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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론


평론론
평론에 관한 의견

간결한 평가[편집]

뭐 구구절절하게 쓴다는게 의미가 없다. 기억도 안나고. 정보는 사방에 널려있고. 작품은 많이 접하는 수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국가, 시대, 간단한 장르적 특징, 다른 밴드와의 관계 정도를 알려주고 나머지는 5점척도로 평가한다.

  1. ★★★★★ (위대한) : 사라, 두번 사라 : 이쯤되면 장르의 클래식이다.
  2. ★★★★ (대단한) : 사라 : 이정도면 누구에게나 권할만한 음악이다.
  3. ★★★ (훌륭한) : 난 산다 : 보통 평자들은 이정도면 별 5개를 막 날린다. 앨범이 머리속에 남기 시작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하자.
  4. ★★ (괜찮은) : 싸면 산다 : 괜찮지만 없어도 꼭 아쉽지는 않다.
  5. ★ (별로인) : 안산다 : 없는게 더 좋겠다.
  6. ☆ (침묵) : the rest is silence : 욕을 하고 싶지만 침묵으로 갈음한다.

--Pinkcrimson (토론) 2015년 1월 27일 (화) 02:25 (KST)

평론론 : 거북이[편집]

먼저 평론이라는 것이 생긴 것을 생각해보자. 아마도 그것은 농담따먹기였을 것이다. 함께 한 것에 대해 얘기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아마 인간이 말을 모를때부터 하지 않았을까? 지금도 각종 커뮤니티들의 본질은 농담따먹기다. 농담따먹기 하다가 함께했던 것들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평론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인간은 남녀 불문하고 떠드는 것을 좋아하는 동물이다. 떠들기 좋아하는 동물 사이에 예술이라는 것이 생겨났으니 당연히 그것에 대해 또 말들이 많았을 것이고 그런것들도 형식을 갖춰나가게 되어 평론이 되었을게다.

자 그럼 지금 평론의 역할은 무엇일까.

  1. 옥석가리기
  2. 맥락 다시 읽어내기
  3. 역사적 흐름 재구성하기

이정도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가장 큰 것은 옥석가리기일 것이고 나머지는 부차적인 것이다.

묻혀진 텍스트의 맥락을 다시 읽어내고 역사적 흐름을 재구성하는데는 자연스럽게 상당한 공부가 필요하고 논리적 전개가 필요하다. 이런 것은 학술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더 찾아낼 수가 없다. 이런 것들은 후에 각종 이야기들(=담론?)을 만들어내는데 뿌리가 되는 것들로 반드시 필요하긴 하지만 누구나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얼마든지 학술적으로 접근해도 좋고 밥먹고사는 사람들이 아성을 쌓아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옥석가리기만큼은 그래서는 곤란하다. 대중예술은 대중적인데 대중예술 평론이 비 대중적이다? 이건 코미디다. 요즘 길거리에서 파는 영화잡지들도 너무 어려운 글쓰기들을 하고 있는데 그것들보다는 차라리 딴지일보식의 글들이 더 의미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그 글들이 평자들 개인의 생각보다는 평론가 집단의 압력, 영화산업계의 압력이 들어있는 글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사실 실력있는 평자라면 맥락 다시 읽기나 역사적 흐름 재구성하기에서도 쉽게 써야한다.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대체로 글이 어려운 것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어설프게 인용한다거나 외국어를 우리말로 소화하지 못한 채 바보같이 사용한다거나해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글을 길게 써도 그런 일이 발생한다. 도덕경05장에 보면 다언삭궁多言數窮이라고 나온다.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진다는 말이다. 그리고 박정희시대 이후 '말많은 놈은 공산당'이란 말이 돌았다고 들었다. 이 말은 민중들이 비극적 상황 아래서 자연스럽게 만든 말이겠지만 다언삭궁과 통하는 바가 있다. 여튼 말이 많으면 주절주절 했던 말 또하고 보완하고, 그러다 앞에서 한 말과 꼬이고 뭐 그렇다. 요점은 항상 간단하다. 작은것이 아름답다(Simple is Beautiful)!

