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이슬람이 인류에게 줄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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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lam can give to Humanity Today - by Muhammad Qutb
오늘날 이슬람이 인류에게 줄 수 있는 것

현대 사회에서 그가 직면하고 있는 뿌리깊은 문제들과 갈망들 때문에, 지구상 모든 인간은 소외감을 느끼고 혼란스러워 하며 정신이 산란하여 거의 정신분열증에 걸릴 지경이다. 그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자신의 완전성을 회복하고 삶의 목표를 재정립할 수 있는 안정되고 통합된 힘이다. 전통적 형태의 숭배에 대한 거부와 그 결과로서의 신으로부터의 분리는, 현세에서의 만족만을 약속할 뿐 개인의 한층 더 깊은 요구를 충족시키지도 못하고 인류가 기억할 수 없던 시절부터 스스로에게 물었던 본유의 존재론적 질문에 대답하지도 못하는, 수많은 철학과 신조들 사이의 선택권만을 남겨 주었다. 종교적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기본적인 이분법에 의해서 인간의 고뇌는 더욱 악화되었다. 개인의 존재의 완전성뿐만 아니라 삶의 통일성 또한 파괴되었다. 이슬람 신앙은 오늘날 인간이 필요로 하는 통합된 힘을 줄 수 있다. 신의 유일성과 삶의 단일성의 개념은, 삶의 조각난 측면들을 다시 통일하고 올바르고 필수적인 숭배의 길을 확립함으로써, 갈라진 자아와 세계에 자신의 정체성과 목표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슬람이 오늘날의 세계에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어떻게 하면 가장 잘 말할 수 있을까? 1948년 <이슬람-서구와 미래>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아놀드 토인비는 이슬람이 당대의 두 가지 주요한 문제, 즉 인종차별과 알코올 중독에 대해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한층 더 깊은 침체의 징후들에 지나지 않는다. 영적인 이유에서도 또한 실용적인 이유에서도, 이슬람이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여타의 더 근본적인 문제들이 아니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으로 자신을 한정할 까닭은 없다. 이슬람의 사명은 그러한 모든 문제점들을 직면하는 것이고, 인류에게 현세와 내세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 준수해야 하는 올바른 길을 보여줌으로써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이다. 해결책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이 부족한지(필요한지) 정의하도록 하자. 오늘날 인류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슬람은 어떻게 이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가?

성스러운 계시(Holy Revelation, 이하 굵은 글씨는 이슬람 고유명사임을 나타내는 영문 대문자 표기)에 따르면 인간의 삶의 기초적인 현안은, 과거로부터 죽 그래 왔고 심판의 날까지 그러할 것으로, 숭배의 문제이다. 누구를 숭배할 것이며, 그분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 첫 번째 질문을 생각해 보자; 누구를 숭배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이 처음으로 제기되었던 18세기와 19세기 계몽 사상 시대와 물질주의 시대의 서구 사상가와 문필가들은, 그 문제를 지워 버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의 지침은 “이 문제에 대해 잊어버리면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삶을 살고 삶을 즐기고, 원한다면 아무것도 숭배하지 마라” 였다. 그들은 종교의 굴레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현세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전례 없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두 개의 중요한 환상에 기반한 것이다. 첫 번째 환상은 인간성의 추구를 통해 행복을 달성할 수 있으며, 그 인간성이 종교를 배척할 경우에 건설적으로 개발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사실 서구는 종교를 배척한 이래 과학과 기술 양면에서 엄청나게 발전하였다. 바로 이러한 진보가 사람들의 가슴에 그러한 환상을 키워 냈다. 그들은 종교 그 자체가 서구 세계의 발전을 가로막는 힘이었던 것이 아니라, 중세이래 서구의 종교에 대한 해석이 그들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중요한 요소를 간과하였다; 종교를 경시한 이래 서구에 의해 성취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삶의 가장 중요한, 심지어는 기본적인 요소도 아니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그 자체로는 건전한 인간 생활을 보장하지 못한다. 지난 두 세기 동안의 모든 물질적인 진보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안전, 평화, 복지를 위협하고 있는, 정념, 혼란, 광기, 자살을 비롯한 많은 신경・정신병적인 무질서와 젊은 세대의 당황과 환각의 중요한 원인이 영적 가치의 공백이었음을 인지하면서,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서구는 점점 더 이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

두 번째의 환상은, 인간이 숭배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앞서와 연관된 생각이다. 이러한 순진한 환상은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확증된 바가 없다. 고대 세계나 현대 세계나 인간의 삶에서 어떠한 형태의 ‘숭배’도 없었던 시기는 없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어떤 것도 절대 숭배하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한다 해도, 스스로 상상하듯이 숭배의 문제를 면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숭배의 대상을 바꿀 뿐이고, 그 자신이나 자신의 관심사를 그가 숭배하고 그의 삶을 통치할 신으로서 선포할 따름이다. 숭배란, 사람들이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때때로 떠올리는 것들―기도문 암송(prayer), 기도(devotion), 공물 기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단지 형식의 문제일 뿐이다. 숭배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어떠한 존재에 대한 복종과 묵종이며, 그 존재에 복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믿음이다. 이러한 의미의 숭배는, 그것이 자신의 구성 요소이므로, 모든 인간의 존재와 실재에 있어 필수적인 부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무도, 설령 그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경우에도, 숭배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그가 선택했건 하지 않았건, 알고 있건 모르고 있건, 본능적인 숭배자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면, 단지 그가 숭배하는 신격(deity)의 본성이나 숭배하는 방법이 다른 것뿐이다. 그가 하느님을 숭배하던가 다른 신을 숭배하던가 또는 어떤 이름의 신격을 숭배하던가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의 하느님에 대한 숭배는 정상적일 수도 있고 비정상적일 수도 있으며,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그릇된 신격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을 확증한 뒤, 꾸란은 질문의 다른 부분, 즉 하느님을 섬기는 올바른 방법에 대한 설명으로 나아간다. 책은 그것이 하느님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숭배의 한결같음에 대해 명시하고 있다.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숭배는 두 가지의 불가결하고 불가분한 측면, 즉 하느님을 숭배하는 의식을 준수함으로써 다른 신을 물리치는 것과, 하느님의 계시를 따름으로써 삶의 길잡이로 삼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상, 물건, 또는 사람에게 기도하거나 공물을 바치는 것은 숭배 행위뿐만 아니라 종교를 타락시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신심이 깊지 못한 태도나 행동을 취했을 때에도 똑같이 타락하는 것이다. 사람의 숭배와 삶의 태도는 통일성을 지녀야 한다. 그가 기도문을 암송하거나 기도를 바칠 때 부르는 신은, 그가 공부하면서, 돈을 벌면서, 현세의 더 나은 삶을 도모하면서, 먹으면서, 마시면서, 성교하면서, 마찬가지로 가족・타인・타공동체・타국・타민족들과 대화하면서, 전시에도, 평화시에도, 부르는 신과 동일한 신이다. “예언자께서 말씀하셨다: 오! 나의 숭배와 나의 희생, 그리고 나의 삶과 나의 죽음은 세계의 주인이신 알라를 위해 있다.”(VI. 163). 사람이 행하는 모든 일에서,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의 이름을 반복하는 것은 그에게 의 명령을 떠올려 그 명령에 복종하도록 하는 실제적인 효과가 있다. 이슬람에서 의 명령은 모든 사안을 다루고 있으며, 금지되는 것과 허락되는 것을 알려준다.

