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의 이해

1 개요[ | ]

Night Falls Fast: Understanding Suicide
자살의 이해

 

 

2 # Hicnunc[ | ]

짧은 서평 - 자살로 인간을 이해하기 ~ <자살의 이해> 뿌리와 이파리, 2004

어떤 작가와 예술가들이, 혹은 어떤 철학서와 예술작품이 자살에 낭만적이거나 신비한 외피를 입힌다. 반 고흐, 어네스트 헤밍웨이, 마야코프스키, 실비아 플러스, 버지니아 울프, 발터 벤야민, 질르 들뢰즈, 아리시마 다케오,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 그리고 전혜린, 김광석. 이런 인간들의 죽음이 자살에 대한 후광을 더한다. 하지만 자살 기도는 극단적인 고통과 병적인 혼미,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절망 속에서 행해진다. 그 행동은 낭만적이고 예술적인 충동과 거리가 멀다. 자살자는 인간된 마음을 지켜주는 유머감각과 따뜻함, 자존감이 모두 너덜너덜 헤어지고 박살난 상태에서, 멍해진 채로 그 길을 택한다. 그리고 자살자 옆에 남겨진 사람에게도 엄청난 아픔을 남긴다. 자살은 가장 독성이 강한 고통이다.

자살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인간 행위의 극한에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생의 의지, 혹은 자기보존본능은 자동적이며 일상적이다. 태어나는 순간 우리 모두는 그것을 소지하게 되고 지속적으로 훈련한다. 그리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는 ‘본능적인 것’ 이상으로 강하게 된다. 그러나 자살은 이 모두를 뛰어넘는다. 그래서 자살은 문제적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겪는 개인적인 고통과 사회적인 모순이 자살이라는 현상에 결절한다. 자살을 통해서 ‘살아나감’과 살아있음의 어울림, 즉 사회에 대해 다시 사유할 수 있다.

그래서 서구에서는 ‘자살학(suicidology)’이 발전해왔다. 존스홉킨스 의과대학 정신과 여성 교수인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Kay Redfield Jamison)이 쓰고(원제 ‘Night Falls Fast’) 최근 ‘뿌리와 이파리’에서 번역출간한 <자살의 이해>에 의하면 지난 30년간 1,500여건의 과학 및 임상논문들과 수백 권에 달하는 저서와 전공논문들이 발표됐다 한다. 이중 몇 권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었는데, 사회학적 자살론의 교과서처럼 여겨지는 에밀 뒤르켐의 을 제외할 때 <자살의 이해>는 자살에 대한 가장 깊은 통찰을 제공해준다.

자살은 인간의 복잡성이 야기해내는 가장 문제적인 행동인 탓에, 자살의 원인과 기제는 특정한 요인들로 환원되어 설명되지 못한다. 개별 자살자들에 대해 행해지는 과학적인 ‘심리 부검’으로도 자살에 이른 한 인간의 마음과 생을 다시 조립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살에 대해 말할 때, 인간을 신경전달물질과 DNA에 의해 지배받는 한갓 동물로 보지 않고, 동시에 형이상학적 행위로 미화하지 않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살에 관한 책들을 보면 균형잡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살에 대해 쓰는 사람들은 때로 턱없이 자살을 미화하거나, 자살 사례를 말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풍자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감상에 젖는다.

균형을 잡고 있으면서 새롭고 믿을만한 의학ㆍ자연과학의 성과가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 책의 큰 미덕이다. 저자의 공식적인 태도는, 자살이 맞서기 힘든 강적이지만 예방하고 치료해야 할 ‘병’이라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자살이 우울ㆍ조울ㆍ분열증ㆍ인격장애와 같은 정신질환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자살을 병으로 취급하는 객관적 입장에 다소 불만을 느낄 수 있겠지만 저항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저자 자신, 임상경험이 많은 정신과 의사이면서 스스로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는 조울증 환자라는 사실이 신뢰를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인이 어디에 있든, 저자는 진정한 연민으로 자살자와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3 # 촌평[ | ]