내가 무언가에 대해 글을 쓸 때는 남들이 그것을 가이드로 삼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을 감상했을때, 그리고 그가 나와같은 감정상태를 가지게 되었을 때, 그 순간을 위해 글을 쓰는거다. 영어의 sympathy라는 말도 우리말의 공감共感도 다 같은 뜻이다. 따라서 나는 이 목적에 충실하게 쓰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최 우선이다.

그리고 내가 알고있는 배경지식이 있다면 그것도 함께 적어주는데 이것은 그 작품을 더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그런 목적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적는데 있어서 주객전도가 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종종 내가 범하는 오류이기도 하고.

요즘 평론들은 평론을 위한 평론, 평론가들을 위한 평론이 많은 것 같다. 특히 공적인 경로를 가진 매체들은 너무 딱딱한 글들을 실어 재미있는 예술을 오히려 재미없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뭔가 본질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면 평론가의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1. 자신의 감성에 충실
  2. 외압에 저항
  3. 재미있게
  4. 개인적으로

저 위에 적은 평론의 역할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시겠지만 여기 적은 평론가의 태도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계실것이다. 여기 그 이유들을 적어본다.

일단 자신의 감성에 충실하라는 것과 개인적으로 쓰라는 것은 한가지 의미이다. 평론은 평자가 쓴다. 이게 무슨 당연한 말인가 하면 객관적으로 쓰려하지 말라는 말이다. 내가 쓰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통계처리하지 않는 한 결코 객관적으로 쓸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들은 자신의 의견이 마치 객관적인 양 쓰곤 한다. 하지만 평론은 그런게 아니다. 평자의 관점을 믿고 그 평자의 글을 읽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감성에 충실하게 쓰면 그것을 걸러서 읽는 것들은 독자들이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쓰면 된다. 독자는 바보가 아니다.

또 개인적으로 쓰라는 것은 개인적 체험과 엮어가며 쓰라는 말이다. 개인적 체험은 어떤 형태로든지 보편적 체험으로 승화될 수 있다. 괜히 자기도 모르는 말을 쓰기보다는 개인적인 것들과 엮어서 쓰면 자신의 감정이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도 있고 읽는 이도 그 안에 빨려들어가 노닐 수 있다. 거기서 노닐 것인가 말것인가는 독자가 정한다.

평론가들은 음반이나 영화를 제공받기 쉽다. 잡지사는 광고를 수주한다. 이런 요인들은 그들에게 예술에 대한 호평을 강요한다. 이런 것들에서는 단호하게 벗어나야 한다. 물론 직업 평론가들이 이런 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그것은 자존심 문제다. 정말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아니라고 말하기 힘들 경우에는 그것에 대한 평을 안쓰면 된다. 정말 아닌데 그것에 대해 괜찮다고 쓴다면 뭐하러 글을 쓰는 것인지.

마지막으로 할 말은 재미있게 써야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대중적으로 읽힐 것을 전제로 하고 쓴다면 재미있게 써서 사람들로 하여금 읽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요즘은 도덕경에서 설파하는 무위지위無爲之爲의 예술관이 필요한 시기같다. 사람들로 하여금 쓸데없는 파괴(=전쟁)나 무의미한 생산을 하지 않고 대신 그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창구가 되는 것이 앞으로 예술의 가장 중요한 임무일 것이라고 말한 이는 백남준이다. 나는 그의 관점이 너무나 탁월해서 놀랐다. 앞으로 예술은 무해한 에너지 발산처가 되어야 한다. 산업화가 진행될수록 더더욱. 예술도 이렇게 재미있게(재미있다라는 의미는 결코 단순하지 않지만) 되어야 하는 마당에 하물며 평론이야 더 말할 것이 없다. 평론은 재미있는 예술을 더더욱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자 평론과 평론가의 역할, 태도에 대해 조금 생각해보았다. 이 모든 것은 한가지로 통한다. 재미있는 예술. 거북이는 재미있는 예술을 즐기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

--2004년에 쓴 글이군.