이렇게 되면 상당히 중대한 어떤 일이 사람의 삶에 일어난다. 맨 먼저 사람은 그의 창조자께 정당한 숭배를 바친다. 사람이 그분을 하루에 한 번 기도하면서 숭배하고 그것을 숭배의 끝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결코 을 진실로 그가 해야 할만큼 섬기지 못한다. 하느님께서 “나는 단지 를 섬기도록 정령(Jinn)과 인류를 창조하였다.”(LI: 56) 라고 말씀하신 것은, 기도문 암송이나 기도, 삶과 죽음까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섬김을 뜻함이다. 이렇게 살지 않는 것은 두 신을 섬기는 것이 된다: 하나는 성소에서 암송과 기도를 통해서, 다른 하나(또는 다른 여럿, 하나로 수렴하더라도)는 일상의 용무에 복종함으로써. “알라께서 말씀하셨다 : 두 신을 선택하지 마라. 하나의 신이 있을 뿐이다. 그분은 단지 그분 자신을 경외하신다.”(al-Nahl XVI: 51). 정확성, 질서, 균일성의 빼어난 본보기인 우주의 창조와 또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창조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기적 같은 힘을 느끼는 인간 정신의 능력은, 이 전능하신 하느님그분의 영광과 권능에 합당한 경외를 바쳐 섬기도록 할 것이다. 잠깐씩만 신을 섬기고 일상의 나머지 생활에서는 믿음을 놓아 버린다면, 이러한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숭배는 하느님의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며, 타인에게 갚아야 할 것을 갚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무감에 따라 신을 섬기는 것이다. “오! 알라께서 너희들로 하여금 저축을 그것의 소유자에게 되돌려 줄 것을 명하셨다”(IV. 58)고 했거니와, 이 전능하신 하느님 이외의 그 누가 사심 없고 한결같은 숭배를 받을 자격이 있단 말인가? 굳이 그분이 자비를 베풀지 않더라도, 그분께 그분의 몫―즉 넓고 한결같이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숭배―을 바치는 사람에 대해서 하느님은 관대하다. 그분은 섬기는 자들에게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으로 보상하실 것이며, 인간의 삶의 더 긴 부분이기 때문에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사후의 미래를 지켜 주실 것이다.

숭배의 통일성은 일생 동안 그의 삶의 여러 중요한 부분들에 영향을 끼친다. 먼저 그것은 사람에게 신앙의 테두리 밖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내면적 안심을 제공한다. 내면적 안심은 약물, 술, 마취약, 여가, 관능적 쾌락 어느 것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이 피하고 싶은 정신 상태를 제거하거나 치유하기는커녕 더욱 확고하게 할뿐이다. 안심은 신앙을 돈독히 하고 의 이름을 되뇌는 가운데 퍼져나온다. 꾸란에서 말하듯이, “믿는 자들, 그리고 을 생각하면서 그의 마음이 만족을 얻은 자들아: 의심할 나위 없이 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진실로 만족을 얻었도다.” 이러한 심적 안정이란, 현실에 대해 조용히 체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어디에서나 올바른 삶을 모색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정의를 세상에 세우기 위해 의 이름으로 행하는 성전(聖戰: 지하드)이며,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모든 종류의 불의에 대한 반대이며, 지식과 가르침에 대한 모색이다. 이러한 모든 행동에 있어서, 믿는 이들은 만물이 그분에 의해 움직여지고 그분께로 돌아가므로, 하느님께 의지한다. 나아가서, 믿는 이들은 하느님께서는 오직 그에게 善만을 약속했다고 확신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생계를 벌어들이고, 학문에 정진하고, 聖戰을 수행하고, 문명을 건설하는 것―초기 무슬림 시대에 두드러졌던―이 정념에 의해 가로막히지 않는 이유이다.

최근까지, 현대를 창조적 정념의 시기로 평하면서 찬사와 함께 현대를 ‘정념의 시대’로 서술하는 문필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념이란 조금만 섭취해도 치명적인 독약과도 같은 것이라는 점을 오늘날에 와서 실감하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맹렬한 열광적인 행위가 진정한 행위도 아니며 창조적인 행위도 아니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단지, 사람이 안정감과 심리적 균형을 잃게 되는 또 다른 결과를 초래하는 질병의 조짐이었을 뿐이었다. 다른 문필가들은, 정념은 해가 되건 득이 되건 문명의 필수적인 동반자라고 말했다. 정념은 오직 물질주의와 영적 태만을 기반으로 번영하는 문명하고만 나란히 하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과학적 정밀성을 결여하고 있다. 이런 형태의 문명은 진정한 안정감을 불어넣어 줄 기반을 결여하고 있으며, 바로 이런 문명이 인간의 영혼을 두 개의 신격으로―하나는 기껏해야 성전에서 간단히 섬김 받는 것으로, 또 하나는 나날의 삶의 현실을 지배하는 것으로―갈라놓은 장본인이다. 사람과 함께 하는 후자의 신격은 왕왕 그를 섬기는 자에게 안심과 안정을 주지 못하는, 거칠고 가차없는 것이다. 역사가 보여주듯이, 한때 이것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안전했기 때문에 치명적인 근심 걱정의 고통을 겪지 않았던, 융성하는 문명이었다.

숭배의 균일성은 현대의 탈선이 부당하게 조각조각 냈던, 인간의 자아와 삶의 여러 가지 측면을 통합해 준다. 그것은 영혼과 물질을, 육체와 정신을 통합해 준다. 그것은 종교와 과학을, 경건함과 물질적 개발을, 종교와 삶을 통합한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현세의 삶과 내세를 합해 준다.

