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의 이슬람 부흥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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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레이시아의 이슬람 부흥운동 - 대학의 ‘닥꽈(dakwah)’ 운동[ | ]

2 # 이슬람 부흥운동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 ]

이슬람 부흥운동은 금세기 후반 모든 이슬람 국가에 공통된 현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금세기 후반을 이슬람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종교의 부흥기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 느끼는 ‘이슬람 근본주의’나 ‘이슬람 부흥운동’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러한 ‘영적 부흥’ 이상의 것이다.

우연히도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은 제3세계라고 불리게 된 범주에 속한다. 이 나라들은 과거 직접 또는 간접으로 서구의 식민지 권력의 지배를 받았다. 오늘날에도 이 나라들은 경제개발이나 지배자들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서, 이전에 식민지를 지배했던 권력들에 이런저런 경로로 의존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서구 세계의 이슬람觀은 근본적으로 ‘천막과 부족’의 이미지이다. 이 관점은 많은 ‘동방학자’ 들에 의해 널리 전파되어 일반인들의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관점을 형성했다. 마찬가지로 서구 세계의 매체에 의해 빚어진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용어 또한 뿌리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아랍과 이슬람을 그 안에 끼워 맞추는 관점을 제공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서구 세계의 시각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서방의) 아랍과 이슬람에 대한 가장 간단한 인식조차도 귀에 거슬릴 정도로 정치화시키는 데에 기여한 것이 세 가지 있다: 첫째, 동양학(orientalism)의 역사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서방세계에 만연한 反아랍 反이슬람의 편견의 역사; 둘째, 아랍과 이스라엘 시온주의 사이의 투쟁, 그리고 미국의 유태인들과 아울러 자유주의 문화와 일반 대중에게 그것이 미치는 영향; 셋째, 아랍이나 이슬람을 정의하거나 냉정하게 논의할 수 있게 하는 문화적 입장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 나아가서, 현재 중동을 규정짓는 것은 강대국 외교, 석유 경제,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민주적인 이스라엘과 사악하고 전체주의적인 테러집단 아랍이라는 이분법이므로, 중동(즉 ‘무슬림 세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말하는 이가 화제에 대한 명확한 관점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두 말할 나위 없이 매우 기대하기 힘들다.”

‘이슬람 부흥운동’을 바라보는 이러한 서구인의 관점은 해방 이후 일관되게 서구화의 길을 걸어온 우리나라의 것이기도 하다. ‘이슬람’이라는 말에 한국의 서구화된 아시아인이 연상하는 것은 테러, 베일을 쓴 여성, 일부다처제, 오일 달러와 전쟁, 심지어는 ‘터키湯’ 따위의 것들이다. 이 관점을 견지하는 경우 ‘이슬람 부흥운동’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있는 그대로의 이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을 버리고 이슬람 부흥운동이 일어나는 사회를 선입견 없이 분석해야 한다. ‘이슬람 세계’가 단일한 실체가 아닌 것처럼, 이슬람 부흥운동 또한 하나가 아니며 그것이 어디에서 발생하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띤다. 그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과 갈등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모순과 갈등에 대해 어떤 해결책들이 제시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운동은 그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반영이며, 이슬람 부흥운동도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3 # 말레이시아의 상황[ | ]

이슬람 부흥운동이 일어나는 나라 중에서도 말레이시아는 특수한 경우에 속한다. 말레이시아만큼 빠르고 자발적으로 이슬람 운동이 확산된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수성은 인종적 요소가 경제적・사회적 이해관계와 얽혀 있는 말레이시아의 독특한 상황에 기인한다. 말레이시아 이슬람 부흥운동의 동력을 마련한 토양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Chandra Muzafar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된 요인을 들고 있다.

3.1 # 개발/근대화 이데올로기[ | ]

개발/근대화 이데올로기는 도시화-공업화된 사회를 지향한다. 이 사회는 또한 기계화된, 기계(와 같은 효율과 생산성)를 숭배하는 사회이다. 도시화-공업화된 사회에서는 인간의 삶 또한 기계적 특성을 띤다. 삶의 제반 국면들은 직장과 가정, 일과 여가와 같은 식의 이분법으로 규정되고, 통합성을 잃고 따로이 존재한다. 이것은 결국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분리시켜 영적 공허를 초래한다.

근대화의 이러한 문제에 대해 종교가 제시하는 처방은 ‘통일성의 회복’이다. “삶의 모든 국면에서 일관되게 하나의 신을 섬기는 것이 삶의 통일성의 회복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에 대해서, What Islam can Give to Humanity라는 글에서 Muhammad Qutb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기도문을 암송하거나 기도를 바칠 때 부르는 신은, 그가 공부할 때, 돈을 벌 때, 현세에서 더 나은 삶을 도모할 때, 먹을 때, 마실 때, 성교할 때, 마찬가지로 가족・타인・타공동체・타국・타민족들과 대화할 때, 그리고 전시에도 평화시에도 부르는 신과 동일한 신이다.

“예언자께서 말씀하셨다: 오! 나의 숭배와 나의 희생, 그리고 나의 삶과 나의 죽음은 세계의 주인이신 알라를 위해 있도다.” (꾸란 VI. 162).

숭배의 통일성은 현대의 탈선에 의해 조각조각났던, 인간의 자아와 삶의 여러 가지 측면을 통합해 준다. 그것은 영혼과 물질을, 육체와 정신을 통합한다. 그것은 종교와 과학을, 정신적 경건함과 물질적 발달을, 종교와 삶을 통합한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현세와 내세를 통합한다.

말레이시아는 독립 이후 급격한 도시화를 겪었으며, 신경제정책(NEP)으로 이것은 더욱 가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중산층이나 상류층이 도시 생활에 빨리 적응한 것과는 달리 농촌의 공동체적 생활과는 판이한 도시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도시 사회로 통합되지 못했던 이들이 의지한 것이 이슬람이었다. 이들은 신앙의 의무를 이전보다 한층 더 충실히 실천하면서 이슬람적 삶을 시도했다. 또한 무슬림 조직을 결성하여 그 안에서 자신의 무슬림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3.2 # 자본주의적 개발정책[ | ]

말레이시아에서 도시화-공업화된 사회의 건설은, 그것이 자본주의적 길을 따라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또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측면에서 이슬람 부흥운동의 토양을 마련했다.

