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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31일 (토) 21:49 판

1 # 꽤 잘된 고야의 바이오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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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goya/ 프란시스 고야/스페인 거장</title> <meta http-equiv="Content-Type" content="text/html; charset=euc-kr"> <meta name="keywords" content="고야/ 미술"> <meta name="keywords" content="고야/goya"> <meta name="description" content="고야/goya/ 프란시스 고야/스페인 거장"> </h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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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co Jos de Goya y Lucientes (1746.3.30~1828.4.16) <object classid="clsid:D27CDB6E-AE6D-11cf-96B8-444553540000" codebase="http://download.macromedia.com/pub/shockwave/cabs/flash/swflash.cab#version=4,0,2,0" width="44" height="14"> <param name=movie value="../text1.swf"> <param name=quality value=high> <param name="BGCOLOR" value=""> <param name="SCALE" value="exactfit"> <param name="wmode" value="transparent"> <embed src="../text1.swf" quality="high" pluginspage="http://www.macromedia.com/shockwave/download/index.cgi?P1_Prod_Version=ShockwaveFlash"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SCALE="exactfit" width="44" height="14" BGCOLOR wmode="transparent"> </embed> </object> 고야 에스파니아의  사라고사주(州) 펜테토도스 1746년 출생. 아버지 호세 고야는 사라고사에서 활동하는 14명의 금세공사가운데 인근에서 꽤 솜씨를 인정받는 장인이었다. 교회 제단화를 장식할 그림틀이나 금속대, 의자, 책상다리, 가구 따위에 금칠을 입히는 일에 전문이었다.  14살 때부터 후기바로크 화가 H.루산에게 사사하였으며, 1769∼71년 이탈리아에 유학하였다.   루산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훗날 사라고사에서 최초로 정식 미술아카데미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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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63년 아카데미의 입학시험에서 낙방하여다. 심사위원전원일치로 꼴지
판정을 받았고 3년 뒤에 다시 응시하였으나 또 실패했다. 1766년경 마드리드의 F.바이에우(l734∼95) 문하에 들어갔고, 1773년 7월25일 호세파와 결혼했다. 처남이 된 바예우를 장차 마드리드 궁전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1795년에는 마드리드의 상 페르난도 미술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98년 궁정 수석화가가 되었다.

     독일출신의 화가 맹그스와 이탈리아출신화가 티에폴로를 만났다. 그는 티에폴로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작풍은 대체로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 뒤 사라고사에서 프레스코화가로서 활약하였으며, 결혼한 후에 마드리드로
가서 F.멩스의 도움으로 왕실용 태피스트리의 원화(原畵) 제작에 종사하였다. 46살 때 귀머거리가 되는 역경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회원, 궁정화가, 카롤루스 4세의 수석 궁정화가 등을 지내다가 만년에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유화·벽화·판화·미니어처·데생
등 다채로운 기법을 구사하여 초상화·풍속화·종교화·전쟁화·우의화(寓意畵)·환상화 등 광범위한 장르를 통해 18∼19세기의 에스파냐를 묘사하였다. 그 후 융그스와 티에폴로로부터 다채로운 색채기법을 배웠고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보시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차츰 독자적인 양식을 형성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인물을 그렸는데, 초상화에서 인물화로 전환하였다.

     1800년 《카를로스 4세의 가족:The Family of Charles
Ⅳ》에서는 당시 궁정 사회의 인습과 무기력, 허명(虛名)과 퇴폐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표현주의를 예고하는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교회의 천장벽화, 유명한 《옷을 입은 마하:Maja vestida/The Clothed Maja》 《옷을 벗은 마하:Maja desnuda/The Naked Maja》(1800∼05)에서도 에스파냐의 전통적 여성이 잠자는 비너스라는 고전적 주제에서 벗어나 강한 리얼리티로 표현되어 있다. 위험하고 관능적인 여성 표현 등 고야의 인간관은 차차 악마적 분위기에 싸인 것처럼 보인다.

