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산어보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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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8989722179

1 # 길에서 읽은 책 (1) - 이태원, <현산어보를 찾아서> 청어람미디어, 2003[ | ]

1/ 바다에 관한 모든 것에 마음이 끌린다. 바다로만 여행을 간다. 여러 전생에 한 번쯤은 뱃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으되, 언제나 항구의 풍경이 설레고 고기 썩는 비린내도 정겹다. 뭍에서 갑판에 오를 때 내딛는 발이 늘 아찔하게 좋다.

항구도시에서 태어나 자랐다. 하지만 거기도 대도시인지라, 20-30분은 차를 타고 가야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때로는 교통체증을 견디면서. 그리고 서울로 와서 어른이 되었다. 서울에서 산 시간은 이제 고향에서 산 시간과 비슷해졌다. 길이로는 속까지 ‘다마네기 서울네기’가 되어도 좋을만한 시간이다. 서울이 얼마나 편하고 중요한지 잘 이해하게 되었지만, 서울을 마음 속까지 다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앞으로 서울에서 얼마나 더 살지, 그리고 내가 어떤 인간으로 늙어갈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삶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통영이나 영덕, 서귀포 같이 적당히 작은 항구 도시 인근에서 중년 혹은 노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워낙 코딱지 만한 탓인지, 한국의 도시 풍경은 어디나 비슷하다. 특히 ‘자본’의 힘이 그 비슷함을 어쩔 수 없는, 절망적인 똑같음으로 결정짓는다. 팔도 어디에도 삼성전자, KTF, SK텔레콤, 현대자동차, KB은행(때로는 심지어 맥도날드나 KFC까지)의 지점ㆍ대리점들이 다 있다. 그들은 똑같은 로고와 간판으로 지역의 풍경을 지배한다. 똑같은 차들이 굴러다니고 똑같은 패션으로 꾸민 여자들이 있다. 여관에 들어 TV를 켜면 똑같은 드라마와 뉴스가 나온다. 어떤 서울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봐야 시골 여관에서도 안심하고 잠이 든다. 한국의 모든 도시는 서울의 아류이거나 식민지인 것이다.

그러나 항구는 좀 다르다. 서울에는 절대로 없는 것이 거기 좀 있다. 배 엔진 수리점, 어구상, 선원 송출 사무실, 위판장, 그리고 얼굴이 까맣고 머리가 탈색되고 온몸의 근육이 날선 것 같은 선원들. 그들은 좀 다르다. 항구에는 저마다의 풍경이 아직 남아있다. 그 풍경만이 서울의 지배권을 거스르며, 아류가 아닌 채 버틴다. 바다의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바다만이 미처 다 정복되지 않고 남아서 삶의 풍경을 다르게 할 수 있다.

천년이 넘게, 한반도의 삶에서 주류이자 중심인 것은 농경민의 것이었다. 그러다 20세기가 지나서 그 중심은 ‘서울’스러운 것으로 바뀌었다. 바다는 늘 주변이거나 낯선 삶의 영역이었다. <현산어보를 찾아서>는 바다가 만든, 바다에 대한 관심을 온전하게 일깨워주는 책이다. 거기 엄청나게 넓고도 큰, 무한대의 상상력과 무한대의 삶이 가능한 바다가 있다.

2/ 이번 바닷가 여행길에는 <현산어보를 찾아서>와 동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행길이었던 데다가 행선지가 흑산도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가장 완벽한 흑산도 여행 안내서이다. 흑산도의 역사와 삶과 자연에 대한 모든 것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을 흑산도 여행 안내서로 말한다는 것은 매우 큰 실례겠다. 여행자가 여정 내내 아무리 열심히 보고 듣고 생각한다 해도, 전체 5권 중 단 한권만 들고 간다 해도, 이 책은 넘치기 때문이다.

  이미자의 '흑산도아가씨' 노래비.. 그것은 사랑스러웠다. 거기서 내려다뵈는 풍경은 물론!