첫째,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은 원천적으로 불평등한 것이기 때문에, 말레이시아의 경제개발은 빈부격차를 심화시켰다. 농업・석유산업・상업 분야에서 새로운 경제 엘리트들이 형성되는 반면, 무산계층은 경제발전에서 소외되었다. 대부분 말레이인이며 무슬림이었던 그들은 자신을 위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이념으로 이슬람을 선택했다. 말레이인에게 있어 이슬람의 목표는 정의이기 때문이다.

둘째, 자본주의의 발달은 또한 개인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문화를 말레이시아에 도입했다. 개인주의와 물질주의는 종교가 추구하는 바와는 본질적으로 상반되는 것이었으므로, 무슬림들의 이에 대한 반발 또한 심했다. 무슬림들은 서구의 근대사상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 인간의 물질적 측면에만 주목하여 인간으로서 바르게 사는 길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 중에서도 자본주의가 현 체제의 이데올로기인 만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었다.

셋째, 자본주의의 도입은 상류층의 생활 양식 또한 자본주의화했다. 서구화된 상류층은 퇴폐적이고 호화・사치스러운 생활을 아울러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많은 무슬림들에게 타락하고 탐욕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종교적 의무(이슬람 신앙의 5柱)의 불이행을 비롯해 특히 음주, 도박, 성적 문란 등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네째, 제국주의적 억압자로서의 서방 세계에 대한 반발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서구적인 것에 대한 반감’을 갖게 했고, 이슬람으로 새롭게 귀의하게끔 했다. 신식민지주의적 세계질서 아래에서 개발도상국들은 경제적・산업적・정신적・제도적 측면에서 서방 세계에 예속되어 있다. 이러한 제3세계 국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말레이시아에서 많은 사람들은 서방에의 예속상태를 비판했다. 말레이시아 무슬림들은 서방의 세속적 법・교육 제도의 도입을 비판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모더니즘, 민족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등 서구에서 발생한 모든 ‘-ism’을 비판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세속적인 서구적 사상과 방종한 서구적 문화는 모두 인간의 행복을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이슬람으로 인정되었다.

3.3 # 인종적 이분법[ | ]

다른 무슬림 국가들과 비교해 볼 때, 말레이시아만큼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여성이 이슬람 복식을 자발적으로 입은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점이 말레이시아 이슬람 부흥운동의 특성이며, 그 가장 중요한 배경이 말레이시아의 인종문제이다.

말레이시아는 인종적으로 선주민(Bumiputra)과 이주민(non-Bumiputra)으로 양분된 사회이다. 경제적으로는 非부미뿌뜨라, 특히 중국계가 상업과 산업분야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는 식민지시대부터 ‘노동의 종족적 분업’에 의해 말레이는 농촌 플란테이션에 종사했던 반면 중국인은 도시의 상업을 장악했기 때문에, ‘근대화된 공간’으로서의 도시에서 중국계는 줄곧 경제적 우위를 점해왔다. 독립 이후 말레이시아 사회의 운영에 있어 가장 큰 고려의 대상이 된 것이 바로 이러한 말레이계의 인구의 우위와 중국계의 경제력의 우위라는 모순이었다.

이러한 사회구조는 필연적으로 각 종족들로 하여금 정체성에 대한 집착을 갖게 한다. 정체성을 담보해주는 것은 언어・문화생활・종교인데, 1960년대까지는 정체성의 기준이 되는 것이 언어였다. 그러나 1969년 5월의 인종폭동 이후 말레이어 중심정책이 수립되어 말레이어가 사회적으로 널리 보급되자, Bumiputra나 non-Bumiputra나 다같이 말레이어를 쓰게 되면서 언어는 더 이상 정체성의 상징으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

언어가 정체성을 나타내지 못하게 된 시점에서 새롭게 정체성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이 종교, 특히 이슬람이다. 이슬람적 삶은 나날의 기도, 라마단, 출생, 결혼, 상속, 죽음에 대한 의례, 식생활, 의생활 등을 규정함으로써 非이슬람적 삶과 차별성을 갖는다. 모든 말레이인은 무슬림이었기 때문에, 이슬람은 부미뿌뜨라, 엄밀히 말하면 말레이의 정체성을 상징할 수 있었다. 이슬람을 통해 새롭게 Bumiputra/non-Bumiputra의 이분법은 배타적으로 재정립될 수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정체성 상징(identity symbol)을 도입하면서까지 인종적 이분법이 존속되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음 두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 인종적 이분법은 NEP의 실질적 수혜자인 중상류층 부미뿌뜨라의 이익을 담보해준다. NEP는 부미뿌뜨라의 경제적 지위 향상을 목표로 한 정책이었지만, 실제로는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지니고 있던 일부 말레이인의 경제적 지위가 향상되었을 뿐이었다. 이 중상류층 말레이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성장을 보장하는 NEP는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계속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NEP의 근거가 되는 Bumiputra/non-Bumiputra의 이분법 또한 존속・강화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NEP가 진행된 '70년대와 '80년대에 인종적 이분법은 전에 없이 강화되었다.

둘째, 도시화에 따른 이주민의 발생이 종교에 의한 인종적 구분을 강화하였다. 도시는 근대화 이데올로기에 의해 규정되던 공간이었으므로, 많은 이주민들은 非말레이, 非무슬림적 도시생활에 적응하는 것을 힘겨워 했다. 따라서 말레이계 이주민들은 자신을 도시 생활에 맞게 재정의하는 것보다, 사회에 만연하던 이분법에 따라 ‘인종적 써클’을 형성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그 이분법을 강화하기 위해 이슬람이 새로운 정체성 상징으로 채택된 것이다. 이슬람은 도시에 이주한 말레이인들의 인종적 울타리를 합리화시켜주었다.

