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잡생각 - 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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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잡생각 - 각인
  • 2021-10-27 jjw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도 아주 어릴 적 기억은 거의 없다. 하지만 몇몇 장면은 사진처럼 머릿 속에 각인되어 불쑥불쑥 떠오른다. 어떤 것은 아예 맥락도 없이 장면뿐이라 곤혹스러울 때도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성남에 살다가 국민학교 3학년 여름 방학 때 청주로 이사를 갔다. 처음엔 우암동 무심천 옆을 지나는 철길 건널목 앞에 살았는데 사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친구들과 다방구를 하다가 팔을 부러뜨렸다. 지금은 철도를 옮겨서 철길은 아예 사라졌고 다방구 하며 놀던 동네 뒷골목은 아파트로 변한 지 오래이다. 그 때 친구들은 이름도 얼굴도 다 잊어 버렸는데 팔이 부러질 때 넘어졌던 얕으막한 흙 무더기는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곳에서 2년이나 살았을까? 우리는 청주 종합체육관 옆으로 한 참 짓고 있던 주공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학교는 그대로 우암국민학교여서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다. 아파트 단지 앞에 분식집이 새로 생겼는데 고기만두를 하나에 5십원에 팔았다. 버스 값이 5십원이었기 때문에 그거 하나를 먹으려면 한 번은 걸어서 와야 한다. 동생이랑 같이 버스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동생을 살살 꼬득여서 철길을 따라 걸어서 집으로 갔다. 아마 걸어서 한 시간이 넘는 거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에는 잘 따라오던 동생이 절반 쯤 걷자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대더니 다 와가서는 결국 울고 말았다. 나는 아무 생각없는 철없고 팔팔한 어린이였기 때문에 우는 동생을 달래주기는 고사하고 짜증만 부리고 말았다. 그날 엄마에게 정말 뒤지게 혼났다.

아무튼 그 무렵 우리 아파트 바로 앞은 무슨 퀴퀴한 냄새가 잔뜩 나는 벌판이었는데 방과후 해가 떨어질 때까지 뭐 달리 할 일 없던 동네 꼬마들의 놀이터였다. 옆으로는 무슨 맨션인지가 세워지고 있었고 건너편 큰길을 지나면 으리으리한 공설 실내체육관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80년대 초 한창 3저 호황으로 부동산이 요동칠 때 쓰레기 매립지를 재개발 했을 거 같다.

거기서 놀다가 스티로폼으로 만든 커다란 땅콩 인형을 보았다. 요즘 나오는 귀엽고 동글동글한 그런 식의 인형이 아니라 당시에도 조금은 철지난 거칠거칠한 땅콩 껍질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눈알과 입을 단 어찌보면 기괴한 차림의 인형이다. 그 큰 눈알 밑에 과장된 커다란 입이 쩍 벌려 달려 있는데 붉은 루즈를 칠한 것 같은 입술마저 달린 녀석이다.

내가 당혹스러운 건 이게 도대체 왜 기억에 그렇게 각인되었는 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왜일까? 한쪽이 떨어져 나간 그 큰 눈알과 게걸스럽게 벌려있는 붉은 루즈를 칠한 입이 아무런 맥락없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그 해 5.18이 있었다. 청주의 국민학생인 나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몰랐다. 그냥 학교에서 체육하는데 바로 옆 청주대학교에서 뭔가 펑펑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눈물 콧물 다 쏟게 하는 연기가 학교 운동장에 들어왔던 게 다다. 그리고 이듬해 어디 시찰을 간다던가 외국에 갔다 왔다던가 하는 대통령이 학교 앞을 지나간다고 아침부터 청소를 하고 두 시간을 큰길에서 줄맞추어 태극기를 들고 서있다가 그야말로 삽시간에 휙하고 지나가는 검은차를 구경하고 교실로 들어갔다.

노태우가 죽었다. 어제 오늘 전두환 보다는 그나마 인간미란 게 조금 남아 있더랬다 같은 평들을 본다. 모르겠다. 그 시절을 겪지 않은 사람들은 오히려 공과 과를 함께 볼 수 있을 지도. 그런데 내 머릿속 각인은 노태우와 5.18은 땔래야 땔 수 없는 한 묶음이다. 그의 죽음에 결코 좋은 말을 해주기 어렵다. 게다가 이렇든 저렇든 잘먹고 잘살다 갔지 않나. 인생팔십 고희래라고 하는데 그것을 넘겼으니 천수를 다 누리고 간 셈이다. 이 왕 가는 거 오랜 친구도 길동무 삼지 그랬냐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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