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쓰카 라이초

1 개요[ | ]

Raicho Hiratsuka
平塚 らいてう
히라쓰카 라이초
  • 일본의 사상가, 평론가, 작가, 여성주의자이며 쇼와 시대의 여성 운동 지도자

1886년에 도쿄시 고지마치구에서 아버지 사다지로, 어머니 쓰야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도쿄여자사범 부속고등여학교 졸업 후, 일본여자대학교 가정과에 입학하여 철학과 종교에 심취하였다. 졸업 후에는 영어와 한학을 익혔다. 그 이후 세이비 여자 영어학교에 근무하게 되는데, 동교 교사 모리타 소헤이와의 시오바라 사건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다. 동반 자살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히라쓰카에게 쏠린 세간의 비난으로 히라쓰카는 현 여성의 지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시대적 상황 속에서 형편없는 여성의 지위가 바로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사건 이후 언론의 태도나 남성 지식인들이 그녀에게 보인 반응에 하라쓰카는 여성의 지위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관념적 세계에서만 머물던 히라쓰카를 현실 세계로 나오게 한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녀는 이전의 철학적, 사념적 태도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사회 운동가로 변신하게 된다.

그 첫걸음이 「세이토(青鞜)」의 창간이었다. 문학적 스승이던 이쿠다 조코의 조언으로 평생의 후원자였던 어머니가 모아놓은 결혼자금을 먼저 받아내 세이토사를 차리고 여성들만의 손으로 만든 여성들만의 잡지 『세이토』를 창간했다. 잡지명은, 18세기 영국 몬테규 부인의 살롱에서 열린 여성 참정권 운동모임인 ‘블루 스타킹 소사이어티(bluestocking Society)’에서 따온 것이다. (이것은 당시 이 모임에 드나들던 여성들이 푸른 모직 스타킹을 신은 데서 유래했다.) 바로 이때 히라쓰카는 자신의 본래 이름 ‘하루(明)’ 대신에 ‘라이초(雷鳥, 뇌조)’란 필명을 지었다. 고산시대에서 인간과 접하지 않고 고고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뇌조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다.

발간사의 시작인 ‘원래, 여성은 실로 태양이었다…’이 말은 그 이후로 일본 페미니즘의 상징이 되었다.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 빛나듯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타율적인 존재로 전락하고만 여성들이 다시 원시의 자립과 자유를 되찾아 태양이 되자는 것이 라이초와 그 동료들의 주장이었다. 1911년에 히라쓰카와 함께 『세이토』를 만든 여성들은 이후 그야말로 일본여성해방운동을 이끌어간 주역들이 되었다. 그들의 활동은 일본에만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미쳐 한국에서는 나혜석, 김일엽 등의 여성운동가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세이토』는 판매 부수는 많지 않았지만, 그 사상의 파급력은 매우 컸다. 여성들이 남성의 손을 빌리지 않고 여성들만으로 스스로를 대변하는 잡지를 만들어 내고 그 속에서 여성의 독립과 자유를 주장하게 된 것은 일본 역사상 전무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성잡지 『세이토』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관습과 사상을 타파하고 여성이 스스로의 자아를 되찾아야 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그러기 위해 변화되어야 할 많은 것들을 다루었다. 특히 여성의 성 문제와 이와 관련한 사회적 문제들을 과감히 다루어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하였다.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순결의식을 비판하고 자유로운 성의 결정권을 주장하였으며 모성보호와 낙태논쟁 등을 과감히 다룸으로써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세이토』를 발간한 여성들은 너무 시대를 앞선 사상들로 인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당시 제국주의로 나아가고 있던 일본의 국책인 현모양처 양성에 위배되는 내용을 실었다는 이유로 『세이토』는 무수한 핍박을 받았다. 특히 주간 히라쓰카에게는 ‘죽이겠다’는 협박장이 오고 그녀의 집안으로 돌이 날아왔다. 그러나 히라쓰카는 세간의 비판에 의연했다.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위해서는 그런 고난과 비난쯤은 감수할 수 있었다. 히라쓰카는 스스로를 ‘새로운 여성’으로 선언하며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혔다.

2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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