이미 책은 충분히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이미 이 책을 대강 훑었었고 대단한 책인 줄인지도 알았다. 하지만 목포에서 흑산도로 가는 배 안에서 책을 펼치니 또 달랐다. 책의 서술은 생생하고도 풍부하였다.

나는 저자를 흉내내며 흑산도 앞 바다의 청록색 물 속을 들여다보고, 방파제에 붙은 해초를 뜯는 숭어 한 마리를 구경했고, 지나가는 동네 초등학생에게 해초와 고기 이름을 묻기도 했다. 그 어설픈 흉내내기는 전혀 부끄럽지 않았고 즐거웠다. 나는 돌아오는 기찻간에서 다시 책을 펴고는, 횟집 고무 ‘다라’에서 혹은 바닷가 돌틈과 물에서 보았던 몇 가지 ‘자연산’ 물고기들과 해초들의 모양을 책에 실려있는 그림 색인과 대조하고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현산어보를 찾아서> 전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넘겨보았다.

당신은 ‘책’에서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이 다섯 권의 책 안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있다. 책은 아마도 이제껏 한국 출판계가 만들어낸 가장 완벽한 ‘퓨전’ 기획물이다. 책은 치밀한 자연과학서이며, 정확한 역사 지리지이며, 아름다운 도록이자 기행기다. 저자는 노장부터 정약용 사상, 의 상상 동물부터 흑산도 홍어에 이르는, 그야말로 말뜻 그대로의 박물(博物)을 보여준다. 1,200여컷의 세밀화와 사진도 거기 있다. <현산어보를 찾아서> 마지막 권에 실린 전체 색인을 보면 숨이 막힐 듯하다. 이 책은 일렬로 죽 꽂아놓고 백과사전 대용으로 써도 된다. 때로 백과사전보다 더 유용하고 적실하게, 한국인의 삶에서 부딪힐 문제를 ‘콕 찝어서’ 해결해보여준다. 이 책을 읽고 까나리와 멸치, 한치와 오징어의 관계 같은, 내게는 오래된 난제를 말끔히 풀 수 있었다.

정약전의 가 가진 힘이 <현산어보를 찾아서>의 훌륭함을 가능하게 한 가장 큰 원천이었을 것이다. 자연과학서로서 는 조선의 문화가 가진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조선의 선비가 누린 문화와 그 형식이란 정착 자작농ㆍ소작농의 삶-경제를 착취하여 그 위에 얹힌 것인데, 는 그 구도에서 한참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정약전은 어민들과 바다의 삶에 직접 참여ㆍ관찰하여 책을 이뤄냈다. 그가 만약 16년간의 귀양살이를 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가능했겠는가, 하는 ‘무식한’ 의문이 저절로 떠오르기도 한다.

한데 유배도 안 가고, 장가도 안 갔다는, 올해 서른 둘 먹은 중학교 생물 교사는 어떻게 이런 책을 썼을까? 살다가 박식한 사람도 많이 만나고, 숨은 고수도 가끔 만난다. 그들은 앎의 경계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거나 날아다니며, 경계를 받치고 있는 제도와 힘의 구조를 노출시켜준다. 나는 그 고수들의 힘이 어디서 연유했는지 관찰하기를 좋아한다. 더이상 그들로 인해 놀라고 감탄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하여 열등감이나 자괴심에 안 빠지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낮에는 아이들에게 ‘생물’을 가르치고 밤에는 고금동서의 온갖 인문ㆍ자연과학 문헌을 다 뒤지고, 시간이 나면 낚싯대를 메고 떠나 바다로 가는 그런 사람은 잘 파악이 안된다. 그래서 바다 앞에 그래야 하듯, 일단 한국 바다가 만든 이 젊은 고수 앞에 ‘납죽’ 수그려야 한다. 농담해보건대, 스스로의 말대로 저자는 ‘정상인이 아니’거나(4권 25쪽), 혹은 정약전의 환생이 아닐까? - 출판저널 200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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