자라가 생각하는 평론론.
거북이가 쓴 평론론도 다 맞는 얘기다. 그치만 자라는 평론에 대해 개인적인 생각을 써 볼까한다. 물론 자라의 생각이 맞다는 것은 아니다. 아랫글은 자라의 개인적인 평론에 대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어떤작품이 나온다면 그거에 대해 많은 얘기가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작품을 가지고 말을 하지만 그 사람의 말에 공감을 얻고 믿음이 생기면 그 사람의 평론을 선호하게 되는거고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좋다고 말한 평론이 공감을 못얻으면 그 사람의 평론은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물론 세월이 흐른 후 그사람을 재평가하는 경우가 종종있지만)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평론가를 찾게 되고 그 사람이 말하는 작품을 구하고 접하면서 만족을 하게된다. 옛날엔 작품의 수가 적어서 그거에 대해 특별한 평론이 없더라도 작품을 보고 그랬지만은 현재는 너무나도 많은 작품들이 매일매일 나오고 그중에서 어떤것을 볼까 고민하다보면 어쩔수없이 다른사람이 쓴 평론을 볼수밖에 없다. 이건 작품을 알기위한 자료의 하나일 뿐인데 이것이 이상하게 되어버린거다. 이러한 문화에 익숙하지 못했던 우리나라는 유명한 모평론가가 그말을 하면 그 거에 맞게끔 얘기를 해야 사람들한테 인정을 받는 정말 이상하게 되어버린거다. 우린 왜? "전 이 평론가에 대해 반감은 없습니다만 제생각은 이렇습니다" 라고 말을 못하는걸까? 예를 들면 사회나 회사에서 높은 사람이 얘기 하면 "무조건 맞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린건가? 물론 회사나 사회는 먹고살기위해서 어쩔수 없다 치더라도 왜 모든거에 대해 그렇게 해야하는가..

이영화에 대해 그렇게 얘기안하면 수준 낮다고 그래..

솔직히 다른사람의 평론을 찾는 목적은 아마도 자신이 모르는 작품을 보기위해 얻는 사전 지식,내가 이렇게 느낀것을 이사람은 어떻게 평론했을까? 하는 궁금증 이거 2개가 가장 클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단어를 쓰고 어렵게 쓰는 글로 쓰는 평론가들은 주목적이 자기과시인거 같다. '나..이런사람이야!' 하지만 이사람은 아마도 단순한 지식을 모르는 꼴통일거다. 사람들은 어렵고 긴글을 보면 보기가 싫다는거다. 쉽고 재밌는 글을 보는것을 좋아한다는거 말이다. 이부분에서는 자라는 거북이편이다.

그렇담 이제 마무리를 해보자.

  1. 평론을 사람들이 찾는 주된목적에 대해 아는대로 서술하시오.
  2. 일반사람들은 어떠한 형식으로된 평론을 읽기를 좋아하는가?
  3. 사람들은 왜 유명한 평론가가 한말을 똑같이 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속이려하는지에 대해 아는대로 서술하시오.

