아협력에 큰 관심이 없었다. 강한 청나라와의 정면승부는 피하려고 했을 뿐이다. 청불전쟁 패배로 약한 청나라를 확인했고 갑신정변으로 청일간 충돌 계기도 마련된 이상 더이상의 중일협조를 고려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탈아론'이다.  
* 후쿠자와 이후 구가 가쓰난·고노에 아쓰마로·야마가타 아리토모 모두 아시아협력과 배척(탈아)이라는 두가지 입장에서 왔다갔다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일본 외교의 행태는 모순의 연속이다.
* 후쿠자와 이후 [[구가 가쓰난]]·[[고노에 아쓰마로]]·[[야마가타 아리토모]] 모두 아시아협력과 배척(탈아)이라는 두가지 입장에서 왔다갔다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일본 외교의 행태는 모순의 연속이다.
* 하지만 당면한 주적이 누구였는가를 확인하면 그 언설의 진위를 파악할 수 있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조선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청나라와 싸운다. 만주를 차지하기 위해 아시아(중국)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서양(러시아)과 싸운다. 눈앞의 이익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일관되었고 이것이 일본 근대 외교의 실상이었다.
* 하지만 당면한 주적이 누구였는가를 확인하면 그 언설의 진위를 파악할 수 있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조선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청나라와 싸운다. 만주를 차지하기 위해 아시아(중국)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서양(러시아)과 싸운다. 눈앞의 이익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일관되었고 이것이 일본 근대 외교의 실상이었다.


[간단 소개]
[간단 소개]


[[문명개화]]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메이지 일본은 경제성장과 동시에 군사적 팽창을 시도한다. 여기서 굳이 선악을 따질 필요는 없다. 사회진화론으로 대변되는 약육강식의 세계관이 19세기의 소위 문명국가 전반을 휩쓸었고 먹지 않으면 먹힌다고 생각했다. 일본이라는 신체는 대외팽창을 시작했는데 그것을 지탱하는 사상, 그 팽창을 정당화할 수 있는 사상이란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이 이 책의 문제의식이다.
그리고 저자 반노 준지는 단호하게 말한다. 메이지 일본의 대외관계란 상황논리에 따라 눈앞의 이익을 좆는 것에 집중했을 뿐, 그 안에 어떠해야 한다라는 정당성이나 사상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고 말이다. 후쿠자와 유키치조차 그 정당성을 찾고자 했지만 고작 찾아낸 것이 한국의 친일 개화파가 '스스로 원한다' 정도의 논리를 넘어서지 못했다. 다른 정치가나 사상가들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팽창할 것인가를 놓고 논쟁을 했을지언정 길게 보아 조선/한국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중국과 어떤 관계가 될 것인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일본에 아시아주의라는 사상적 계보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조차 낭만적인 기분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문화적 친선과 군사적 침략을 동시에 지지할 정도로 일관성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 외에 조선이나 중국과 협력해서 서양을 막아내야 한다는 논의는 모두 그 시점에서 가장 일본에 유리한 논리를 택한 결과였다. 아시아주의는 조선 내정에 대한 일본의 개입 여부, 청의 국력에 대한 평가 여하에 따라 나타난 상황논리에 불과했다
아시아 연대론이 탈아론으로 형태가 바뀔 수는 있다. 하지만 아시아 연대라는 사상이 탈아적인 사상으로 바뀔 수는 없다. 언설의 배후에 어떤 상황이 놓여있는가를 이해하지 않으면 그 말의 의도를 읽어낼 수가 없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관점을 유지하며 근대 일본의 외교사를 읽어나간다. 일본사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꽤나 느껴왔을 제국 일본의 모순적 행태를 하나로 꿰어서 해소해주는 책이다.


== 책속 한구절 ==
== 책속 한구절 ==
{{인용문|일본 문화를 구성하는 많은 요소가 외래문화, 특히 중국에서 전래된 것임은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적’ 문화의 대표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실은 전래된 당초에는 ‘이국적’이었기 때문에 지식인들에게 환영받았다가, 근세에 들어선 후 그것이 ‘일본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할 만한 것이 있다. 첫손가락에 꼽을 만한 것이 바로 선(禪)이다. |[p40]}}
{{인용문|‘지나의 패배는 곧 일본국이 이웃의 도움을 잃는 것’이라는 후쿠자와 자신이 『시사소언』이래 반복해 주창해 온 주장을 ‘내 소견은 조금 다른 바가 있다’며 태연히 배척하고 있기에 후쿠자와의 논리적 일관성을 의심하게 될지 모르나 「탈아론」과 외견상 유사한 이 논설에서 후쿠자와가 오로지 ‘지나’와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면 이 논설만큼 후쿠자와의 주장이 정직하게 나온 것은 없다.『시사소언』이래 후쿠자와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은 조선 개조로 청국 개조는 아니라는 지금까지의 관점에 서자면 후쿠자와가 ‘지나의 패배’를 전혀 개의치 않은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p61]}}
 