이슬람에 의해 이루어진 이러한 통합들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정신과 육체, 또는 영혼과 물질은 두 가지 모두 인간을 구성하는 진정하고 확실한 요소들이다. “보라, 그대의 께서 천사들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인간을 찰흙에서 만들 것이다. 내가 그를 만들고 그에게 나의 영혼을 불어넣으면 내려가서 그에게 경배를 올려라.’” 그것들은 인간의 탄생에서부터 떼어놓을 수 없도록 합해져 있었으며, 인간의 역사는 이 사실에 대한 살아 있는 확증이다. 그러나 ‘자힐리야’ 시대에는, 영/육 각각이 제 나름대로의 길을 따라 가도록 함에 의해, 그리고 하나를 희생하여 다른 하나를 부풀림에 의해 항상 그것들을 떼어놓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몇몇 前이슬람 시대에는 영혼이 인간의 진정한 본질로 강조되고 육체는 존중할 가치가 없는 불순한 물체로 경멸되었다. 그와 같은 물체는 단지 상스럽고 부정한 대접밖에는 받을 수 없었다. 삶의 물질적인 측면은 그것이 육체, 곧 진흙에 가깝다는 이유로 역시 멸시되었다. 다른 前이슬람 시대에는 육체와 관능적 쾌락이 지나치게 강조되었다. 그 시기에는 육체가 실재로 간주되었고, 영혼은 단지 본질이 없는 아름다운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인생의 2차적 대상으로, 또는 방해물로 간주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시대들은 물질적 생산과 건설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 반면, 인간의 영적 구성은 거의 철저하게 무시하였다.

두 가지 태도 모두는, 육체와 영혼 사이에는 뿌리깊은 모순이 있어서 하나의 편을 들어 다를 하나를 억누르지 않는 한 그 모순을 조정할 길이 없다는 잘못된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 인간은 영혼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육체를 억압하거나, 또는 물질적인 해방을 이루기 위해서 영혼을 억압한다. 그러나, 사실 어떤 경우에도 억압은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한다. 육체를 억압하고 생기를 빼앗는 것은 본능에 역행하는 일이며, 인간의 에너지를 차단하고 물질적 문화적 지체를 초래하며 가난, 곤궁, 우울, 비관, 절망 등의 원인이 된다. 다른 한편, 영혼을 억압하고 검게 만드는 것은 현세의 즐거움에 아무리 침잠해도 채워지지 않는 내적 근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필연적으로 개인간, 사회간, 국가간, 민족간의 갈등을 초래한다. 이러한 갈등은 본능에 역행하는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징표이며, 결과는 인간의 삶의 평형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반면, 이슬람은 육체와 영혼의 조화를 이루고 그들 사이의 어떤 모순이나 갈등도 없애 주는 균형 잡힌 대안을 제시한다. 이슬람은 이 두 본체 사이에 조정할 수 없는 모순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육체와 영혼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원소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은 사람 안에서 통합되어 있다. 그 응집력이 떨어지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 그것들이 공동으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배하기 때문이며, 결과적으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려 주신 본능적 평형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오 사람아! 무엇이 그대를 너의 가장 자비로우신 주로부터 유혹하였는가? 그대를 창조하시고 합당한 조화를 부여하시고 올바른 성품을 내리신 그분께로부터.”(V. 7). 중용 또는 평형은 의 창조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무지한 인간은 이 평형을 깬다. 결과적으로, 사례들을 통해 확증되었듯이, 현실적인 삶뿐만 아니라 영혼도 방해를 받는다. 이 생각은 과학자이자 내과의사인 알렉시스 카렐에 의해서 L'Homme Cet Inconnu(인간, 그 미지의 존재)라는 책을 통해 상세히 설명되었다. 그는 우리의 영적인 면에 대한 태만과 아울러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심각한 무지를 지적하고, 무지에 기반한 우리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제도의 구성이, 비록 우연의 일치로 우리의 과학과 문화가 진보하고 있을지라도 우리가 인간으로서 퇴보하고 있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에게 하느님이 내리신 균형과 중용을 되찾아 줄 수 있는 것은 이슬람이다. 이슬람은 간단하고 현실적이지만 원대한 조치를 실행하는데, 즉 영혼과 육체가 삶의 전체에 참여하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기도는 단지 영적인 찬송이 아니라, 몸으로 수행하는 일련의 동작들 즉 서기, 무릎꿇기, 엎드리기 등을 포함하며, 그것들은 또한 낭송되는 문구에 대한 의식적인 정신적 집중과 맞물려 있다. 반면 먹고 마시고 성교하는 것도 순수한 육체적 활동이 아니며, 의 이름을 언급함으로써 허용되는 영적인 열망을 나타내고, 합당한 것과 금지된 것을 엄격하게 관찰하면서 수행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러한 행위들은 과 연결된다. 어떠한 사람의 행위라도 변함없이 이 두 기둥 사이에 위치하며 따라서 영혼과 육체, 정신과 물질, 지상과 천상을 통합하는 통합된 체계로 포함된다.

종교와 과학 사이에도 동일한 분열이 일어난다. 인간은 숭배하려는 본능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반면 그 주변의 물질적 세계의 비밀을 알고 이것들을 그의 힘에 복종시키고자 하는 본능적 성질 또한 가지고 있다. 두 가지 성질 모두 본능적이고 진실한 것이며, 타고난 것이다. 어떠한 필연적인 모순, 분열, 충돌도 그 둘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 계시는 그러한 분열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인간의 실책이 그 둘 사이에 충돌과 적의를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이분법은 유럽에서 르네상스 초반기에 교회가 과학자와 인문학자의 활동을 방해하고,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죠르다노 브루노와 같은 과학자들을 협박하여 매장하고 고문하고 살해하면서 비롯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간극은 더욱 넓어지고 충돌은 심화되어, 결국 과학 연구 과정에서 단지 신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도, 보통의 유럽인의 생각으로는 연구의 정신에 대한 위배이며 두 화해할 수 없는 태도를 통합하려는 부당한 시도와 같은 뜻이었다. 다윈이 말했듯이, “신과 관련지어 진화를 해석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원소를 순수하게 기계적인 경우에 도입하는 것이다.”