인종문제가 종교문제와 얽혀들어가는 이러한 현상은 장차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이슬람의 근본교리는 인종 차별을 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종문제와 종교문제의 착종은 말레이시아의 이슬람 부흥운동에 배타성을 부여했다. 모든 말레이인은 무슬림이고, 부미뿌뜨라의 대다수도 무슬림이기 때문에, 말레이/非말레이, 부미뿌뜨라/非부미뿌뜨라라는 범주는 손쉽게 무슬림/非무슬림이라는 범주와 등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後述하겠지만, 이로 인한 종교적=인종적 배타성은 말레이시아 이슬람 부흥운동이 갖는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4 # 대학의 ‘닥꽈’ 운동의 출현[ | ]

4.1 # ‘닥꽈’의 출현[ | ]

말레이시아의 이슬람 부흥운동을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슬람 부흥운동의 최전선에 서서 대중적 운동으로 발전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대학생이었다. 대학생이 이슬람 부흥운동의 선두에 선 것은 1970년대 말레이시아 대학생의 특수한 존재조건에 기인한다.

말레이인의 지위 향상을 위한 신경제정책이 실시되면서 1970년에는 최초의 말레이어 대학교인 말레이시아 국립 대학이 설립되었고, 1971년부터 대학의 의학, 자연과학, 공학 등의 학과는 입학 정원의 일부가 말레이계에게 의무적으로 할당되었다. 정부는 수천명의 말레이 학생들을 도시와 영국을 비롯한 해외로 유학시켰다. 대다수가 농촌 출신으로, 역차별정책이 없었다면 대학에 입학하기 힘들었을 성적이었던 말레이 학생들은, 도시출신의 성적 좋고 영어에 능통한 非말레이 학생들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말레이 학생들에게는 낯선 도시에서의 대학 생활이 힘겨웠으며, 자연스럽게 고향에서 익숙해져 있던 종교적 분위기를 통해 안정을 얻고자 하였다.

말레이 대학생들이 이슬람으로 급속히 귀의하게 된 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비판적 견해도 있다. “1970년대의 새로운 말레이 대학생들은 역차별 정책 이전 시기의 학생들에 비해 영어 실력을 비롯한 전반적인 학력과 비판적・분석적 사고력이 뒤떨어졌으며, 따라서 자신감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자신감이 적었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친숙한 것들을 고수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즉, '70년대 말레이 대학생들에게 이슬람은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를 합리화하는 방패로서 반동적으로 기능했다.” (Chandra Muzafar, Isalmic Resurgence in Malaysia, 1987 pp 30-31.)

인종폭동 직후 말라야 대학교에서는 말레이 학생들의 주도로 말레이를 위한 정책을 펴지 않는 수상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이 기간에 학생들의 의식은 ‘말레이의 권리찾기’에서부터 말레이인의 빈곤함, 언어적 갈등, 말레이시아의 타락 등에 대한 문제제기로 발전했으며, 결국 말레이 학생들은 이슬람에서 그들의 대안을 찾고자 하였다.

안와르 이브라힘(Anwar Ibrahim)을 비롯한 초창기 이슬람 학생운동을 이끈 운동가들은 사회・경제적 정의의 실현을 이슬람의 이상과 접목시켰으며, 도덕적・영적으로 허약하고 정통성 없는 정부에 이슬람의 이름으로 비판을 시도했다. 안와르와 그의 동료들은 타국의 이슬람 부흥운동 지도자들의 책을 함께 탐독하고 번역하면서, 사회변혁의 원리로 ‘삶의 방식 ad-deen으로서의 이슬람’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그들은 곧 당시 사회주의자 그룹이 장악하고 있었던 PMUM (Persatuan Mahasiswa Universiti Malaya, 말라야 대학교 학생회)의 접수를 도모했다. 사회주의자 그룹은 반공주의자 그룹과 친정부 그룹의 반대에 의해 활동에 제약을 받았던 반면, 이슬람 그룹은 이슬람의 이름으로 사회적 이슈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말레이라면 누구나, 반공주의자 그룹이나 친정부 그룹으로서도, 반대하기 어렵다는 이점이 있었다.

PBMUM (Persatuan Bahasa Melayu Universiti Malaya, 말라야 대학교 말레이어 학생회)과 PMIUM (Persatuan Mahasiswa Islam Universiti Malaya, 말라야 대학교 이슬람 학생회) 두 조직을 장악한 안와르 그룹은, 이슬람의 길을 따르는 새로운 학생운동을 실행에 옮겼다. 그들은 신입생에 대한 구박, 할로윈 파티, 무도회와 같은 기존의 대학문화를 도덕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두 조직은 그들이 준비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을 통해서 신입생들을 자신의 지지층으로 만들었다. 오리엔테이션에서는 빈곤, 부패, 정부의 실정과 같은 사회주의자 그룹이 다뤄 오던 주제들이 이슬람의 이름으로 신입생들과 함께 토론되었다. 그 결과로 1972년 무렵에는 말라야 대학교에서 신입생 구박, 무도회, 할로윈 파티 등이 공식적으로 추방되었다. 1974년 새로이 건설된 이슬람 학생운동 조직인 ABIM (Angkatan Belia Islam Malaysia, 말레이시아 청년 무슬림 운동)의 영향 아래 있는 이슬람 그룹이 학생회에 당선되면서, 말레이계 학생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은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목도리를 두른 채 종교적 강론을 듣는 1주일 코스로 자리잡았다. 이 시기부터 이슬람 그룹은 ‘dakwah people’로 불리기 시작했다. ‘닥꽈’는 원래 ‘선교사업에 초대한다’는 의미이지만 말레이시아에서는 ‘무슬림을 더 나은 무슬림으로 만든다’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말레이인의 권리를 위한 투쟁도 이슬람의 구호 아래 조직되었다. 1968년부터 안와르 이브라힘의 주도로 PBMUM과 PMIUM은 GKK (Gerakan Kempen Kesedaran, 의식 고양 운동)를 시작했다. 대학과 사회의 밀접한 관계를 목표로 한 이 운동은 우리나라의 농활과 비슷한 것이었다. 방학중에 수백명의 학생들이 12일에서 두 달까지 농촌으로 내려가, 가난한 말레이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배우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공동체 사업을 벌였다.