{{인용문|보통 후쿠자와의 「탈아론」은 그의 ‘아시아 개조론’으로부터 ‘아시아 침략론’으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논설로 인용된다. 후쿠자와에 관해서뿐 아니라 ‘탈아’라는 말은 일본 아시아 침략의 대명사로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후쿠자와에 관한한 그의 대외론은 그가 조선 개조론을 주창한 때가 「탈아론」 이후보다도 훨씬 침략적이었다.
 
1882년 7월의 임오군란을 후쿠자와는 조선 국내에서 친일파가 일본의 무력에 의해 정권을 잡을 호기라 생각했다. 1884년 12월의 갑신정변은 임오군란과는 역순으로 후쿠자와의 이러한 주장을 실현하고자 해 실패한 쿠데타였다. 임오군란에서 후쿠자와는 조선 국내에서의 자연 발생적인 반일 폭동을 친일파 정권의 탄생에 이용하고자 한 것에 반해, 갑신정변은 후쿠자와가 육성해 온 조선 국내의 친일파 세력의 쿠데타로 발발해 실패했다는 의미에서 양자의 순서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후쿠자와는 조선에서 무력을 행사하고 이를 배경으로 친일파 정권을 수립하고자 끊임없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탈아론」이후보다 훨씬 침략적이었다.|[p66]}}


{{인용문|근세의 쇄국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서술하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 특히 정책 실시에 관한 후세의 논평은 그 의의와 공과라는 점에서 심히 부당한 부담을 지웠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현대 일본인의 국제성 결여조차 근세 쇄국의 후유증인 것처럼 말하기도 하는데 일본인의 섬나라 근성이 단순히 쇄국 때문이라고 할 수 없다.|[p75]}}
{{인용문|1895년부터 1897년의 구가 가쓰난의 ‘북수남진론’(러일협조론)이 1898년을 계기로 ‘지나 보전론’으로 바뀐 것을 구미협조주의에서 아시아주의로의 사상적 전환이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뀐 것은 대외관이 아니라 대외론에 불과하다. 즉 러시아의 뤼순·다롄 조차로 인해 종래 조선을 둘러싼 러일협상론이 유지될 수 없게된 것에 불과하다. 반대로 고노에나 동아동문회의 남청 지방 교육 · 문화활동은 확실히 아시아주의적 대외관에 기반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이는 동아동문회의 대외론이 아시아주의였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청국에서의 문화 · 교육활동에 종사하는 한편으로 도미즈 히론도의 조선을 취하고 만주를 취한다는 의론에 박수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p134]}}


{{인용문|기타무라 도코쿠는 『도쿠가와 시대 평민적 이상』에서 “겐로쿠 문학을 비하하여 일본 문학의 치욕”이라 간주하는 설에 반대하며 “일본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평민의 목소리”라 주장하면서 평민적 이상의 발로이자 일본의 생명 표현이라 평가하였다. 그러면서 “도쿠가와 3백 년의 저변에 흐르는 큰 강물이 눈앞을 가로지를 때 나는 이를 즐겨 관찰한다. 누가 알겠는가. 도쿠가와 시대에 땅 밑에서 흐르던 큰 강물은 메이지의 정치적 혁신에 막혀 멈출 있는 것이 아님을”이라고 논하였다.|[p149]}}
{{인용문|이같이 야마가타가 일본을 서양 열강의 일원으로 자각하고 그 관점에서 중국을 대할 것인가 역으로 일본을 동아시아의 일원으로 위치지어 서양 열강에 대항하는 동문동종인 중일 양국의 친선을 강조할 것인가는 오로지 중국의 권익 탈환 요구의 강약 혹은 중일간 역관계力關係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야마가타의 외교 사상이 상황주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외관계에 관한 ‘사상’이 상황주의적이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나 중국이 어떠한 정책 전환을 하든 미동도 하지 않는 외교사상이라는 것이 존재할지도 모르나 그같은 ‘사상’은 분석하기 전부터 답을 알 있기에 적어도 분석 대상으로서는 흥미가 일지 않는다. 내가 여기에서 야마가타에 관해서도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야마가타의 상황주의가 아닌 상황주의의 구조다. 일본인이 ‘탈아론’형 대외론을 전개하거나 ‘아시아주의’적 대외론을 주창한다거나 할 때에는 각각 특정 상황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나의 가설에 대한 하나의 예증으로 야마가타 아리토모 대외론 의 변천은 충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p134]}}