 

고야는 야심가였으며 최고의 화가가 되려고 하였고 최고의 화가가 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하였다. 자신의 출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만한 사람이라면 무슨수를 써서라도 인연을 맺어두었다. 마침내 귀부인들과 거리낌없이 사귈 수 있었고 , 궁정도 어렵지 않게 들어다녔다.그의 명성을 듣고 교호와 궁정을 장식하려는 벽걸이 양타자들을 도안하는 일도 밀려들었다. 이러한 경향에서 일대 전환한 동기는 청각을 잃을 정도의 중병을 앓은 체험과 나폴레옹군의 에스파냐 침입으로 일어난 민족의식이었다. 나폴레옹 군대가 1808년 스페인을 점령했을 때 , 고야와 많은 스페인 국민들은 자기들이 열망하고 이는 자유혁명을 정복자가 가져다주길 희망하였다. 나폴레옹 군대의 야만적인 행동은 희망을 없앴고, 많은 민중의 저항을 초래했다. 이 때의 그림이  후일 인상파의 마네에게 영향을 준 《1808년 5월 3일:The 3rd of May 1808:The Execution of the Defenders of Madrid》(1809)과 연작판화 《전쟁의 참화:Los desastres de la guerra》(10∼14)이다. 특히 후자에는 82장의 흑백 에칭에 살육·광기·허무·폭행이 철저히 재현되었다. 1000여 장에 이르는 일기풍의 데생을 시작한 것은 발병 직후부터이며 이것은 통렬한 사회비판 판화집 《로스 카프리초스(변덕쟁이)》로 완성되고 이후의 판화시리즈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판화 카로, 피라네지 등에도 열중하였다. 그러나 다른 대표적 연작판화인 《로스 카프리초스(변덕):Los caprichos》(1796∼98, 80장)와 《디스파라테스(부조리)》(l8l5∼50, 15장)를 보면 고야의 작품 특유의 암담한 느낌이 에스파냐의 독특한 니힐리즘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에 대한 냉소적 태도도 포함되어 있으며, 왕실과 귀족, 권력자들의
모습 이면에 드리워져 있는 권력에 대한 조소와 저항의식도 내포되어 있다. 반면 <전쟁의 재앙>은 전쟁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보다 실제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전쟁의 잔학한 행위를 고발하고 있다. 이 연작은 잔혹함·공포감·비탄·살인이라는 전쟁의 요소들을 통하여 국가와 정치, 그리고 전쟁이라는 문제에 대한 고야의 개인적인 관점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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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우술> 시리즈는 투우라는 극적인 행사를 통하여 인간의
극단적인 감성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판화연작은 <까쁘리초스>와 <전쟁의 재앙>보다 더욱 복합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화면 속의 이미지는 투우라는 격정의 순간이 고통과 죽음이 감도는 극한적인 상황으로 바뀌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비극적인 운명의 투우사와 격렬하게 저항하는 소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관중의 모습은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거리감도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또한 명암의 대조와 공간표현이 모호하여 고야만의 독특한 시각적인 구성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고야는 이러한 판화연작을 통하여 미술가가 가지고 있는 창조성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동판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그는 판화도구를 능숙하게 사용하였고, 아쿼틴트·에칭·드라이포인트 및 다른 판화기술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회화에서 볼 수 있는 깊이감·명암효과, 그리고 뚜렷한 선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기술적인 성과와는 별개로 고야가 판화 역사에 끼친 가장 중요한 점은 근대미술에 있어 판화의 발전가능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동판화를 그의 내적 세계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에 대한 우려와 의심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그는 각각의 판화연작에서 장면마다 제목을 정하고 나름대로의 순서를 정하여 장면들을 연결하였다. 또한 각 장면마다 해설문을 곁들여 문학적인 요소를 도입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고야는 자신이 주장하고 있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판화는 유화나 조각과 마찬가지로 사상과 관념이 담긴 철학적·이성적·문화적인 활동의 표현으로서 인식되게 되었던 것이다.

