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범죄를 놓고 맞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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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범죄를 놓고 맞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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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한국의 국가주의자들이 한국의 베트남 전쟁 당시 추악한 전쟁 범죄를 샅샅이 훑으며 싸우고 있다.
Credit: Chung Sung-Jun


서울, 대한민국 — 아시아의 긴장 상태가 부족한 것일까? 일본과 한국의 우익들이 어느 나라가 더 최악인지를 따지며 서로를 흉보고 있다.

겉으로만 보면, 이 야단법석이 일어나는 까닭은 두 나라의 살아있는 기억 때문인데, 예를 들면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미라이 학살과 같은 민간인 학살을 광범위하게 자행한 바 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비방은 역사적 분노에 기인하는데,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은 약소국이었던 한반도를 점령하였다. 이른바 근대화를 이끌었다는 (일본의) 서툰 지배는 비참한 복종을 강요하였는데, 예를 들면 중노동, 성폭행, 학교에서 한국어 사용 금지 등이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일본 정부가 이 달부터 전시에 쓰인 욱일기의 사용을 묵인하려 한다는 확인되지 않은 보도에 격분하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욱일기를 나치의 스바스티카(하켄크로츠의 원형인 만자문(卍字文)의 인도식 이름)와 같이 2차대전 전범의 상징으로 여긴다. 또한 한국인들은 일본의 극우가 이것을 사용하는 까닭을 한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잔혹한 일본의 역사를 재현하려는 것으로 본다.

일부 한국 인터넷 사용자들은 일본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기 위해 미국이 원폭을 멈추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1945년 나카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은 20만명 이상을 죽였다.(아이러니하게도 그 중엔 한국인도 상당수 있었다.)

1960년대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일본은 한국 정부에 수백만 달러를 지불하였고, 1993년에는 20여만명에 달하는 "위안부" - 대부분 한국, 중국, 필리핀인이었던 일본군에 의해 강제 성노예 생활을 했던 여성들 -에 대해 사과하였다.

오늘날, 일본의 극우 국가주의자들은 한국에 대해 잘못한 것이 없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로써 그들은 스스로가 과거 자신들의 잔혹행위에 대한 사과가 마지못해 한 것임을 스스로 들어내고, 국가적 위선을 보이고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한국은 남베트남에 30만명의 군대를 파병하였는데, 이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외국 군대였다. 많은 국제 언론이 미국이 베트남에서 잔혹행위를 했다는 보도를 하였지만, 베트남인들 사이에선 한국군이야말로 가장 잔혹하다는 악명을 얻었다.

1960년대 중후반 한국군은 베트남 중부 산간지대의 여러 마을에서 학살을 저질렀다. 징집되어온 한국 병사들은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포로를 남기지 않는 방침을 따랐다. 빈따이에서 있었던 한 학살에서는 마을로 몰려들어간 부대가 모든 집들을 불태우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죽였다고 한국군 참전 예비역과 베트남 생존자들이 증언한 바 있다. 선띤이나 떠이빈과 같은 곳에서는 주민들을 한 데 모아 처형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국가주의자들은 자신들도 군대가 성노예를 모았던 잔혹한 과거가 있음에도 한국군이 베트남 체계적으로 여성을 강간하였다고 비난한다. (역사가들은 한국군 아버지와 베트남 여성간에 태어난 라이따이한이라 불리는 혼혈아가 많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전쟁 중 강간에 의한 것이었는 지 아니면 매춘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한국군은) 이 사악한 작전이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마을에 숨어든 공비들의 기습으로부터 군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수천의 마을이 이런 이유로 곤란을 당했다.

폭력의 정도만 보면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것은 근처에도 가지 못할 정도였다. 또한 매우 가혹하였다. 일부 한국 시민 단체는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보다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과 달리,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러한 일들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국방부 대변인 권기현은 글로벌포스트에 "한국군이 그러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만일 그런 일이 있었다면 오래 전에 밝혀져 공개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한국군은 자유 남베트남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참전하였으며, 엄격한 규율에 따라 작전을 수행하였다. 베트남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은 없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역사기록의 부족한 문제 중에 일부는 한국인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때문이라고 말한다. 미국과 베트남의 연구자들은 미라이 학살과 미국의 고엽제 사용에 대해 적극적으로 폭로하였다. 그러나 한국은 1980년까지 독재국가였고, 이러한 비판 보도는 검열을 받았다.

한국과 베트남에 대해 여러 권의 책을 쓰기도 한 전 베트남 전쟁 특파원 돈 커크는 "아무도 한국의 문제를 들추지 않았고, 시민운동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알지 못하는 것에 문제점을 느끼지도 못했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 알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소위쯤으로 기억되는 한국군의 젊은 장교는 스스로 300명의 베트남인을 죽였다고 말했는데, 그는 자신의 몸에 그 수를 센 표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오늘날 한국과 베트남은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양국 정부는 전쟁의 어두운 과거를 들추지 않고 싶어한다. 한국은 베트남에 4번째로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 국가이고, 두번째로 큰 지원국이다. 베트남의 총리 응우옌 떤 중은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의 경제 성장을 이끈 삼성이나 현대같은 재벌, 즉 기업복합체로부터 배우고자 한다.

관료 집단 밖에서도 베트남 전쟁은 우선 순위가 되지 못한다. 한국에서는 민간인 학살의 인정이나 사과를 말하고자 하는 학자나 정치인을 찾기 어렵다.

국가주의자들의 주목을 받는 게 두려워 익명을 요구한 서울의 한 대학생은 한국에서 베트남 전쟁은 그저 작은 사건일 뿐이라며, 사람들은 현재 한국이 세계속에서 갖는 위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베트남 전쟁이 인종차별을 불러왔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은 베트남을 그저 하찮은 나라로만 볼 뿐 진지하게 다루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일본에 대해서는 "정말 우리의 피부에 와 닿는" 나라라고 말했다. 수십년간 지배를 하고 떠났고 이후로도 만만찮은 경쟁상대이고, 한때의 침략자로서 국가의 존엄에 대한 문제로 분노를 일으키는 존재라는 것이다.

  • 취재 도움: 제이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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