대학 밖에서의 이슬람 운동을 위한 조직체도 만들어졌다. 1971년 ABIM은 젊은 무슬림을 위한 조직을 발주하였고, 같은 시기에 사설 중등 교육기관인 야야산 안다(Yayasan Anda)를 설립했다. 안와르를 비롯해 졸업 후에 정부기관이나 기업에서 일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이슬람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적은 보수를 받고 야야산 안다의 교사가 되었다. 야야산 안다에서는 정부가 정한 교과목 외에도 필수적으로 이슬람에 대한 강의를 들어야 했고, 강의실은 남/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야야산 안다의 첫번째 졸업생들 중에는 말라야 대학교 교정에 미니 텔레쿵(mini- telekung, 얼굴만 내보이도록 쓰는 가슴 또는 허리 길이의 두건)을 착용하고 나타난 최초의 여성들이 있었고, 이들은 곧 ‘dakwah girls’로 불리게 되었다.

ABIM에 의해 주도되던 이 시기의 이슬람 부흥운동은 ‘제1세대’ 이슬람 부흥운동으로 불린다. 이 시기에는 ‘이슬람 국가의 수립’과 같은 목표보다는, 개개인의 양심을 회복하고 사회에 대한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시각을 기르는 것이 중요시되었다. 제1세대 이슬람 운동가들은 ‘닥꽈’라는 용어도 그것이 지니는 보수주의적 의미때문에 가급적 쓰지 않고자 했다. 그들은 인간의 약한 면을 인정했으며, 따라서 모두에게 동등한 수준의 종교적 실천을 요구하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이후의 이슬람 부흥운동에 비해 온건한 모습을 보였다.

‘제1세대’ 이슬람 학생운동은 유연한 모습을 견지하면서도 정부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슬람 학생운동이 상대적으로 소수였으므로 정부는 이슬람 학생운동을 큰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따라서 대학법을 통한 학생운동의 탄압(아래 4-(2) 참조)은 사회주의자 그룹에 집중되었고, 결과적으로 이슬람 학생운동을 강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과거에 비해 한층 과격한 모습을 띠며 나타난 것이 1970년대 중・후반의 ‘제2세대’ 이슬람 부흥운동이다.

4.2 # 제2세대 닥꽈운동[ | ]

닥꽈운동의 ‘제2세대’는 1970년대 중・후반 영국 유학생들의 귀국과 함께 시작된다. 신경제정책의 일환으로 많은 말레이 대학생들과 학자 및 기술자들이 영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도시의 대학생활을 시작한 농촌 출신의 말레이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영국이라는 낯선 서구 세계에서 타자(他者) 또는 이방인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했다. 낯선 세계에서 이슬람은 언어적・문화적으로 동질적인 사람들을 서로 맺어주는 끈이 되었다.

말레이시아에서 ABIM의 온건한 노선에 의해 지도되는 이슬람 부흥운동이 자리를 잡아갈 무렵, 영국 유학생들은 과격한 노선으로 기울었다. 이것은 영국 유학생들이 이집트의 ‘이크환 무슬리민(Ikwhan Muslimin, 무슬림 형제단)’과 파키스탄의 ‘자마아티 이 이슬라미(Jamaati-i-Islami)’ 계열의 급진 사상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급진적 이슬람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은 Suara Islam(이슬람의 목소리)과 IRC (Islamic Representative Council, 이슬람 대표자 회의)의 두 단체가 결성된 이후이다.

당시 기존의 이슬람 운동 단체로서는 런던의 MISG(Malaysian Islamic Study Group, 말레이시아 이슬람 연구 모임)가 있었다. MISG는 닥꽈 운동 조직이라고 할 수는 없었고, 이슬람권 유학생들의 모임의 하부조직의 성격을 띠었다. 이슬람권 유학생 중 말레이인은 소수였기 때문에, 말레이 문제는 중요한 화제가 되지 못했고, 이것이 말레이 유학생들이 별도의 조직을 건설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MISG의 일부 멤버는, 수아라 이슬람이나 IRC가 건설되기 이전에도 대학 입학을 준비하기 위해 미리 영국에 보내진 17-18세의 고교생을 대상으로 자체적인 오리엔테이션을 가지고, 이슬람적 삶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Zainah Anwar, Islamic Revivalism in Malaysia. 1987. pp 26-27.)

두 단체는 모두 ‘이슬람 국가의 건립’을 목표로 하여 형성되었다.

Suara Islam과 IRC의 멤버는 모두 Brighton 지방의 유학생들로, 자마아티 이 이슬라미의 회원이었던 쟈베드 안사리 Javed Ansari의 영향을 받았다. 안사리는 자마아티 이 이슬라미의 전통적 가르침 뿐만 아니라, 모택동과 레닌의 사상을 함께 가르침으로써 학생들에게 이슬람의 급진적 독해를 전파했다. (참고문헌2, pp 26-27.)

단지 방법상의 차이가 있었는데, Suara Islam은 ‘이슬람 혁명 정당’을 건설하여 종국에는 이슬람 혁명을 통해 국가 권력을 접수함으로써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자는 입장이었던 반면, IRC는 수아라 이슬람의 정면대결 노선 대신 비합법 세포를 조직하여 기존의 사회조직에 침투시켜 교육 tarbiyah을 통해 이슬람 혁명을 준비하자는 입장이었다.

말레이시아 정부를 최초로 ‘불신자’라고 비판한 것이 영국의 유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은 이와 같은 제2세대 닥꽈 운동의 급진성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수아라 이슬람은 소식지 Suara Al-Islam을 통해 행정부는 이교도적 체계로, UMNO (United Malays National Organisation, 말레이시아 집권당인 국민전선 Barisan Nasional을 주도하는 말레이계 정당)는 세속적인 말레이 민족주의 정당으로, ABIM은 혁명의 의지가 없는 개혁주의자 그룹으로 각각 비판을 가했다. IRC 또한 자신들의 고유한 방법인 세포활동을 통해 지지층을 넓혀 갔다.