두 주체 사이의 관계의 본질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해석은 인간의 균형과 안정을 돕지 못하고 방해할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내적 자아 안에서 각각 만족을 원하는 두 진정한 원소들 사이의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이 그의 영적 욕구가 과학의 틀거리 밖에 위치한다고 느낄 때, 과학적 욕구가 종교의 범주 밖에 위치한다고 느낄 때, 그리고 이 두 욕구가 동시에 상이한 방향으로 갈라져 나간다고 느낄 때, 그는 숭배자에게 각각 다른 태도와 몸가짐과 관점을 요구하는 두 화해할 수 없는 신격을 섬기는 귀결을 맞게 된다. 당분간 둘을 섬기는 것 말고 다른 선택은 없다. 다시금 인간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분열을 겪게 된다. 그의 갈등은 강화되고, 종종 그러듯이 둘 사이의 선택을 강요당할 때, 그는 당장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더 쓸모 있는 과학이라는 신격 앞에 굴복하고, 덜 현실적이고 형체가 불분명하여 존재가 의심스러운 세계에 속해 있는 종교의 신격을 포기한다.

이슬람은 현실적이고 간단한 방법을 통해 이러한 모순을 간단히 해결한다. 인간이 기도 안에서 섬기는 하느님은 인간에게 최초로 지식을 준 하느님이고, 여전히 가르치고 지식을 주기 위해 인간을 초대하는 하느님이다.

“그분께서는 아담에게 만물의 본질을 가르치셨다.” (II 31)
"예언자께서 말씀하셨다: 창조하시는 그대의 주의 이름으로. 덩어리에서 인간을 창조하셨도다. 그리고 그대의 주께서는 가장 관대한 분이시며, 펜으로 가르치신다. 인간에게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신다.“ (XCVI. 1-5)
하느님께서는 우주의 비밀을 관찰할 수 있도록 인간을 초대하신다:
“보라! 하늘과 땅의 창조에, 밤과 낮의 바뀜에, 인류의 이익을 위해 대양을 가로지르는 함선의 운항에,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내리고 죽은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는 비에, 그분께서 지상에 흩으신 모든 종류의 짐승들에, 하늘과 땅 사이를 운행하는 구름과 바람의 바뀜에, (여기에) 바로 현명한 사람의 징표가 있다.” (II. 164)
하느님께서는 그분께서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임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천상의 모든 것과 지상의 모든 것을 너를 위해 만들었다.” (XLV. 13)
그의 육체적 정신적 노력을 통해 천상과 지상에 있는 것을 이용하기 위해, 인간이 해야 할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우주에 부여하신 우주의 법칙을 배우는 것이다:
“지구를 네가 다스릴 수 있도록 한 것은 그분이시니, 너는 그 넓은 대지를 가로지르고 그분께서 주시는 것을 즐겨라(그러나 그분께로 부활할지어다).” (LXVII).
따라서 신의 유일성으로부터 방향의 통일이 이루어진다.

인간의 지식은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에서와 같이 그분의 의지에 反하여 에게 훔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내려진 신의 선물이다. 인간은 배우기 위해서 신에게 불복종할 까닭이 없다. 인간이 배우고 지식을 찾는 것을 지도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이다. 예언자가 이르기를, “지식의 추구는 의무이다.” 인간은 그의 이익을 위해 하늘과 땅의 자원을 이용할 때 어떠한 죄책감도 느낄 필요가 없으며, 그가 그렇게 할 때, 그리스 신화에 묘사된 것과 같은 인간과 신의 관계에 따라 그를 억압하고 짓누르는, 신의 뜻에 반하여 행동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인간을 위해 이 우주의 자원을 동력화하고 그로 하여금 지상에 정착하도록 가르친 것은 바로 하느님이다.

“지상에서 그대를 만들고 그대를 그곳에 정착하도록 한 것은 바로 그분이시다.”(Hood 61)

따라서 인간에게는 그가 모순되는 요구를 하는 두 반대되는 신을 섬긴다고 느낄 이유가 없다. 인간이 섬겨야 하는 모든 것은 단지 하나의 하느님이다. 인간이 기도를 바칠 때, 알라께서는 그가 그분을 두려워하기를 원한다. 인간이 지식을 구할 때는 알라께서는 그가 이 지식의 열매를 지상에 대한 그릇된 독재로 사용하지 않기를 원한다. 인간은 줄리안 헉슬리가 Man in the Modern World에서 주장한 것처럼 단순히 무지나 무능 때문에 그가 하느님께 귀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헉슬리에 따르면, 인간이 지식을 얻고 환경을 지배하게 되면 그는 하느님께 반역하여 그 자신의 신을 만든다. 그와는 반대로, 인간은 더 많이 배울수록 하느님과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그분의 노복 가운데 박식한 자들만이 하느님을 믿는다.” (XXXV: 28)
인간은 하느님께 그에게 더 많은 지식을 줄 것을 기도한다:
“오 나의 주여. 저의 지식을 키워 주십시오.” (Taha 114)

따라서 그가 지식을 구하고 있을 때조차도, 인간은 그의 마음속으로 항상 알라를 생각하고 있다. 그는 과학의 열매를 사용함에 있어, 그가 그분께 기도를 바칠 때 알라에 대하여 품었던 것과 똑같은 확신과 보증으로, 올바른 방향으로 그의 삶을 인도할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이슬람은 종교와 과학 및 배움 사이의 통일을, 종교와 생활 사이의 통일과 마찬가지로 이루었다.

유럽에서는 종교 자체에 고유하지 않은 특정한 환경을 통해 삶이 종교의 영역에서 축출되었다. 서구인은 종교를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영적 관계로 생각하며, 삶은 하느님과는 상관없는 인간의 노력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서구에서 고안된 것이지 하느님에 의해 계시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개념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라”라는 메시아의 말에 의해 지지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알라께서 천상과 지상의 주인이며, 카이사르와 모든 인간은 알라의 심판에 굴복해야 한다는 데에 따른 신앙의 전체적인 개념과 모순된다. 이 말씀은 메시아가 그의 추종자들에게 카이사르에게 전쟁을 선포하지는 말되, 알라께서 계시하신 것을 실시하고 카이사르 자신을 알라의 심판에 복종시킬 국가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그가 요구하는 세금을 낼 것을 충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슬람에도 동일한 사례가 있다. 알라께서 메카의 무슬림들에게 무슬림 국가가 건설되기 전에 말씀하셨다:

“싸움을 멈추고, 충실히 섬기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몫을 내어라.” (IV. 77)

어떤 무슬림도, 이 말씀을 종교가 인간과 알라 사이의 단순히 영적인 관계이며 삶의 일상사는 카이사르나 다른 비신자들에 의해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지배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이 말씀은 일정 기간만을 위한 것이었고, 이어서 무슬림 사회와 무슬림 국가의 건설이 이루어져 온전히 알라의 심판에 따르는 삶이 이루어졌다. 아울러 삶의 모든 국면을 지배하는 세세한 입법이 계시되었다.