- 다음 글은 위의 서평과는 그리 큰 상관이 없습니다. 읽으면서 눈에 들어온 단어들과 머리에 떠오른 단상들은 적은 것입니다. -

자살은 병이다. 인간은 유기적 기계다. 자유의지라고 말해지는 복잡한 환경속의 특정한 선택이 이어질때 뇌수의 흐름은 달라질 것이고, 신경전달의 길은 고정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이상 선택은 없다. 자실로 달려갈 뿐이다. 그 길을 부셔버릴만한 충격이 있기 전까지는. 농촌에는 허리가 굽은 할머니들이 많다. 허리를 자주 굽혀서 일하다 보면 몸은 거기에 적응하여 허리가 굽어진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탄력이 떨어지면 결국 굳어버리고 만다. 그럼 더이상 허리를 펼 수가 없다. 허리를 부러뜨리기 전까지는. 인간의 시스템을 탐구하는 일에 집중하다보니 이젠 감정이라는 환상이 많이 걷혔다. 인간은 단지 유연하고 복잡한 기계일 뿐이다. 인간이라는 말속에 담기는 모든 부드러운 환상(인간의 우월성과 독특함과 대한)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찰 이후라면 부담없이 들어줄 수도 있겠지만, 그 전이라면 사기일 뿐이다.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예술인들의 자살을 미화한 것은 예술인들이 아니다. 예술인들을 같은 인간으로 느끼기보다는 이미지로 느끼는 이들이 그 이미지를 한층 더 강화시킨 것일 뿐이다. 환상에 환상이 더해지고 더구나 그 환상이 금기일때 얼마나 매력적이겠는가. 게다가 나약함의 한 극단이라고 할 수 있는 자살을 미화할때 인간의 위대성은 여전히 지켜질텐데.

- 근데 실비아 플러스는 누구죠? 실비아라고하면 SylviaSaint 밖에 생각이 안나서--;

극단적인 고통은 자살보다는 SM이 더 심할 것이다. 자살에 이르는 고통은 이미 감수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느껴지지 않는다.

병적인 혼미라는 말에 적극 동감한다. 사실 자살의 과정에 있어서 우울로 인한 무기력과 그에 따른 신체의 유기가 이어지는데, 무기력하게 되면 신체를 제대로 돌보지 않게 되고, 신체를 내버려두면 두뇌조직도 약해진다. 결국 혼미속에서 죽어가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자살에 이르는 그 감정이 살고 싶다는 감정의 왜곡이라는 것이다. 외면하고 싶은 상황속에서 스스로의 정신과 욕체가 파괴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괴롭기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이다. 살고싶은 마음이 있기에 괴롭고, 장기적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단박에 죽어버린다.

인간을 포함한 존재에 있어서 삶과 죽음의 이분법은 없다. 있음과 없음의 이분법은 없다. 오직 삶과 있음이 있을 뿐이다. 죽음과 없음은 스스로의 있음을 바라보는 인간이 상상한 것이다. 자살의 이면에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이 있다는 것이 그 증거중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 시간관념은 또 어떠한가. 오직 현재가 있을 뿐인데, 인간은 미래를 상상한다. 앞으로 계속 괴로울 것 같아서(생명을 충실히 유지하지 못할 것 같아서) 자살을 하고, 자살을 하면 더이상 괴로울 것 같지 않아서 치명적인 행위를 한다. 모두 미래관념이 적용된 행위이다. 하지만 지금 괴로울 뿐이고, 자살을 해서 더이상 괴롭지 않을땐 괴로워 할 자아가 없다. 즉 자살자들은 편안함을 원하는데 자살이후엔 편안함을 느낄 자아가 없기 때문에 자살의 의도는 성취되지 않는다. 미래의 시간, 죽음의 시간에 대한 거짓된 감각이 어리석은 행위를 부른 것이다.

자존감이 박살난 상태에서 자살하는 것은 아니다. 자존감이 박살났다면 다른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문제는 너무 강한 자존감과 도무지 깨어질수 없는 '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 자존감 이외의 것이라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을 알수없는 것에 최대의 공포를 느끼는데, 자살자들은 자아의 상에 대한 강박관념을 더이상 지킬 수 없을 지경의 도전이 다가올때 자아이후라는 전대미문의 암흑에 도달하고 치명적인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죽는다. 역시 재미있는 것은 공포를 느껴 행한 결과가 공포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그 공포의 대상(자아가 아닌 것)이 된다는 것이다.

자살은 인간 최대의 행복추구이다. 고통없는 삶이 인간행복이라 할때 삶은 끝났지만 자살자에겐 일단 고통은 사라지니 그것이 행복이다. 그 행복을 그낄 대상은 없지만... 목이 마를때 우린 물을 마신다. 이때 물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고통이 사라지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자살을 해서 고통이 단절된다면, 그는 최대의 행복을 추구한 것이다. 지속적이지는 않지만.