IRC의 이슬람에 대한 흑백논리(무슬림/非무슬림, 투사/불신자)가 대학 입학을 준비하거나 학부과정에 재학하는 자연과학도들에게 손쉽게 받아들여졌다는 주장도 있다. (Zainah Anwar, Islamic Revivalism in Malaysia. 1987. p 30.)

이들이 유학생활을 마치고 말레이시아로 돌아오면서, 말레이시아의 닥꽈 운동은 전투적인 신세대에 의해 주도되는 새로운 시기를 맞이했다. 급진적인 신세대 닥꽈 운동가들은 대학과 고등학교의 강단에 포진함으로써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여, 온건한 ABIM이 주도하던 이슬람 운동의 판세를 바꾸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것은 처음으로 정부와 기성세대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수상 후세인 온의 딸이 히자브(hijab, 온몸을 가리는 긴 외투)를 입고 귀국한 사건은, 닥꽈 운동이 농촌 출신의 학생들 뿐만 아니라 도시 출신의 상류층 젊은이들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졌음을 입증했다.

4.3 # 이후의 이슬람 학생운동 조직들과 PAS[ | ]

1986년 당시 말라야 대학교의 닥꽈 운동은 네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소위 이슬람 공화국(IR) 그룹, 다룰 아르캄(Darul Arqam), 자마아드 타블리히(Jamaat Tabligh), 그리고 ABIM이다.

Zainah Anwar, Islamic Revivalism in Malaysia. 1987. pp 32-43. ‘소위’ IR 그룹이라고 한 것은, IR은 학교 당국에서 붙인 명칭일 뿐 스스로 IR이라고 규정하는 학생들은 없기 때문이다. IR로 규정되는 학생들은 자신들을 단지 참된 무슬림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로 소개한다.

소위 IR 그룹은 PAS Parti Islam Se-Malaysia, 말레이계 제1야당으로 현 정부의 세속주의를 비판하며 이슬람 국가의 건설을 주장한다. 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으며, 1983년 PMIUM 선거에서 ABIM을 물리치고 학생회를 장악한 이후 닥꽈 운동에 한층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들의 목표는 세속적 시스템에 기초한 불신자들의 현 정부 대신 이란과 같이 이슬람 시스템에 기초한 새 정부와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다. 이들은 스포츠를 포함하여 남녀가 어울리는 모든 형태의 사회활동을 반대한다. IR 그룹은 PMIUM을 장악한 이후 세속적 문화행사를 조장하는 학교 당국과 마찰이 더욱 심해졌다.

다룰 아르캄 (‘아르캄의 집’이라는 뜻. 아르캄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첫번째 이슬람 혁명’을 계획할 때 은신처를 제공했던 예언자의 동료이다.) 운동은 1969년에 우스타즈 아쉬아리 무함마드에 의해 이슬람적 생활양식의 실현을 목표로 일어난 운동이다. 실천을 가장 중시하는 이 운동은 실제로 세 개의 이슬람 공동체, 30개의 이슬람 유치원, 14개의 이슬람 학교, 두 개의 대학, 한 개의 진료소, 그리고 몇몇 농장과 할랄 halal(깨끗한, 금지되지 않은) 식료품과 비누 등의 생필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슬람 공동체의 성원들은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고 공동 취사・공동 식사를 한다. 공동체에서 남녀는 엄격하게 분리되며, 여성은 외출할 때 검은 색이나 녹색의 푸르다(purdah, 얼굴을 가리는 베일)를 착용하고 남성은 특징적인 녹색 외투를 입으며 터번을 두르고 턱수염을 기른다. 다룰 아르캄 운동의 특성상, 다룰 아르캄 학생운동도 비정치적이다. 개인적으로 학생회에 참여하는 운동가는 있지만, 다룰 아르캄의 이름으로 학생회를 수권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자마아트 타블리히는 1대1 접촉과 선교를 목표로 하는 선교기구이다. 구성원들은 매달 며칠씩 선교사업을 해야 하며, 남자들만 있는 개방적이지 않은 조직이다. 따라서 영향력도 작은 편이다.

ABIM은 이슬람을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수단으로 생각하므로, 다른 닥꽈 그룹과 달리 의식을 부차적인 문제로 간주한다. 여성들은 히자브를 입지만, 남성들은 대개 서구식의 셔츠와 바지를 입는다. 이들은 모든 무슬림을 꾸란으로 돌아가게 하고 비무슬림에게는 이슬람 원리에 기초한 사회를 이해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며, 사회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각종 이슬람 제도의 수립을 요구한다.

ABIM은 1970년대에 지녔던 닥꽈 운동에 대한 지도력의 많은 부분을 상실했다. 가장 주된 요인은 조직의 창시자이자 지도자인 안와르 이브라힘이 UMNO에 ‘투항’하여 의회에 진출한 것이다.

안와르 이브라힘은 참고문헌이 쓰여질 1987년 당시 마하띠르 내각의 교육부 장관이었다. 그리고 1998년에는 마하띠르와의 갈등이 표면화되어 부패 및 동성애(이슬람 부흥운동의 지도자였던 인물에게 이보다 더 큰 정치적 타격을 주는 혐의도 없을 것이다) 혐의로 투옥되었고, 이는 안와르의 석방을 요구하는 거센 반정부 대중 운동을 촉발시켰다.