이러한 서구에서의 종교에 대한 조망의 그릇된 해석의 결과로, 삶은 점차 종교로부터 멀어져 현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종교의 영역으로부터 차단되었다. 정치가들은 거짓말, 기만, 위선, 부정직, 살생, 살인, 사기, 책략을 정당화시킨 마키아벨리의 원리를 추종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이슬람에서는 금지된 것들이었다. 경제는 이 또한 이슬람에 의해 금지된 고리대금 체제에 기반하였다. 사회적 관계는 올더스 헉슬리가 Texts and Pretexts에서 모든 사람이 그 자체로 섬이 되어 삶의 대양에 흩어진 다른 섬들과 아무런 소통을 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와 같이, 사회적 위선과 소름끼치는 고독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카렐은 타고난 법에 대한 위배는, 이러한 법들은 자연의 법 그 자체만큼 중대한 것이기 때문에, 가혹한 형벌이 없더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세계에 만연하는 혼란과 소동은 인간이 알라에 의해 만들어진 타고난 법을 어긴 데에 대한 무거운 대가이다. 인간의 본성을 아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바로 알라이다. 카렐이 정확하게 판단했듯이, 인간은 정말로 그의 본성에 대해 무지하다. 비록 그가 그를 둘러싼 우주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더라도, 그는 그 자신을 그의 정열과 욕망을 통해서만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자신에 대한 무지는 깊은 것이다. 알라만이 타고난 인간의 본성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는 인간에게 무엇이 적합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알고 있다. 그분께서 이 종교를 계시한 것은, 인간과 알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을 인도하기 위함이다. 간단하지만 원대한 방법으로, 이슬람은 종교와 삶의 관계를 확립하고, 이 관계를 내세도 포용할 수 있도록 확장한다.

이슬람은 종교의 올바른 개념을 제공한다. 종교는 믿음과 법이다. 믿음은 하느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지배하고, 법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일상사를 다스린다. 두 관계에서 우리는 모두 똑같은 하느님을 찾고 있으며, 우리는 하나의 을 섬긴다. 계시된 샤리아는 인간 활동의 전 영역과 아울러 평화시나 전쟁시의 국제 관계도 망라하고 있다. 따라서 정치학은 이슬람 정치학이 된다. 경제학은 이슬람 경제학이 되고, 사회 관계는 이슬람적 관계가 되며, 두 성간의 관계도 이슬람에 따라 맺어지며, 사상과 예술도 이슬람적 활동이 된다. 이슬람은 생의 전부를 포괄한다.

샤리아를 계시하신 알라께서는, 인간의 삶에 변하지 않는 요소들과 발전하고 변화하는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알라께서는 후자에 해당하는 것들이 인간이 자라나면서 굳어 버리거나 부실하게 자라나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새로운 환경에 맞추어 세부적으로 적용할 때는 법을 올바르게 해석함으로써 법 자체는 변하지 않으면서도 지속적인 변화를 가능케 하는, 알기 쉽고 변하지 않는 원리를 샤리아 속에 규정하였다. 이러한 법해석은 무슬림 학자들이 역사적으로 노력해 왔던 바이다. 이리하여 종교와 삶 사이에 일관된 상호 연결이 유지될 수 있다. 삶은 하나의 형태로 고착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의 발전이 종교적 전망과 모순되지도 않을 것이다. 칼리파 오마르 벤 압델 아지즈가 말했듯이, “사람들은 새로운 문제를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새로운 율법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현세와 내세가 통합되는 융합을 통해 가능하다. 종교와 삶의 이분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세와 내세를 분리하여 인지하도록 한다. 이렇게 분리된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두 종류의 전혀 연결되지 않은 일련의 행위들을 벌인다. 한 종류의 행위는 다른 종류의 행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슬람은 현세와 내세를 통합하고 그것들을 연속적인 과정으로 간주한다. 그 둘은 공히 하나의 과정을 이루니, 그 과정은 현세에서 시작하여 내세에서 끝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내려 주신 것(재화)을 가지고 내세의 집을 구할 것이며, 현세에서의 네 온당한 즐거움의 몫도 잊지 말아라.” (XXVIII. 77)
그리고:
“말하거니와, 누가 그분께서 그분의 종복을 위해서 만든 하느님의 아름다운 (선물)을, 삶을 유지하기 위한 (그분께서 내려 주시는) 깨끗하고 정갈한 것들을 금지했는가?
말하건대 그것들은, 현세의 삶에서는 믿는 자들을 위해 있는 것이고, 순수하게는 심판의 날에 그들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현세의 삶이나 내세 어느 하나에 배타적으로 연결된 행위는 하나도 없다; 행위의 목적은 항상 두 갈래이다. 예를 들어 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은, 사람들은 단순히 내세에 대한 배려에 의해 촉발된 행위로 생각하겠지만, 또한 현세에서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께서 꾸란에서 말씀하셨듯이, “기도는 수치스럽고 온당치 못한 행동을 억제한다.” (XXIX. 45). 기도는 현세의 삶 속에서 바치고, 내세에서 보상받을 것을 의도하는 것이다. 배타적으로 현세의 일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할 법한 성적 관계조차도, 무슬림의 의식 속에서는 내세와 연결되어 있다. 무함마드가 말하기를:

“그대들은 그대 부인과의 성교로 인하여 알라께 보상받을 것이다.”
그는 질문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는데, 어떻게 그것으로 인해 보상받을 수 있습니까?”
무함마드가 대답하였다:
“만약 그대들이 욕구를 금지된 방법으로 충족시킨다면, 그것으로 인해 벌받지 않겠는가?”
그들이 대답하였다:
“예, 벌받을 것입니다.”
그러자 무함마드가 말했다:
“만약 그대들이 정당한 방법으로 욕구를 충족시킨다면, 그대들은 반드시 보상받을 것이다.”

그 결과 현세와 내세는 이슬람 신자 개개인의 깨달음을 통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개개인이 하는 모든 일들에서 그는 드러난 알라의 뜻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기 위해 전념한다. 그가 세속적인 일들을 처리하는 동안 그의 마음은 내세에서의 신의 보답을 갈망한다.