무서운 건 고통의 이면에 숨어있는 육체다. 인간 정신(혹은 영혼)이 육체의 특정상태를 유지하는 자율감각이라고 할때, 육신은 그 자연스러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뇌에 충격을 가하는 것이다. 고문이라고 해도 좋다. 이때 영혼의 성스러움은 어디에 있나. 정말 정신이 육신을 움직이는 것일까? 육신에 고문을 당하다가 더이상 견딜수 없어 가해자를 살해하는 인간. 육신은 지나쳐서 스스로의 파괴를 부르고 말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육신의 정신지배를 인지하고 그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고행을 행하기도 한다. 우울과 마찬가지로 고통의 느낌이 고착화되어 고행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무척 인상적인 행동이다. 아마도 이런건 고행이라고 하기보단 무소유 내지는 절제된 삶이라고 하는것이 어울릴 듯 하다.

존재는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를 지속하려 한다. 생명을 이어가고, 자식을 낳는다. 자살자 또한 삶의 하위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고통을 피하는 방법에 골몰한다. 정말 생존은 맹목적이고 지배적인 감정이다. 그렇다면 자유를 위해 이런 가장 큰 강박을 이겨낸 자살자들은 승리자일까? 물론 아니다. 결국 삶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니까. 삶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해고 그것이 구속일수는 없다. 삶이 따로 있고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가 삶인데 우리가 우리를 구속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 문제는 분열이다. 쓸데없이 복잡해져 쓸데없는 관념에 사로잡힌 인간은 삶이라는 명제들 만든후에 단일자인 삶을 죽음이라는 상상으로 이분화 시킨다. 죽음을 느끼는 죽은 사람이 있던가? 결국 커뮤니케이선의 수단일 뿐인 언어를 실제로 착각한 결과일 뿐이다. 쓸데없는 관념과 유희는 건강에 좋지않다.

이곳에서 얼마전에 레프팅 가이드가 빠져 죽었다. 수영실력을 과신하다 물속으로 빨려들어갔다고 한다. 스피드를 즐기는 사람들. 위험한 놀이기구를 타는 사람들. 익스트림 스포츠 등등. 스릴을 즐기기 위해서라고 한다. 다른말로 쾌락이다. 그런데 쾌락이란 육체가 특정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흥분이란 미끼로 정신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쾌락을 위해 특정 행위를 반복하다가 육체의 유지가 아닌 파괴를 부르는 것.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도 오토바이를 사서 100km의 상쾌함(피부를 자극하는 바람과 눈을 자극하는 빠른 풍경, 빠른 스피드로 달리고 있다는 관념의 자극)을 즐기다가 커브길에 넘어져서 팔이 조금 까졌다. 오랬동안 따갑고 아팟다. 어리석고 위험한 짓이었다. 오토바이는 운송수단이지 놀이기구가 아니니까. 자극을 위해 자극의 본체를 파괴하는 행위. 수단이 목적을 벗어나면 슬픔을 부를 뿐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자살은 삶을 뛰어넘지 못한다. 그래서 문제적일수 없다. 다만 사회에 있어선 다소의 손실일 수 있다.

죽음과 시간이라는 환상과 더불어 사회라는 환상도 있다. 사회는 거대화된 육체라고 생각하는데 이때 개인은 세포가 되고 사회는 정신이 된다.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 죽는다는 것엔 문제가 있다. 일단 죽고나면 변혁된 세상을 느낄 자아가 없다. 또 하나는 사회는 개인들이 잘 살기 위해서 다수의 개인을 구조화시킨 것인데, 사회를 위해 죽는다는 건 모순이다. 물론 죽어서 사회가 변할 '수'도 있다. 이게 자비심일까? 자신에게 자비롭지 못한자는 타인에게 자비로울 수 없다. 내가 신념을 지키는데 다른 놈이 날 죽인다면 죽겠지만, 자살을 해서 다른 놈을 바꾸겠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 신념을 지킬 수 있는 한 살아서 개혁하자. 사회는 정신이 그렇듯이 그 본질이 존재의 도구라는 점에 주목하자. 도구를 위해 본질이 희생하는 건 모순이다.