안와르는 새 수상 마하띠르와의 친분과 그의 이슬람화 정책에 대한 공감 때문에 입당했다고 밝혔지만, PAS에서 활동하던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연로한 당수의 후임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납득할 수 없었다. 그의 UMNO 입당은 이슬람 투쟁 대열로부터의 변절로 간주되었고, ABIM과 PAS가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믿었던 공조관계도 결렬되었다. 따라서 ABIM의 학원 내에서의 영향력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PAS 또한 내부적으로 변화를 겪었다. 1982년 말, ‘민족주의적’ 원로들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종교적으로 독실한 청년 급진주의자들이 일선으로 등장했다. 이후 PAS는 꾸란과 순나에 기초한 이슬람 국가의 건설을 전면에 내걸고, 이란과 같은 울라마(ulama, 이슬람 종교지도자)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며 울라마회의를 최고 정책 결정기관으로 삼았다.

5 # 닥꽈 교육과 학교의 대응[ | ]

5.1 # 이슬람으로의 ‘의식화’ 과정[ | ]

대학생이 ‘닥꽈’가 되는 가장 중요한 공간은 우슈라 ushra모임이다. 우슈라는 한국 학생운동의 학회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10명 이하의 학습・생활 공동체이다. 학교에서의 모임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회합은 학교 밖에서 열리며, 학습은 선배의 주도 하에 이슬람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이루어진다. 학습이 마무리되면 개인적 이야기가 화제에 오른다. 신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돈을 필요한 여러가지를 서로 도움받을 수도 있다. 어떤 우슈라 모임은 밤을 새워 기도모임의 형식으로 열리기도 한다.

대학에서 우슈라를 통해 맺어지는 인연은 매우 폭넓은 것이어서, 사람들은 동시에 친구로서, 학우로서, (기숙사를 쓰는 경우)이웃으로서, 말레이로서, 무슬림으로서 맺어진다. 우슈라는 이러한 소속감과 공동체의식으로 많은 사람들을 아우르는 반면, 어떤 이들에게는 제약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런 부담감은 복장과 여가에 대한 제한이 심한 여성에게서 특히 발견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모든 닥꽈 대학생들이 우슈라에 소속되는 것은 아니다.

닥꽈 운동은 학생회의 조직적 사업을 통해서도 전파된다. 말라야 대학교의 PMIUM은 학생들을 위한 두 가지 닥꽈 과정을 마련했다. 1학년 1학기가 끝나면 1주일 짜리 ‘이슬람의 기초’ 과정이 실시된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함께 먹고, 자고, 기도하면서 형제애를 느낀다. 외부 강사에 의한 강연도 준비되어 있다. 또 다른 과정은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2학년/3학년 학생들을 위한 ‘이슬람 리더쉽 트레이닝’이다. 이들은 매 방학마다 1주일씩 프로그램을 이수한다.

기숙사에서도 이슬람화 활동은 이루어진다. 이슬람화는 기숙사 자치회의 종교부서가 주로 담당하는데, 일몰 기도 후의 담화를 조직하거나 우슈라를 조직하거나 책이나 팜플렛을 파는 등의 일을 한다. 물론 기숙사에서의 ‘이슬람 의식화’는 기숙사 자치회를 운영하는 세력이 닥꽈인가 아닌가에 따라 달라진다. 닥꽈가 아닌 학생들이 기숙사 자치회를 운영하는 경우, 세속적인 댄스 파티 같은 것이 열리기도 한다.

5.2 # 당국의 학생운동 탄압[ | ]

1969년 인종폭동의 한 결과로, 1971년에는 대학법(Universities and University Colleges Act)이 제정되었다. 대학법은 학생이나 학생조직이 특정 정당이나 노통조합에 대한 지지나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대학 당국에게 학생조직을 임의로 해산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대학법의 공표 이후, 정치적 의사표현이 제한된 학생들은 의사표현이 가능한 단 하나의 길이었던 이슬람의 이름 아래 모여들었다.

1974년, 학생운동을 제약하는 법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기아와 빈곤을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ABIM 지도자 안와르 이브라힘을 비롯해 약 1,169명이 체포되었다. 이 중 많은 수가 정부장학금을 받던 학생이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1975년에는 모든 장학금 수혜자는 일체의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추가로 서약해야 했다. 그리고 1971년의 대학법이 추가로 개정되었다. 1975년 대학법은 대학생들이 일체의 기금을 모으거나 지니는 것을 금지했다. 모든 기금은 대학에서 관리했고, 포럼을 열거나 외부 연사를 초빙하거나 돈이 한 푼이라도 들어가는 등의 모든 행사는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 했다. 사전에 허가받지 않은 5인 이상의 회합이나 문서의 출판은 모두 금지되었다.

이 시점까지의 학생운동 탄압은 학생 시위에 촛점을 맞춘 것이었으나, 영국의 유학생 그룹의 귀환과 함께 닥꽈 운동에 대한 경계심이 일어난 뒤로는 닥꽈 운동이 주된 목표가 되었다.

말라야 대학교에서 표적이 된 것은 기숙사에서의 닥꽈 운동으로, 닥꽈 세력이 기숙사 자치회에 당선되는 것을 막기 위한 새로운 선거제도가 연구되었다. 그 결과 선거제도가 바뀌었는데, 이전에는 자치회의 각 직위에 대해 사생들이 한 표 씩 행사할 수 있었지만 제도 개정 이후에는 자치회의 주요한 네 직위, 즉 의장, 부의장, 서기, 회계에 대해서는 사생 한 명당 단 한 표씩만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는 기숙사 자치회의 요직을 모두 닥꽈가 차지했지만, 개정 제도의 시행 이후에는 非닥꽈, 특히 非말레이계 학생들이 네 개의 요직 가운데 당선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또한 닥꽈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기숙사 자치회 산하 소위원회의 개편도 이루어졌다. 소위원회는 학술, 체육, 친목, 기숙사 복지, 창조력 계발, 영적 계발의 6개로 개편되었다. 학생들은 6개 분야의 소위원회 활동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에 닥꽈 운동을 위한 시간과 공간은 제약받게 되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충실한 닥꽈 대학생은 종교적 신념과 반대되는 친목 소위원회 활동을 지속할 수 없게 되어 닥꽈 운동에 대해 또다른 제약을 안겼다.