이렇게 이슬람의 구조에서 완전한 종합이 이루어지는 것은, 이슬람에 관해 쓰고 있는 많은 동양문명학자들의 관심이 어떻게 고무되는가를 보면 명백히 드러난다. 영국의 동양문명학자인 깁(Gibb)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전체 사회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사회의 종류는 근본적으로 우주의 성질과 목적과 이것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영혼의 위치와 같은 것에 대한 믿음에 기반한다. 이것은 충분히 친근한 교의이고, 크리스챤 설교단에서 주마다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은 이러한 원리 위에 사회를 건설할 목적을 시종일관 가지고 있던 아마도 유일한 지역이다. 이 목적을 위한 주된 도구는 법이었다.

캐나다의 동방문명학자 윌프레드 칸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관찰자들은 이슬람 공동체의 최고의 위치에 주목해 왔다. 동적 공동체라는 사실이 이슬람 역사에서 갖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신경을 덜 써 왔다. 이슬람 사회는 상당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고, 충성심과 성원들간의 유대가 강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많은 사람이 그 사회는 단순한 사회적 조직만은 아니고, 종교적 모체라고 인식해 오고 있다; 서구의 부적절한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교회와 국가’는 하나이다. 말했듯이,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 멀리 나갈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구심성을 주장하기 위해 그런 사실들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들이 처음에 개인적 차원의 종교에 대해 강조했던 것을 부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이 사회는 개인적 신앙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것을 지향하여 구성되어 있다. 무슬림 사회는 단지 (다른 사회들처럼) 공통된 충성심과 전통으로 서로를 구속하는 것만이 아니라, 매우 세심하게 구성된 가치와 믿음의 체계로써 구속한다. 이것은 단지 至高의 이상의 산물만은 아니다. 이것은 깊이 간직된 지극히 개인적인 신념, 즉 개개인의 성원에 대한 뜨겁고 의미 있는 종교적 신념의 생동감으로 박동한다. 우리는 이런 사회, 이런 공동체는 ‘종교적’이라는 말을 앞서 말한 개인적 의미에서 사용한다면, 종교적 理想의 표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종종, 특히 크리스찬들의 신조 또는 신학 상의 체계가 개인적 신앙이 지적 형태로 표현되는 것임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질서와 그 활동은 무슬림의 개인적 신앙이 실제적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다.”

숭배의 단일성과 신의 유일성의 표현으로서의 이러한 종합은 이슬람에서 가장 소중하다. 이것이 “알라 이외의 은 없다”는 샤하다의 진짜 의미이다. 그것은 이슬람이 이 시대에 인류에게, 자신의 이론적인 개념에 있어서나 실제적 행위에 있어서나 통합시켜 주는 요소가 없기 때문에 정념으로 고통받고, 당황하고, 혼란스러워 하는 인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종교의 새로운 징후에 대해 이슬람이 장차 기여할 수 있는 바에 대한 토인비의 논의는, 그가 이러한 의미를 알고 있었든 모르고 있었든 간에 불확실해 보인다. 그중 어떤 경우이거나, 이러한 의미는 토인비와 다른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종교의 새로운 얼굴’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에 의해 인류에게 계시된 종교의 참된 의미이다. 14세기 전 이슬람에서 실현되고, 장기간 그리고 세계의 광대한 지역에 걸친 구체적인 방식으로 공식화된 의미이다.

이슬람은 이 세상을 여행하고 있는 사람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짓누르고 있는 본유적인 질문들에 대답해 줌으로써, 우리에게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생의 길잡이를 주었다. 인간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지구상에서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 인간의 힘의 한계는 어디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죽은 뒤에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계획해야 하나? 이런 질문은 대답이 필요한 것이다. 만약 어떤 결정적이고 확신에 찬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경우, 그리고 대답이 옳은 것이 아닌 경우, 그것은 여지없이 인간의 심리학적 안정과 그의 행동에 영향을 줄 것이다. 인간은 위기에 처할 것이다. 현재 세계의 상황은 이런 위기의 정도의 가장 명백한 예가 된다: 현대인의 현재의 행동보다 더 필요한 증거는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간단한 질문이지만, 현대인은 그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워하고, 그 대답도 진실과는 동떨어진 것들이다. 사람은 다윈이 말한 바와 같이 동물인가, 아니면 인간인가? 그는 줄리안 헉슬리가 묘사한 것과 같은 인가? 인간은 Man makes Himself 라는 책에서 주장한 대로, 그의 창조주와 마찬가지로 혼자 설 수 있는가? 그는 다른 교의나 사상에서 이해하는 것처럼 노예인가? 만약 그렇다면, 무엇의 노예인가? 유물사관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착취계급의 노예인가, 자신의 육체와 욕망의 노예인가, 또는 기술이 진보하는 결과로서의 기계의 노예인가? 인간의 잠재력이란 무엇인가? 그는 단순히 육체와 이성으로 이루어졌는가, 아니면 영혼도 아울러 지니고 있는가? 이성의 한계는 어디인가? 그는 이성만 가지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가? 그가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어떠한가? 그는 그것들을 무시하는가, 또는 마지못해 복종하는가? 인간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지상에서의 한정된 삶의 끝은 모든 것의 종말인가, 아니면 지속되는 어떤 형태가 있는가? 인간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가능한 한 많은 물질적 즐거움을 얻는 것인가, 또는 어떤 다른 목적이 있는가? 어떤 종류의 다른 목적인가? 자연을 통제하고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것인가? (또는 혹시 다른 사람들과 협동하는 것인가?) 그러면 무엇에 쓰기 위해서 통제하는가? 다른 사람을 노예처럼 부리기 위해서? 파괴하기 위해서? 아니면 단순히 우리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인가? 설사, 반면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협동하기 위해서 그들을 통제하기를 원한다고 해도, 똑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무엇 때문에 협동할 것인가? 질문들은 끝이 없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누가 인간에게 던져질 질문을 결정할 것인가? 철학자, 정치가, 독재자, 군중, 젊은이, 늙은이인가? 아니면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개개인이 자신을 위한 질문을 결정해야 하는가? 분명히 이 모든 질문과 더 많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인간이 지구상에서 영위할 삶의 종류와 인간의 행위를 결정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대의 인류는 다양한 대답을 제시해 왔다. 대부분 그 대답들은 그릇된 것이거나 현혹시키는 것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인류에게 물질적 번영과 아울러 영적인 행복을 가져다 줄 과학과 기술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전례 없는 소란과 혼돈, 그리고 인류의 대다수를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이다.