인간의 복잡성은 생존에 있어 우월한 것이 아니다. 생존을 위협하는 복잡성은 어리석음일 뿐이다. 따라서 자살은 문제일 수 없으며 다만 착각일 뿐아다. 인간과 사회를 냉철하게 바라보자. 결코 도덕적이거나 성스럽지 않다. 왜 그러한가. 존재에게 있어 최대의 미덕은 생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생존을 위해 행하는 이기적인 행동이 정도를 넘어서면 되려 생존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전쟁무기를 위해 전쟁을 하는 미국을 보자. 전쟁무기는 그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생산한다. 그런데 그 결과는 테러로 인한 위협과 테러방지를 위한 불편이다. 진정 바르게 생존하는 것은 쾌락과 안정이라는 환상을 벗어나는데서 시작할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쾌락의 농도도 변하고, 지나친 안정은 죽음을 부를 뿐이다. 결국 배를 불리고 쾌락속에 있는 것이 삶의 최선이라는 잘못된 관념속에 우리는 자해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한갓 동물이다. 동물과 무엇이 다른가. 동물들이 어떻길래 우리가 동물이면 안될까? 동물이 안하는 뻘짓을 하면 동물보다 우월해지나? 그 우월의 감정조차 경쟁에서 이겨 암컷을 차지하려는 감정이 확장된 것에 불과하다. 영혼이 육신을 구현하고 육신이 영혼을 머물게 한다. 영혼이 어떤 육신을 구현하든 무언가가 구현된다는 것엔 다를바가 없다. 그렇다면 더욱 복잡하고 특이한 것을 구현하면 위대한 것이 될까? 모든 존재에 담겨있는 양자의 비밀도 풀지 못하면서 무슨 복잡함을 말할까? 그리고 양자역학을 인식하면 사람이 양자에서 벗어나나? 뜻을 전하기 위한 언어가 구조화 되어 관념이 되고, 그 관념을 받아들이는 것을 인식이라 한다. 인식의 본질은 뜻을 전하기 것이고 서로 주고 받는 뜻은 올바른 생존을 위해서이다. 결국 인식은 생존의 도구이고, 생존을 위한 다양한 도구들은 모든 유정들이 구사하고 있는 바이다. 그리 특별한 것이 없다. 인간은 왜 그리 관념에 집착할까. 인간들은 스스로 만든 동굴속에 살게 되면서 그 동굴에 필요치 않는 많은 감각을 잃어버렸다. 느낄 대상도 적어졌고, 느낄 감각도 퇴행하였다. 하지만 외부에 대한 욕구는 그대로다. 환경에 민감하게 적응하는 것은 생존의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 욕구가 내면으로 향하여 관념에 쏟아지거나 사회에 대한 욕구로 전환되었다. 현대사회가 개인을 압박하는 건 그 타이트한 조직화도 문제지만 근본적 욕구가 사회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다양성이란 자연의 다양성을 잃어버리고 힘겹게 만든 것이다. 변화와 다양성은 생존의 필수조건이기에 잃어버린체로 살수는 없다. 자연의 삶도 힘들지만, 자연에 적응된 육체를 가지고 사회에 다시적응하고, 사회를 창조해 나가는 것은 더 힘든건지도 모른다.

자살은 형이상학적이거나 고상할 수 없다. 생존이 종료된 마당에 그런 관념이 들어설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선택에 따른 기분이 모여 고착화되면 병이된다. 병은 단지 물리적 상황이 아니다. 병적 상황을 만든 것은 정신이니까. 어떻든 약을 통해 고착화된 조직을 유연하게 만들어 자살을 예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많은 이들이 공포와 금기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통해 보다 자유롭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나저나 이글을 쓰면서 RogerWatersFlickeringFlame을 듣는데 너무 잘 어울린다. NIN이나 RogerWaters는 우울한 사람들에겐 쥐약일 듯. -- LongWarm 2004-8-3 12:57 am


자살이라는 것은 '기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신앙, 신념 뭐 그런 단어들도 생각났지만 그냥 기분 정도가 개중 적당한 단어가 아닌가 싶어요. 굳이 질환으로 모는 것은 그다지 맘에 드는 설명은 아니군요. 자살이라는 놈은 객관적으로 접근하면 재미없어질 것 같은 테마이기도 하구요. 어쨌든 이쪽 책도 한번쯤 읽어보고 싶습니다. -- 거북이 2004-7-23 11:47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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