== 저자 / 역자 소개 ==
== 저자 / 역자 소개 ==

2023년 11월 27일 (월) 10:06 기준 최신판

1 개요[ | ]

근대 일본과 아시아 - 메이지·사상의 실상
近代日本とアジア - 明治・思想の実像
근대일본과 아시아 – 메이지·사상의 실상
1판 1쇄 발행 2023년 12월 1일
반노 준지 지음 조국 옮김
편집 정철 표지 디자인 김상만
발행 정철 출판사 빈서재
이메일 pinkcrimson@gmail.com
ISBN 979‑11‑980639‑1‑5 (94910)

가로 128mm X 세로 188mm
251페이지. 22000원.

913 일본사 > 메이지 시대
991 외교, 국제관계 > 일본 외교사

2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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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목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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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 . . . . . . . . . . . . . . . . . . . . . . . . . . 6
서장 : ‘대외론’이라는 ‘사상의 실상’ . . . . . . . . . 13

제 1 장 임오군란 ·갑신정변 시기의 대외론 . . . . 35
들어가며 . . . . . . . . . . . . . . . . . . . . . . 35
1.1 ‘조선 개조론’의 구조와 ‘탈아론’ . . . . . . 41
1.2 ‘청일협조론’과 ‘탈아론’ . . . . . . . . . . . 70

제 2 장 청일 ·러일전쟁에 걸친 대외론 . . . . . . . 97
들어가며 . . . . . . . . . . . . . . . . . . . . . . 97
2.1 『일본신문』의 ‘북수남진론’ . . . . . . . . . 105
2.2 ‘중국 분할’의 개시와 ‘북수남진론’ . . . . . 111
2.3 의화단 운동과 ‘북진론’의 대두 . . . . . . . 123
2.4 청일 ·러일전쟁 사이의 대외론 . . . . . . . 132

제 3 장 신해혁명 전후의 대외론 . . . . . . . . . . . 137
들어가며 . . . . . . . . . . . . . . . . . . . . . . 137
3.1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탈아론적 대외론 . . . 141
3.2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아시아주의적 대외론 147
3.3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위안스카이 배척 정책 159
3.4 약간의 전망 . . . . . . . . . . . . . . . . . 171

제 4 장 결론 . . . . . . . . . . . . . . . . . . . . . . 179

후쿠자와 유키치로 본 메이지 초기의 내정과 외교 . . . 199

후기와 해설 . . . . . . . . . . . . . . . . . . . . . . . 225
초판 후기 . . . . . . . . . . . . . . . . . . . . . 225
문고판 후기 . . . . . . . . . . . . . . . . . . . . 231
해설 : ‘탈아론’과 ‘아시아주의’라는 환영 . . . (가루베 다다시) 235
역자 후기 . . . . . . . . . . . . . . . . . . . . . 243
찾아보기 . . . . . . . . . . . . . . . . . . . . . . . . . 247

4 출판사 책소개[ | ]

[헤드카피] 근대 일본의 아시아 협력 논리는 명백한 허구였고 팽창을 위한 핑계였다. 일본의 대표적 역사가가 건조하게 논증하는 신체와 사상의 불일치를 읽는다.

  • 후쿠자와 유키치는 '탈아론' 이전에도 아시아협력에 큰 관심이 없었다. 강한 청나라와의 정면승부는 피하려고 했을 뿐이다. 청불전쟁 패배로 약한 청나라를 확인했고 갑신정변으로 청일간 충돌 계기도 마련된 이상 더이상의 중일협조를 고려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탈아론'이다.
  • 후쿠자와 이후 구가 가쓰난·고노에 아쓰마로·야마가타 아리토모 모두 아시아협력과 배척(탈아)이라는 두가지 입장에서 왔다갔다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일본 외교의 행태는 모순의 연속이다.
  • 하지만 당면한 주적이 누구였는가를 확인하면 그 언설의 진위를 파악할 수 있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조선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청나라와 싸운다. 만주를 차지하기 위해 아시아(중국)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서양(러시아)과 싸운다. 눈앞의 이익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일관되었고 이것이 일본 근대 외교의 실상이었다.

[간단 소개]

문명개화의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메이지 일본은 경제성장과 동시에 군사적 팽창을 시도한다. 여기서 굳이 선악을 따질 필요는 없다. 사회진화론으로 대변되는 약육강식의 세계관이 19세기의 소위 문명국가 전반을 휩쓸었고 먹지 않으면 먹힌다고 생각했다. 일본이라는 신체는 대외팽창을 시작했는데 그것을 지탱하는 사상, 그 팽창을 정당화할 수 있는 사상이란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이 이 책의 문제의식이다.