이슬람은 인류에게 그의 인생 역정을 위한 올바른 길잡이와, 그의 끊임없는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을 제공한다. 따라서 확신을 가지고, 소망과 생각과 감정의 완벽한 조화 안에서 인간은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에 착수할 수 있게 된다. 이슬람에서의 인간은 단순히 인간이다. 그는―헉슬리와 다윈이 제각각 주장했던 두 극단인―신도 아니며 짐승도 아니다. 그의 역할은 지구상에서 대리인이 되는 것이다; 지상에서 알라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다. 알라는 인간에게 이 역할에 필요한 재능과 능력을 내리셨다. 그 능력들 가운데, 배우는 능력, 정의의 길과 악의 길을 알아보고 구별하는 능력, 그리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하고 추구하는 능력이 있다. 인간의 행동이 도덕적 가치를 획득하는 것은 바로 이 능력 때문이다. 인간은 도덕적 가치가 없이 살아서는 안되며, 살수도 없다. 도덕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 인간의 행동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도덕이 정치, 과학, 또는 성적 관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도덕과 아무 관계가 없는 단 하나의 행동은 짐승의 행동이다: 짐승에게는 선택이란 것이 없다. 반면 인간에게는 양자택일의 행동 방향이 열려 있고, 그는 둘 중 하나를 따라갈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의 모든 행동은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 만약 그가 도덕적 선택을 포기하고 짐승과 같이 행동한다면, 고통과 당황을 통해서 그의 행동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우리는 알라의 뜻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다. 우리는 결국 알라께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부활의 날, 알라께서는 우리가 현세의 삶에서 무엇을 했는가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알라의 길과 그분의 계시를 따른 사람은, 뒷날 알라낙원을 보게 될 것이다. 불신자들은 지옥에서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인도가 네게 확실히 전해졌다면, 나의 인도를 따르는 자는 누구나 고통받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거부하고, 우리의 계시를 거짓으로 전하는 자들은 지옥으로 갈 것이며 그곳에 머물 것이다. (Ⅱ. 38-39).
진실로 인간의 의무는 알라를 숭배하는 것이다:
“나는 신령과 인간을 단지 만들었을 뿐이고, 그들이 나를 떠받든다.”(LI. 56).
위에서 의미하는 숭배는 특별한 행위뿐 만 아니라 인간이 행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하는 것으로써 이미 정해진 것이다: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나의 기도와 나의 희생과 나의 인생 그리고 죽음까지 세상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신의 위한 것이다. 어떠한 동반자도 그를 대신할 수 없다.” (VI. 163-164).
알라의 뜻을 따른다면 모든 행위는 숭배의 그것이 된다.

인간 본성이 따라야 하는 길이 알라의 길이다. 왜냐하면 알라는 신이고 인간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창조주이고 인간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알라는 전지전능하시고 인간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스스로 법을 만들었다면 어디에 있든지 간에 해악을 입을 것이며 무질서와 혼돈의 나락으로 빠질 것이다. 인간은 샤리아만을 따라 알라만을 섬긴다면 진정으로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다. 소수의 사람들이 다른 이의 지배자로 남아 있는 한 인간이 만든 자유와 평등에 대한 모든 외침은 신성함이 부재한 환상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은 유물사관과 일치할 수도 있다. 소유하는 자가 지배자일 것이고, 그렇다면 다른 모든 이들은 그의 노예일 것이다. 예를 들면 봉건 제후가 지배자이고, 농민은 노예이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공산주의 국가가 지배를 하고 모든 국민들은 노예가 되며, 생존의 유일한 근원으로써 국가에 예속된다. 그러나 알라가 샤리아를 통해 다스린다면 모든 인간은 알라에게만 복종하게 되고 그 복종 속에서 평등할 것이다. 즉 서로 자유로움 속에서 평등을 누릴 것이다.(vis-a-vis)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어떠한 인간에 의해서도 만들어지지 않은 샤리아에 따라 다스려지며 아무도 다른 것의 희생을 통하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그것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여행 도중 보호의 유형을 찾아낼 때 그는 즉시 자신 앞의 이정표를 발견할 것이며 이 길을 따를 것이다. 그 때 인간의 정신은 혼란의 나락으로 빠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당황함을 겪지 않을 것이다; 그의 발걸음은 확고하며 안정적일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욕되게 해서는 아니된다. 그는 알라에 의하여 존경되어질 것이며 비천하게 굴거나 자신의 위엄을 실추시켜서는 아니된다.

“우리는 아담의 아들들을 존경한다; 그들에게 육해상로를 제공했고; 생존을 위하여 선하며 순수한 것들을 제공하였고; 창조의 커다란 부분 이상으로 그들에게 특별한 호의를 제공하였다.” (XVII: 70).
한편으로는 인간은 자신을 현재의 모습보다 더 위대하게 여겨서는 아니되며 교만이 지나쳐서 신에 대한 숭배에 등을 돌리면 아니된다.
“아니, 그러나 인간은 죄를 범하였다. 그 안에서 스스로를 오만하게 바라보았다. 정말로 당신의 신에게 돌아가야 한다.”(XCVI. 6-8).

인간은 인생이 반복될 수 없는 기회이며, 감각적 즐거움에 과하게 탐닉할 수밖에 없다고 느껴서는 안된다. 그는 알라가 인정하는 이성적인 부분까지 즐겨야 하며, 알라의 인정함이 없이 추구하고 있는 과도한 즐거움은 선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알라는 인간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한 즐거움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는데 방해를 하지 않고, 동물의 수준까지 인간의 위엄을 떨어뜨릴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이러한 과함을 금지하였다. 게다가 알라에게 순종하면서 일생 동안 포기를 한 모든 과도한 즐거움은 몇 배로 보상이 될 것이다. 인간은 맑은 시각과 안목을 갖고 살아 있는 동안 역할을 이행해야 한다. 그는, 인간의 존재라는 궁극적인 목적이 지구상에 신성한 정의를 확립함으로써만 이루어지고 알라를 믿고 그의 길을 따름으로써만 성취될 수 있다는 사실을 등한시한 채로, 정신 세계를 침식해 가면서 물질 세계를 구축하여서는 아니되며, 그 자체를 목적으로 물질적인 유용성을 창출해서도 안된다. 인간에게 신성함과 숭배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준 후에 이러한 개념을 설명해 줌으로써 이슬람은 인간이 어둠에서 몸부림칠 때 보호를 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에 제기했던 지점(간단히 말하자면 인간의 삶에서 안정과 변화에 관한 질문)으로 돌아간다. 다윈주의는 서구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것에 의하면 인간의 삶에서, 더 나아가 전 우주에 영구 불변한 요소는 없다. 어떠한 가치 체계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영구 불변한 것으로써의 도덕이나 종교 같은 것들은 사고에 있어서 비과학적인 방법이며 없어져야 할 저해 요소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럽에서 지엽적이고 특정한 상황과 과학, 종교, 지식 그리고 다른 인간의 행위 사이의 야기된 충돌 밖에서 그것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이 비과학적인 인간의 삶속에서 영구 불변한 가치들을 극단적으로 배격하며, 감정적이거나 역사적인 요소와 결부시키지 않고서 주의 깊은 과학적 연구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깨닫는다.