대학 당국은 학생들에게 무이자로 10단 변속 자전거 구입 자금을 융자해 주면서까지 ‘세속적’ 활동들을 지원했으며, 非닥꽈 학생이 자치회장으로 당선되는 경우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외에 말라야 대학교 당국이 사용한 또다른 방법은 기숙사 입주권을 이용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교과외 활동 점수가 높을수록 기숙사를 배정받을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학교는 이것을 이용하여 ‘골칫덩이’ 닥꽈 학생들을 기숙사에서 내쫓는 방법을 쓰고 있다.

6 # 닥꽈 운동의 과제[ | ]

닥꽈는 역사적 실체가 되었다. 그것은 말레이시아에 혁신의 목소리로 작용했지만, 또한 여러 부작용을 끼쳤다. 때로는 닥꽈 운동은 혁신의 거죽을 쓰고 기득권층의 이익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닥꽈 운동이 말레이시아의 장래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려면 어떤 과제를 해결해야 할 것인가?

6.1 # 사회적 양극화[ | ]

닥꽈 운동이 남긴 결과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사회적 양극화이다. 말레이시아의 성(性)과 인종 사이의 사회적 소통은 그 어느때보다도 줄어들었다. 말레이 무슬림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중국인 친구가 요리한 음식도 먹지 않는다. 그 결과 중국인 친구를 사귀는 말레이인 또한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각종 음식과 생필품은 할랄(halal, 허용된 것)인지 하람(haram, 금지된 것)인지 명시해야 한다. 호텔에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을 위한 주방이 따로 설치되었다. 많은 닥꽈 운동가들에게 있어 행동의 규범은 “의심이 가거든 피하라”가 되었다.

이러한 인종적 양극화는 닥꽈 운동가들이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하면서 조금씩이나마 계속 확산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대학에서처럼 철저히 이슬람에 귀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닥꽈 출신들이 그들의 사무실이나 일상생활 주변을 재정의(redefine)함으로써, 결국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닥꽈적 이슬람에 의해 재정의되고 있다.

정부가 이슬람화를 부추기면서 더욱 만연되는 이러한 분위기는 중국계와 인도계 국민들에게 많은 근심을 던져주고 있다. 이들의 염려는 중국인/인도인 정체성에 대한 재정립이라는 반작용으로 나타난다. 非무슬림의 종교와 문화의 독창성과 뛰어남을 강조하기 위해서, 유명무실하거나 심지어는 사멸한 전통들이 되살아나고 있다. 불교도, 힌두교도, 기독교도들이 앞다투어 성대한 행사를 치르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종교가 강한 호소력을 가지기 때문에, 장기적 관점에서 종교적 양극화는 인종적 양극화보다 더욱 위험하다.

인종적 양극화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말레이인들의 양극화이다. 말레이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닥꽈운동이, ‘무슬림/속인(Muslim/secular)’이라는 이분법으로 인해 말레이를 분열시킬 위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무슬림/속인’ 또는 ‘무슬림/非무슬림’이분법은 표면적으로 PAS 지지자와 UMNO 지지자의 대립이다. 그것은 동시에 이슬람을 삶의 길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이슬람을 근대화의 걸림돌로 받아들이는 사람 사이의 대립이며, 또한 꾸란과 순나에 기초한 이슬람 국가의 이상을 지닌 사람과 이슬람 제도의 도입을 추진하는 사람 사이의 대립이다.

최근 말레이시아 경제가 침체되면서, 호황기에는 깨닫지 못했던 ‘무슬림/속인’의 이분법이 감추고 있던 대립이 드러났다. 그것은 부유한 말레이와 가난한 말레이 사이의 대립이다. NEP는 소수의 말레이 경제 엘리트를 길러냈을 뿐이고, 경제 엘리트들은 현상 유지를 위해 민중의 인종적/종교적 감수성을 자극해 왔다. 그러나 부유한 말레이가 인종적/종교적 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이용했던 무슬림/非무슬림 이분법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저항으로 인해 부유한 말레이를 ‘非무슬림’으로 규정했다. 이 이분법을 해소하는 근본적 방책은 말할 나위 없이 경제정의의 실현이다. 그러나 기득권층이 자신의 이익에 집착함으로써, 말레이시아의 복잡한 이데올로기 지형은 계속 배타적 이분법을 재생산하고 있다.

6.2 # 여성문제[ | ]

닥꽈 운동은 또한 여성에 대해 배려해야 한다. 물론 서구인의 ‘남녀평등’ 개념을 이슬람 세계에 기계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제국주의적 관점일 뿐이며, 여성의 복식에 대한 규정이 까다롭다고 해서 이슬람 세계가 여성을 억압한다는 이야기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꾸란이 쓰여진 사회와 오늘날의 말레이시아 사회는 같지 않기 때문에, 꾸란의 독해에 얽매여―그것도 보수적인 독해 방식에 얽매여―여성관을 정립하는 것 또한 올바르지 않다. 문제는 꾸란이 아니라, 그것이 보수적으로 독해된다는 것이다.

“나는, 너희가 서로 동등하니 남자이건 여자이건 너희들로부터의 어떤 일도 헛되지 않게 하리라.” (III. 195)

