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da

1 #[ | ]

Les Bicyclettes De Belsize Ma Che Frecddo Fa Che Male Fa La Gelosia Pa Diglielo a ma Bugia Il Cuore e' Uno Zingaro La Porti Una Bacione a Firenze Re di denai Piano Piano Dolce Dolce Una chitarra e un armonica Brivido d'amore La Fisarmonica Di Stradella

NADA - Il Meglio Di Nada 1970년대의 이태리 음악계에는 활화산처럼 타올랐던 다수의 아트록 & 프로그레시브록 계열의 그룹 들과 작사, 작곡 노래까지 완벽히 소화해내었던 실력있는 깐따또레 뮤지션들외에 예쁜 용모와 훌륭한 가창력을 겸비한 여성 가수들이 다른 많은 뮤지션들과 더불어 왕성한 활동과 조화를 보여주면서 70년 대 이태리 음악계를 수놓았다. 이미 라이센스로 발매된 Caterina Caselli, Mia Martini, Patty Pravo 등에 이어 이태리를 대표하는 또 한사람의 여성가수 Nada의 앨범을 소개하면서 앞으로도 다른 많은 깐따또레와 깐쪼네계열의 앨범들이 소개될 예정임을 알려드린다.

Nada와 그녀의 성공작 "Il Meglio Di Nada" 본명은 Nada Malanima로 1953년 11월 17일 리보르노의 갑브로지방에서 태어났다. 가수로서 그녀의 보컬능력을 인식하고 데뷔시킨 인물은 RCA 레이블의 신인 발굴기인 Franco Migliacci의 직관력이었 다. 당시 Nada는 어린 새침떼기 소녀의 이미지로 호소력 있는 목소리와 비교해서 미숙하지만 듣는 이 들에게 섬세하면서도 묘한 매력을 느끼게 했다.

1968년 가을에 Nada는 이태리의 대표적인 비트그룹 Rokes와 Shel의 도움을 받아 유럽에서는 인도 출신의 가수인 Engelbert Humperdink에 의해 발표된 바 있는 (Les Bicyclettes De Belsize)를 첫 데 뷔싱글로 공개한다. 다음해인 1969년에는 산레모 가요제에 Claudio Mattone, Migliacci가 함께 만든 (Ma Che Frecddo Fa)로 Rokes와 함께 출전한다. 비록 가요제에서 입상하지 못했지만 당시 많은 인 기를 얻었던 Mina의 곡을 제치고 음반 판매순위에서 정상을 차지한다. 이에 힘입어 소속 레코드 회사 인 RCA는 유럽 각국에서도 음반을 발매하였으며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

그후 그녀는 이태리의 많은 가요제에 참가하게 되는데 베네치아의 Mostra Internazionale Di Musica Leggera에서는 (Che Male Fa La Gelosia)를 불렀으며, 69∼70 di canzonissima에서는 Migliacci의 곡인 (L'anello)라는 새로운 곡으로 예선에서 만점으로 통과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RCA에서는 Nada의 초창기 싱글들을 포함한 첫 앨범이 발표된다.

그 다음해에 Nada는 다시 Jimmy Fontana의 곡인 (Pa Diglielo a ma)로 Rosalino Cellamare라는 세례명으로 1970년 산레모 가요제에 참가한다. 70년 Cantagiro에서 (Bugia)를, Canzonissima에서는 Elvis Presiey의 (I've Lost You)의 이태리어 번안곡인 (Io I'ho Fatto Per Amore)를 부른다.
바로 이 곡은 그녀의 두 번째 앨범의 타이틀이 되었으며 수록곡중에서 Nada는 특별히 같은 이태리인인 Odoardo Spadaro에게 바치는 곡 (La Porti Una Bacione a Firenze)를 불러주고 있다.

1971년에 Nada는 (Il Cuore e' Uno Zingaro)를 Nicola di Bari와 함께 산레모 가요제에서 우승 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우승자들이 곡을 다시 부를 때 그녀가 흘리던 마스카라에 얼룩진 눈물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게 되었다. 그후에도 (Tic Toc)으로 Mostra Internazionale에 참가하며 다음 72 년 산레모 가요제에서는 (c)를 불러 3위에 입상한다.

Disco per l'estate 72에서도 (Una chitarra e un armonica)로 좋은 결과를 얻는다. 1973년에 싱글 (Brivido d'amore)가 공개되는데 B면의 (Ancora up po d'amore)는 그녀에게 있어서는 진정한 음 악적인 변화로 Mauro Lusini외에도 Reale Accademia di Musica의 Adriano Monteduro, 그리고 무엇 보다도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준 Camaleonti 출신의 Gerry Manzoli에 의한 것이었다.

그녀의 1973년 앨범 (Ho Scoperto Che esisto anch'io)는 전환기의 음반이다. 이 앨범은 Piero Ciampi와 Gianni Marchetti가 제작을 맡아주었고 Nada는 섬세하면서도 현저한 변화로 강렬하면서도 성숙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1975년에 컨셉트앨범 (Nada 1930 : Il domatore delle scimmie)를 발 표했고 Hennk Topel의 편곡, 제작아래 Reale Accademia di musica와 공동 제작한 것이다. 이 앨범은 기존에 Nada의 음악을 감상했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많은 비평을 들었다. 1987년이 Nada에게는 다 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데 Fonit Cetra 와 함께 (Bolero)를 발표하면서 산레모 가요제에 다시 한 번 참가하지만 좋은 결과는 얻지 못한다. 그때부터 그녀는 대중들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가장 최 근에는 Piero Ciampi의 "Sul Porto di Livorno"를 다시 부르면서 그녀의 리싸이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그녀의 간단한 활동경력과 수록곡을 연대별로 정리하면서 그녀의 앨범을 감상하는 그녀의 매력적인 보컬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아울러 음악을 가까이 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이때 본작은 그 녀를 기억하는 많은 팬들에게 좋은 추억의 앨범이 될 것이다.

글/유연수

2 # 촌평[ | ]


문서 댓글 ({{ doc_comments.length }})
{{ comment.name }} {{ comment.created | sns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