인간들의 삶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인 일면들은 인간의 이성과 우주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에 의하여 변화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끊임없이 우주의 신비에 관한 지식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지식은 인간의 힘으로 자원을 이용하는데 사용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이 인간의 삶 속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와 관련이 있는가? 예를 들면 무엇이 알라를 숭배하는 일과 관련이 있는가? 이러한 숭배의 필요성은 알라는 인류를 포함하여 이 세상의 창조주라는 사실로부터 도출되어진다. 원자와 분자를 쪼개거나 달, 별 혹은 다른 행성으로 로켓을 보내는 등의 물질의 특성에 대한 인간의 발견이 어떻게 이러한 필연적인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인간이 우주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우주의 자원을 이용했을 때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와 그의 신에 대한 반란에 관한 이야기는 신화이지 과학이 아니다.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비과학적인 이야기에 좌지우지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이 알라보다 자신을 더욱 잘 알고, 필요한 것에 관하여 더 안다고 말하는 것은 또한 연구라는 과학적 정신이 부족한 감정적인 얘기이다. 또다시 이것은 중세 유럽의 그 상황의 결과이다. 그 상황이란 성직자가 사람들로 하여금 전제정치가 관례화된 교회의 신을 포기하도록 하고, 교회, 성직자, 어떠한 종류의 강압 아래에도 사람들을 놓지 않는 또다른 신―자연 또는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을 창조하도록 만듦으로써 신의 이름으로 전제정치를 하였던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유럽에 있어서 특별한 경우였고, 보편적인 사실이라거나 과학적인 사실은 아니었다.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특정한 역사적, 지리학적인 근거로부터 도출된 개념을 고수하고 그것을 삶의 바탕이 되어야 하는 영구적이면서 보편적인 진실로 바꿀 수 있는가?

인간의 삶속에서 가치들의 존재는 객관적이며, 인간이 갖고 있는 그에게 열려져 있는 하나의 과정보다 더많은 사실로부터 도출된다; 선택할 수 있고 특정한 과정에 전념할 수 있다. 이것이 어떻게 우주의 비밀에 대한 인간의 발견에 의하여, 자원의 이용에 의하여 바뀔 수 있는가? 인간의 삶으로부터 도덕적 가치를 폐지하는 것은―동물 혹은 기계의 수준으로 퇴보하는 것을 의미한다―인간의 일부분에 있어서 절대적인 수동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비과학적인 개념에 근거를 둔다. 프로이드가 제창한 심리학적 결정론이나 심리적 분석에 관하여 얘기를 하거나 역사유물론자들이 근거를 두고 있는 경제적 결정론을 말하든 이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프로이드는 심리학적 결정론이 토대로 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자그마한 과학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마르크스에 의하여 심화된 경제적 결정론의 측면에서 영국은 유럽에서 제일 처음으로 공산화가 되었어야 한다. 영국은 아직도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며, 지구상에서 가장 큰 공산사회인 러시아와 중국은 봉건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바뀌었다. 도덕적 가치가 영원하지 않고, 그것들은 물질적인 발전과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즉 인간의 천성은 과학적 발전에 따라 발달한다는 가정을 근거로 한다. 이것에 대한 증거는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음식, 물, 옷, 주거, 섹스, 재산의 소유, 자신의 주장에 관한 인간의 지배적인 본능적 동기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것들의 형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크게 발전한다고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누가 과학적인 근거로 그것들의 본질이 변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도덕적 가치는 형태가 아니라 본질과 관련되어 있다. 비록 인간의 활동의 형태가 변하지만 이러한 활동과 관련된 도덕적 가치는 변할 수 없다; 그것들은 영원성으로 인하여 세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인간의 활동 형태를 지속적으로 결정한다. 도덕적 가치들의 영원성은 형태의 변화를 막는 것은 아니며, 또한 형태의 변화들이 본질의 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도덕적 가치들을 영원의 영역에서 그것들을 유용한 과학적 근거 없이 변화의 영역에 집어넣었을 때 인간은 일시적으로 타락하였다. 이러한 예 중에서 가장 악명 높은 것은 종교와 도덕성을 진화라는 맥락 안에 집어넣은 것이었고 인간의 행동이 도덕성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의 설명은 인간의 성적 행동이 순수하게 생물학적인 기능이기 때문에 도덕의 영역밖에 남아 있다는 주장이다. 낯선 주장이며, 그것을 진화의 과정 탓으로 돌리는 것은 한층 더 낯선 주장이다. 도덕성과 무관한 생물학적인 관계로써의 섹스는 몇 백만년동안 사실 동물의 세계에 존재해 왔다. 인간을 몇 백만년 퇴보하게 하여 동물의 상태가 되게 한 그것은 어떠한 종류의 변화란 말인가? 어떠한 과학정신(다윈주의 혹은 다른 이론들)이 개념과 그것의 결과적 행동이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인가? 이슬람은 우리들에게 이러한 화제에 대한 결정적인 판단력을 제공한다. 이슬람은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과학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발전해야 하지만, 발전하고 있는 가운데 우주, 인생, 인간을 창조한 알라와 관련된 영구 불변한 사실들로부터 도출된 변함없는 가치들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인생은 움직임 속에서 균형을 맞출 것이다. 그것은 어느 한 지점에 멈추지도 않을 것이며, 비이성적으로 스스로를 파괴하는 길로 들어서지도 않을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주요한 개념들―신성과 숭배의 단일성, 인간의 일생에 걸친 길잡이, 인간의 삶 속에서 무엇이 영구하며, 무엇이 변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인간에게 제공함으로써 이슬람은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무질서와 혼란의 원인이 되고 있는 주요한 문제들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올곧은 개념을 재확립함으로써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이슬람은 일상생활의 문제점들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불행히도 이 장에서 이러한 해결책들을 상세히 다룰 시간이 없다. 이 책의 여기저기에서 해결책의 분명한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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