그리고 저자 반노 준지는 단호하게 말한다. 메이지 일본의 대외관계란 상황논리에 따라 눈앞의 이익을 좆는 것에 집중했을 뿐, 그 안에 어떠해야 한다라는 정당성이나 사상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고 말이다. 후쿠자와 유키치조차 그 정당성을 찾고자 했지만 고작 찾아낸 것이 한국의 친일 개화파가 '스스로 원한다' 정도의 논리를 넘어서지 못했다. 다른 정치가나 사상가들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팽창할 것인가를 놓고 논쟁을 했을지언정 길게 보아 조선/한국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중국과 어떤 관계가 될 것인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일본에 아시아주의라는 사상적 계보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조차 낭만적인 기분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문화적 친선과 군사적 침략을 동시에 지지할 정도로 일관성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 외에 조선이나 중국과 협력해서 서양을 막아내야 한다는 논의는 모두 그 시점에서 가장 일본에 유리한 논리를 택한 결과였다. 아시아주의는 조선 내정에 대한 일본의 개입 여부, 청의 국력에 대한 평가 여하에 따라 나타난 상황논리에 불과했다

아시아 연대론이 탈아론으로 형태가 바뀔 수는 있다. 하지만 아시아 연대라는 사상이 탈아적인 사상으로 바뀔 수는 없다. 언설의 배후에 어떤 상황이 놓여있는가를 이해하지 않으면 그 말의 의도를 읽어낼 수가 없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관점을 유지하며 근대 일본의 외교사를 읽어나간다. 일본사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꽤나 느껴왔을 제국 일본의 모순적 행태를 하나로 꿰어서 해소해주는 책이다.

5 책속 한구절[ | ]

‘지나의 패배는 곧 일본국이 이웃의 도움을 잃는 것’이라는 후쿠자와 자신이 『시사소언』이래 반복해 주창해 온 주장을 ‘내 소견은 조금 다른 바가 있다’며 태연히 배척하고 있기에 후쿠자와의 논리적 일관성을 의심하게 될지 모르나 「탈아론」과 외견상 유사한 이 논설에서 후쿠자와가 오로지 ‘지나’와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면 이 논설만큼 후쿠자와의 주장이 정직하게 나온 것은 없다.『시사소언』이래 후쿠자와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은 조선 개조로 청국 개조는 아니라는 지금까지의 관점에 서자면 후쿠자와가 ‘지나의 패배’를 전혀 개의치 않은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p61]

보통 후쿠자와의 「탈아론」은 그의 ‘아시아 개조론’으로부터 ‘아시아 침략론’으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논설로 인용된다. 후쿠자와에 관해서뿐 아니라 ‘탈아’라는 말은 일본 아시아 침략의 대명사로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후쿠자와에 관한한 그의 대외론은 그가 조선 개조론을 주창한 때가 「탈아론」 이후보다도 훨씬 침략적이었다. 1882년 7월의 임오군란을 후쿠자와는 조선 국내에서 친일파가 일본의 무력에 의해 정권을 잡을 호기라 생각했다. 1884년 12월의 갑신정변은 임오군란과는 역순으로 후쿠자와의 이러한 주장을 실현하고자 해 실패한 쿠데타였다. 임오군란에서 후쿠자와는 조선 국내에서의 자연 발생적인 반일 폭동을 친일파 정권의 탄생에 이용하고자 한 것에 반해, 갑신정변은 후쿠자와가 육성해 온 조선 국내의 친일파 세력의 쿠데타로 발발해 실패했다는 의미에서 양자의 순서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후쿠자와는 조선에서 무력을 행사하고 이를 배경으로 친일파 정권을 수립하고자 끊임없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탈아론」이후보다 훨씬 침략적이었다.– [p66]

1895년부터 1897년의 구가 가쓰난의 ‘북수남진론’(러일협조론)이 1898년을 계기로 ‘지나 보전론’으로 바뀐 것을 구미협조주의에서 아시아주의로의 사상적 전환이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뀐 것은 대외관이 아니라 대외론에 불과하다. 즉 러시아의 뤼순·다롄 조차로 인해 종래 조선을 둘러싼 러일협상론이 유지될 수 없게된 것에 불과하다. 반대로 고노에나 동아동문회의 남청 지방 교육 · 문화활동은 확실히 아시아주의적 대외관에 기반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이는 동아동문회의 대외론이 아시아주의였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청국에서의 문화 · 교육활동에 종사하는 한편으로 도미즈 히론도의 조선을 취하고 만주를 취한다는 의론에 박수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p134]