위와 같은 구절을 통해, 꾸란은 남자와 여자가 근본적으로 동등함을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이슬람 신학에서 전통적으로 남성은 여성에 비해 우월하다고 여겨져 왔다. 신학자들은 거의 이 문제에 대해 만장일치로 동의한다. 그들은 그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다음과 같은 꾸란의 구절을 인용한다: “남성은 여성에 대해 권위를 가진다. 왜냐하면 알라께서 남성을 여성보다 우월하게 만드셨으며, 남성이 여성들을 부양하기 위해 재산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고답적인 해석이다. 이 구절의 핵심어는 아랍어 카왐 qawwam 인데, 이것은 ‘권위 (authority)’, ‘보호자 (protector)’, ‘담당하는 (in charge)’, ‘부양자 (supporter)’ 등으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카왐의 해석에 따라, 이 구절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우월성을 확고히 하는 증거로 쓰일 수도 있고 쓰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심지어 카왐이 ‘권위 (authority)’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해도, 남성에게 이 권위가 주어진 까닭은 명백하다: 그들이 돈을 벌고 여성을 보살피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그렇게 하듯이, 여성이 역시 돈을 벌고 가족의 생계에 이바지한다면, 남성은 더 이상 여성에 대해 권위를 갖지 못한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우월성은 꾸란 신학으로 해결된 문제가 아니다. 일반적인 상황이 무엇이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또한, 꾸란에는 여성이 집 안에 있어야 한다거나 그들의 얼굴과 손을 가려야 한다고 규정하는 어떤 명시된 표현도 없다. 물론, 꾸란은 남편, 부모, 형제, 어린이 또는 성적 욕망을 지니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를 제외하고는, 여성들이 정숙한 복장으로 그들의 순결을 지킬 것과 장신구를 자랑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꾸란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그리고 예언자께서는 믿는 여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시선을 낮추고 정숙하게 행동하며, 장신구는 보이는 것만 착용하며, 베일을 뺨(일반적으로 믿듯이 얼굴이 아니라-필자) 위에 드리우며, 장신구를 내놓고 다니지 말 것이니, 단 다음 사람들은 예외이다: 그들의 남편, 아버지나 시아버지, 또는 아들이나 남편의 아들, 형제나 형제 자매의 아들, 또는 시녀나 노예, 거세한 남자 시종, 또는 여인의 나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

알라의 의도는 여성을 집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기품을 유지할 것과 도발적인 장신구를 공공연하게 자랑하지 않을 것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성적 착취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기품을 유지하고 정조를 지킨다면, 공적 영역에서 여성이 일하는 데에는 직업이 무엇이든지 아무런 제약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경우와 비교하여, 리비아의 카다피가 자국의 여성이 군에 입대할 것을 주장하는 근거를 검토한다면 흥미있을 것이다. 카다피는 심지어 제3세계의 여성을 종속시키는 것은 제국주의를 이롭게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모든 남성과 여성은 무기를 들어야 한다. 과학적이고 혁명적인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여성을 포함한 전 국민의 동원이 보증되었다. 과거의 예속과 여성 종속으로의 회귀란 없다… 우리가 서로를 마비시켜야 한다는 것은 제국주의의 이익에 부합하는 이야기이다. 만약 그 말에 따라 남성이 여성을 노예로 삼는다면, 그들은 아랍 국가가 결정적 국면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하는 효용과 역량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말레이시아에서 여성의 닥꽈 운동이 억압적인 방식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의 자율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특수성은 인정되어야 한다. 스스로를 정숙한 여인으로 재정의하려는 여성들의 노력이 갖는 반제국주의적 의미도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중요한 것은, 꾸란은 사회-정치적이고 사회-경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최종 판결을 내림으로써 그 이상의 발전을 향한 문을 닫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말레이 여성의 닥꽈 운동의 의의는 인정되어야 하지만, 그 의의를 꾸란 해석으로 뒷받침하려는 시도는 반동적 이슬람 부흥운동으로의 선회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닥꽈 운동은 교조적 여성관에 스스로 칼을 대야 한다.

6.3 # ‘이슬람 정신’의 복원[ | ]

“그리고 하느님이 아닌(다른) 것에 호소하고 있는 자들을 욕하지 말라…… (6:108)”

위의 꾸란 구절이 말해 주듯이, 이슬람은 원래 관용의 종교이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이슬람 부흥운동은 인종・경제・종교적 요인이 착종된 상황에서 원래의 관용을 잃고 배타성을 띠게 되었다. 흑백논리에 기반한 이러한 배타적 이슬람 부흥운동은 원래의 목적과는 달리 기득권을 보호하는 결과를 낳는다. 경제 엘리트들, 스스로를 ‘믿음의 수호자’로 자처하면서 대학 안에서 명성을 쌓으려는 학자들, 예배와 희사에 충실함으로써 비리를 은폐하는 정치가들, 끊임없이 ‘이슬람적인 것’과 ‘비이슬람적인 것’의 불필요한 구분을 발명해 냄으로써 자신을 사회 지도층으로 올려 놓으려는 종교 지도자들 등, ‘반동적 이슬람 부흥운동’을 통해 이익을 얻는 자들은 기득권 계층이다.

말레이시아의 이슬람 부흥운동이 원래의 목표인 경제・사회 정의의 실현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슬람 부흥운동 내부의 이러한 반동적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배타적이고 반동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아래와 같은 평등과 정의를 추구하는 이슬람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 닥꽈 운동은 현재의 문제들에서 벗어나 말레이시아의 정의를 위한 이념이 될 수 있다.

“오,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생명과 재산은 오늘과 같이, 이 달과 같이 지극히 신성하도다. 무지의 날들의 모든 악습과 관례, 과거의 이해와 관련된 모든 요구는 폐지된다… 그대들 아내들의 권리와 관련하여 알라를 두려워할지니라. 그대들은 알라의 보증으로 그녀들과 혼인하였고, 그의 법에 따라 합법적이 되었도다. 아내들은 그대들의 동반자이고 자신을 바쳐 그대들을 돕는자들이니 그녀들에게 옷과 음식을 제공해야 하며, 친절하고 관대히 대하라. 오, 사람들이여 들어라! 무슬림 한 사람 한 사람은 다른 무슬림 한 사람 한 사람의 형제이며, 모든 무슬림은 동포니라… 그러니 서로에게 불의를 행하지 말라. 오,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신은 한 분 뿐이고, 그대들의 조상도 한 사람이니 그대들은 모두 진흙으로 만들어진 아담의 후손들이니라. 그대들 가운데 신 앞에서 존경받을 자는 가장 신을 두려워하는 자이니라. 신앙심이 아니라면, 아랍인이 비아랍인보다 우월치 않고 비아랍인이 아랍인보다 우월치 않으며, 황인종이 흑인보다 우월치 않고 흑인이 황인종보다 우월치 않도다.”- ‘고별의 순례’에서 예언자 무함마드가 행한 마지막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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