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풍설서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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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속 한구절 ==
== 책속 한구절 ==
{{인용문|에도시대의 일본은 완전히 나라를 걸어 잠그고 있던 것이 아니다. 나가사키는 쇄국 일본의 유일한 창이 아니며 네덜란드 풍설서도 또한 막부의 유일한 해외정보원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로 ‘쇄국’에는 따옴표를 붙였다.) 1960년대 이전 “에도시대 일본은 나라를 걸어 잠궜다” 라는 설이 지배적이었던 때에 바깥 세계로 상정되었던 것은 유럽과 아메리카 뿐이었다. 그 동아시아에 역점을 둔 대외관계 연구가 크게 진전되었다. 그 결과 에도시대의 일본은 ‘쓰시마對馬 창구’로 조선과, ‘사쓰마薩摩 창구’로 ‘류큐琉球’와, ‘마쓰마에松前 창구’로 아이누와, ‘나가사키 창구’로 네덜란드인이나 당인唐人 (중국인이 주체지만 동남아시아 사람들도 포함)과 연결되어 있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재 정설이 되었다. 이들 ‘창구’를 합해서 ‘네 개의 창구’라고 부른다. 시기에 따라서 변모하기는 하지만 이 ‘네 개의 창구’는 잘 생각해보면 일본이 국교를 맺지 않은 중국에 간접적으로 이어지기 위한 경로였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생사·견직물 등을 안정적으로 입수하고, 한문책이나 그림 등을 통해 배우고 싶다는 욕구는 일본 국내에서 대단히 강했던 것이다. |[p29]}}
{{인용문|일본 문화를 구성하는 많은 요소가 외래문화, 특히 중국에서 전래된 것임은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적’ 문화의 대표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실은 전래된 당초에는 ‘이국적’이었기 때문에 지식인들에게 환영받았다가, 근세에 들어선 그것이 ‘일본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할 만한 것이 있다. 첫손가락에 꼽을 만한 것이 바로 선()이다. |[p40]}}


{{인용문|1645년 2월 에도 상경 중이던 상관장 피터르 안토니스 오버르트바터르는 이노우에 마사시게로부터 갖가지 질문을 받았다. 이노우에는 기리시탄 단속을 담당하는 슈몬아라타메야쿠라는 직무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관
{{인용문|1645년 2월 에도 상경 중이던 상관장 피터르 안토니스 오버르트바터르는 이노우에 마사시게로부터 갖가지 질문을 받았다. 이노우에는 기리시탄 단속을 담당하는 슈몬아라타메야쿠라는 직무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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