이같이 야마가타가 일본을 서양 열강의 일원으로 자각하고 그 관점에서 중국을 대할 것인가 역으로 일본을 동아시아의 일원으로 위치지어 서양 열강에 대항하는 동문동종인 중일 양국의 친선을 강조할 것인가는 오로지 중국의 권익 탈환 요구의 강약 혹은 중일간 역관계力關係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야마가타의 외교 사상이 상황주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외관계에 관한 ‘사상’이 상황주의적이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나 중국이 어떠한 정책 전환을 하든 미동도 하지 않는 외교사상이라는 것이 존재할지도 모르나 그같은 ‘사상’은 분석하기 전부터 답을 알 수 있기에 적어도 분석 대상으로서는 흥미가 일지 않는다. 내가 여기에서 야마가타에 관해서도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야마가타의 상황주의가 아닌 상황주의의 구조다. 일본인이 ‘탈아론’형 대외론을 전개하거나 ‘아시아주의’적 대외론을 주창한다거나 할 때에는 각각 특정 상황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나의 가설에 대한 하나의 예증으로 야마가타 아리토모 대외론 의 변천은 충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p134]

6 저자 / 역자 소개[ | ]

지은이 반노 준지(坂野潤治). 일본의 역사학자. 전문은 일본근대정치사. 1937년생으로 도쿄대학을 졸업하고 지바대 ·오차노미즈여대 ·도쿄대 교수를 역임했다. 2020년 83세로 타계했다. 주요 저작으로『메이지 헌법체제의 확립』(1971),『다이쇼 정변』(1982), 『근대 일본의 외교와 정치』(1985),『근대 일본의 국가구상』(1996, 요시노 사쿠조상),『일본 헌정사』(2008, 가도카와 겐요시상) 등이 있다. .

옮긴이 조국. 서울대 동양사학과와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했고, 성신여대 사학과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개항장 외국인의 존재를 축으로 삼아 일본의 대외관계사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근대 조약과 동아시아 영토침탈 관련 자료 선집 1』 편역 작업에 참여했다.

[출판사 / 총서 소개]

에도 말기와 메이지유신 전환기를 주로 공부하는 박훈 교수는 도쿠가와 시대를 다룬 연구서가 매우 적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주변의 연구자들을 모으고 때를 기다리다가 플라톤 아카데미와 함께 연구서를 출간할 기회를 마련했다. 한일관계가 나빠질수록 서로를 알아야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간 외면되었던 일본 근세와 근대의 주요 연구를 소개하고자 한다. 빈서재 출판사는 이에 호응하여 연구총서를 준비했다.

7 띠지의 추천서 목록[ | ]

근대 일본 외교 고전/사료 소개
  • 건건록 (무쓰 무네미쓰 / 논형)
  • 구한말 러시아 외교관의 눈으로 본 청일 전쟁 (제노네 볼피첼리 / 살림)
  • 러일전쟁 (니콜라이 레비츠키 / 살림)
  • 러일 전쟁 당시 조선에 대한 보고서 (앵거스 해밀튼 / 살림)
  • 러일전쟁 - 러시아 군사령관 회고록 (알랙쎄이 쿠로파트킨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 근대 조약과 동아시아 영토침탈 관련 자료 선집 (동북아역사재단)
  •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 (다보하시 기요시 / 일조각)
  • 국역 청계중일한관계사료 (동북아역사재단)
  • 근대동아시아 외교문서 해제 (도서출판선인)
  • 하야시 다다스 비밀 회고록:1900~1910년 일본 외교의 내막 (하야시 다다스 / 건국대학교출판부)
근대 일본 대외관계 연구서 소개
  • 일본외교의 과오 (오구라 가즈오 / 제이앤씨)
  • 후쿠자와 유키치의 조선정략론 연구 (다카시로 코이치 / 선인)
  • 조약으로 본 일본근대사 1: 청일전쟁으로 가는 길 (김남은 / 트리펍)
  • 청일전쟁과 근대 동아시아의 세력전이 (동북아역사재단)
  •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가토 요코 / 서해문집)
  • 건건록의 세계 (나카쓰카 아키라 / 논형)
  • 청일·러일전쟁 (하라다 게이이치 / 어문학사)
  • 러일전쟁 (와다 하루키 / 한길사)
  • 러일전쟁사 (로스뚜노프 외 전사연구소 / 건국대학교출판부)
  • 한국 근현대정치와 일본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편 / 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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