     고야는 변화하는 세계에서 영원불변한 진실은 오로지 미술가의 상상력에
의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전제왕권이 막을 내리는 시점에서 사회·정치·문화 등 각 분야에서 일어나는 구조의 변화, 기존에 통용되던 가치체계의 몰락, 그리고 거기에서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의 위기의식을 표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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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그러한 니힐리즘 시각화를
시도하여 자신의 별장인 ‘귀머거리의 집(Quinta del Sordo)’의 벽면을 수수께끼 같은 《검은 그림들:Pinturas negras》(1820~23) 등의 작품으로 장식하였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고야 만년의 ‘검은 그림’으로 불리는 계열이다. 장르는 정물·종교·풍속·풍경 등 다양하며 환상성이 짙다. 《자화상》 《십자가의 그리스도》 2개의 ‘마하’를 비롯한 고야의 대부분의 대표작(유화 114점, 데생 470점)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의 유해는 그가 그린 《산 안토니오 데 파투아의 기적》(l798)로 유명한 마드리드의 산 안토니오 데 라 플로리다에 안치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반(反)인습적·비합리적인 표현으로 근대회화는 물론 현대회화에서도 선구적이라 할 수 있다.고야는 평생을 통해서 20여 점의 자화상을 남기고 있는데 이 작품은 아마도 그의 나이 72세경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간의 내적 심리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는데 능숙한 그의 재능이 자신의 자화상에서도 피로와 생활의 고통을 회화화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렘브란트에서나 볼 수 있는 빛에 대한 예민한 관심이 잘 나타나고 있는 작품이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그 구성에 있어서 깊은 정신적 생활의 표현을 목적으로
제작되고 인간의 혼(魂)의 미를 추구하고 육감적인 모든 면을 거부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그의 자화상은 인물의 정신생활에 있어서의 보편적인 성격에 그 초점이 맞추어 진다. 이에 비해서 고야의 경우에는 회화에 있어서 초월적인 모든 것을 거부한다. 그는 충실한 카톨릭 신자이긴 하지만 신 앞에 선 보편적인 인간을 추구함이 아니라 특수한 상황에서 고민하는 생생한 인간적 본질을 요구하는 것이다.

     프란시스코 드 고야(1746∼1828)는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예술관
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뛰어난 기법으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이룩하였다. 그는 후기로코코시대부터 낭만주의에 이르는 역사의 전환기를 살았으며 많은 작품을 제작하여 오늘날 700점의 회화, 900점의 드로잉, 300여 점의 판화작품을 남겼다. 악마적이라 할만큼 투철한 리얼리즘으로 세태를 풍자했으며 , 만년에는 석판화도 시도하였다. 들라크로와는 '가장 이상적인 양식이란 미켈란젤로의 예술과 고야의 예술의 결합일 것'이라고 말했다. 

 

고야의 생애

1746년 : 프란시스코 고야가 3월30일 사라사고에서 멀지않은 푸엔테토도스에서 출생하다. 1763년: 호세루산에게서 잠시 화가수업을 거친다음 미술아카데미에 응시하기 위해 마드리드로 떠난다. 1770년: 마드리드에서 입학시험에 낙방하자 새로운 운명을 찾아서 이탈리아로 여행하다. 1771년: 이탈리아 파르마에서 아카데미에 입상하자 곧 스페인으로 귀환하다. 1775년: 마드리드 산타바바라에 소재한 왕립 벽걸이 양탄자 공장에서 처음으로 자수 데생을 완성한다. 1781년: 사라고사에서 교회천정 벽화를 그리다가 궁정회가 바예우와 다투다. 그 후 아카데미가 규정한 방식대로 작업을 진행해야하는 수모를 겪는다. 1786년: 왕족의 주문을 받아서 파르도의 사계절 연작에 착수한다. 1789년: 국왕 카를로스 4세의 궁정화가로 위촉된다. 1792년: 중병을 앓은다음 귀머거리가 되다. 인생의 전기를 맞은 고야는 이후부터 밝고 따뜻한 그림대산 섬뜩하고 공포스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1798년: 마드리드에 소재한 작은 교회 산 안토니오 델라 플로리다의 벽화를 완성하다. 1799년 고야의 판화집<변덕>이 출간되다. 처음에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던 판화집이 고야에게 불후의 명성을 선사한다. 같은해 고야는 스페인에서 화가가 도달할수이는 최고의 영예인 수석궁정화가의 지위에 오른다. 1800년: 카를로스4세의 왕실 단체 초상화를 완성하다. 이초상화는 왕가의 초상을 가식없이 재현한 대담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1810년: 전쟁의 광기를 주제로 한<전쟁의 참화>작업에 착수하다. 생전에 출간할 용기를 내지 못했으나 고야 사후에 빛을 본다. 1814-1815년: 이단 제판소에 회부된 고야는 <옷벗은 마하>와 <옷입은 마하>의 제작경위에 대한 진술을 남긴다. 1819년; 마드리드를 등진 고야는 만사나레스 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을 구입한다. 그곳에서 <검은그림>을 벽화로 남긴다. 1824년 정치적 탄압을 피해서 프랑스의 보르도로 피신한다. 1828년 : 4월16일 망명지에서 고야 사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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