# 한국에서의 불구적 음악듣기 : 유지영[편집]

제 목:한국에서의 불구적 음악듣기 관련자료:없음 [2270] 보낸이:유지영 (sting55 ) 1996-10-05 01:12 조회:389

한국에서 불구적 음악듣기 -음악평론의 문제-

얼마전부터 몇몇 지식인들에 의해서 수행되어진 락에 대한 고찰과는 너무 나 대조적으로 한국에서의 락은 그 불구적 음악듣기의 거품만이 무성해지는 것 같다.
물론 지식인들에 의해서 행해진 많은 논의들이 다분히 자의적이고 짜맞추 기식의 피상적 접근과 아니면 대중 자체에 대한 무시라고 할 수밖에 없는 난해한 인식론의 채용 등은 그야말로 껍데기 담론들의 집합소이며 자기네들 만의 화려한 전쟁터를 만들어버린 감상주의자들의 도발이었으며 결론은 항 상 저항이니 자유를 들먹였던 그들 자신들의 책임을 간과할 수 없다.
한 예로 지식인의 완벽주의에 대한 과대한 욕심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거창 한 한국 락 계보를 보면 신해철이 이끄는 넥스트는 항상 한국 프로그레시브 락의 전통으로서 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그룹 넥스트는 너무나 아쉽게도 정작 프로그레시브 매니아들로부터의 아무런 관심도 끌지 못하는 그래서 그 고루한 콜렉터들의 집에 변변히 앨범 한 장이 꽂혀있지 않는 웃 지 못할 해프닝이 있는 것이다.
본인의 생각 역시 넥스트의 세련됨은 오직 음악 외적인 것에서만 돋보이 며, 자신들의 중심없는 실험정신의 미명 아래 행해지는 여러 시도들은 싸구 려 보조품을 생산해내는 난잡한 실험실을 연상하게 될 수밖에 없다.
실험 정신이 부재한 나라에서의 실험 정신의 프리미엄이라고나 할까? 그러 나 그러한 실험정신에 대한 찬사의 폭마저 대단히 한정된 몇몇 가수나 그룹 들에게로 제한되어있다는 것이 한국 대중 음악의 불신의 혐의를 더욱 짙게 하는 점이다.
이러한 예로는 성숙의 길로 접어들어 어느정도 자신의 안정된 음악세계를 구축해 나갔던 김수철의 국악과 양악의 접목이라는 고독하고 꾸준한 시도들 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하여가에서 단발적으로 들여준 날라리 소리를 국악 을 양악에 결합시킨 대단한 음악적 진보라고 감탄하는 그 많은 평론가들의 입담 등을 들 수 있다.
한국 대중 음악의 가장 큰 컴플렉스, 삶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바탕으로한 음악 자체에 대한 진지함, 아니 소리 자체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서려 있는 음악들의 부재 그리고 지금까지 그 누구도 행했던 적이 없는 음악형태를 개 척하는 진정한 실험정신의 전멸은 무엇보다도 한국에서의 음악적 정체성을 흐리게 만드는 그리고 더 나아가 무시와 비아냥의 늪에 빠지게 하는 주원인 이 될 것이다.
그와 아룰러 온전한 음악인의 절대적 부재, 노래 연습보다 춤연습을 많이 한다고 자랑스럽게 자랑하는 가수, 어떠한 형태로든 TV스타가 되면 앨범 한장 내는게 유행처럼 되버린 싸구려 가수겸업 세태, 그리고 철저히 계산 된 고도의 마케팅 전술에 의한 가수 만들기 등등 가수가 음악 아닌 다른 것 으로 승부를 내는 그리고 그러한 승부가 애석하게도 더 승률이 높은 지금의 상황에서 평론의 기능, 그 철저한 비판정신과 올바른 중심추 없이는 음악에 대한 어떠한 의미부여도 사상누각이며 화려한 거품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단순히 대중 음악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 전반 에 걸친 왜곡된 정체성의 문제, 그리고 이러한 왜곡과 부재의 악순환 속에 서 형성된 정체성 컴플렉스의 문제일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정체성 문제의 해결은 뚜렷한 정체성의 자신감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며 본인의 생각으로는 음악을 사랑하는 청자 수준에서의 지금 필 요한 것은 자본주의 싸구려 상술에 엄격히 통제되는 대중 음악계의 유통구 조 속에 파묻혀 있을 수 있는 여러 다양한 진주들의 당당한 출현을 가능하 게 하는 공간과 토대에 대한 지지와 적극적 관심이며, 이러한 공간과 토대 확보의 시작은 안으로만 움츠려져있는 아니 끝모를 자존심으로 외부 세계와 의 접촉을 마치 자신의 불명예라 생각할지 모르는 고독한 음악듣기의 매니 아들의 인식전환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청자들의 적극적 참여와 관심은 제멋대로 붓을 휘두르는 음악 횡포 자들에게 엄중한 감시의 역할을 할 것이며 이러한 감시와 비판만이 저질 싸 구려 음악을 추방할 수 있는 기회로 자리 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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