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또역시 52화 ‘삼국통일’을 말한다Ⅰ - 닥치고 내 말 들어(고구려, 백제, 신라의 대변자들)

(20분 경) 지난주에 이어 고대사 특집으로 진행된다. 백년선생, 길항선생이 고구려사 전공을 하기 때문에 (다른 전공자들의) 반발이 많았다.

(25분 경) 다시 다뤄보는 7세기 동북아

논쟁은 잠깐 미루고, 일단 작년에 방송됐었던 백년의 백년전쟁이라는 주제로 나갔던 편에 대해서 하실 말씀들이 많다는 얘기들이 있어가지고, 얘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다들 방송 들으셨죠?

네. 길더라고요.

한분씩 돌아가면서 얘기를 좀 해보죠. 무엇이 마음에 안드나?

본인이 들었을 때 백년선생의 핵심은 무엇이었습니까?

백년선생은 설명식이었던 것 같아요. 강의의 느낌으로 본인이 생각하는 사관으로 지리했다. 어느정도는 사료에 있는 것 위주로 설명을 했던 것 같고, 통일에 관한 발언들 중에 백제통합에 관해서 통일에 관해서 꼭 비판을 하고 넘어간다던가 사실 저도 어느정도 동감이 되거든요.

당시에도 일통이라는 말을 썼었고, 그 뒤에 고려시대 조선시대까지도 비슷하다고 하다면 비슷하지만, 근대역사학 이후에는 통일이라는 키워드로 계속 다르게 활용하려고 했던 것은 맞죠. 어쨌든 신라당대 일통이라는 개념이 있었으니까, 본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 자체도 인정을 해 주어야 하지 않았까? 설령 그것이 인식 프로파간다라고 할지라도. 백년선생의 그런 것이 공감을 했다.

수사적인 것이라도 일통이라는 말이 있었으기 때문에,... 삼국통일이라는 관점과도 닿아 있을 수 있다.

지배층 위주라면 더욱더 그렇겠죠.

대체로 백년선생님 얘기를 들었을 때 크게 비판할 지점이 있다기 보다는 일반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는데, 삼초 선생님과 백년선생님이 말씀 안하신 부분이 일통이라는 부분에 그 일통은 백년전쟁처럼 긴 전쟁이었는데, 일통이라는 용어가 나온 시점이 언제인가가 중요할 것이다. 그것이 통일 문제와 관련해서, 중요할텐데, 일통이라는 단어는 7세기 말 전쟁 다 끝나고 나서 나중에 나온 얘기인거조 일통삼한이라는 말도, 그리고 일통삼한에서 삼한이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가르킨 것은 훨씬 후대다 예컨데 신라 하대에 가서야 나타났다는 견해들이 요새 많이 나오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럼 그 때 삼한은 무엇을 가르키다.

그러니까, 그때 삼한은 수사적 표현으로서 중국사람들이 한반도를 가르킬 때의 삼한, 예컨대 660년 소정방이 쓴,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소정방이 아직 고구려 멸망되기 전에 평삼한이라고 나오거든요. 그 때 고구려는 포함되지 안는 것. 삼한이라는 것이 신라 후대에 좀 바뀌었다. 전쟁당시에는 삼국통일이라는 인식이 없었을 수 있다.

에둘러 말하지 마시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죠. 사료로 보면 676년에 전쟁이 끝났다고 하지만, 끝날 시기 까지도 삼한일통했다거나 그런 인식이 보이지 않아요. 평백제 고구러 이런식으로 평정했다 이런 뜻이있죠.

백제통합이 더?

그래서 전 방송 들었을 때에도, 조금 유의해야 할 점이 통합이나 병합이라는 용어라 정벌 평정이라는 용어는 함의가 다르다고 봐요.

그 얘기도 나오기는 했어요. 그 때 백년선생은 정벌은 아니다 란 얘기를..

대상이 어디냐.

백제.

백제에 있어서는 통합일 수 있죠.

고구려는 정벌이다?

고구려는 정벌이기는 하지만 신라가 정벌했나요?

어쨌든 통합이라는 일통이라는 개념은 후대에 만들어지는 것이고,

어떤 연구자는 허위의식이라고 까지 표현하고요.

일통이라는 용어가 나오게 된 것이, 태종무열왕 시호가지고 중국이 시비를 걸 때, 신문왕 때 되어서, "니네 왜 태종이라는 시호를 쓰냐 쓰면 안 된다"고 하니까 "측천무후가." 그런 얘기를 해요. 그렇니까 답을 한 게 우리가 삼한을 일통하는 큰 업적을 세웠기 때문에 태종이라고 했다는 답변을 해요. 그것은 전쟁 끝나고 한참 지난 후인 거죠. 이때 처음 나오는 거죠.

거기에 더해야 할 것이, 고구려사 선생님 계시니까. 설인귀랑 나당전쟁 중에 글을 보내는 내용이 있어요. 김춘추 시기에 땅 협의를 해요. 평양 이남의 땅을 가져가겠다고 나오거든요. 그런데 평양이라는 것이 수도라고 할 수 없어요. 임진강 유역 한강 북쪽지역까지도 평양으로 불렸거든요.

그런데 워싱턴했을 때, 워싱턴DC 떠올리지 위싱턴주 떠올리지 않잖아요.

고구려를 쳤을 때도 성공할 가능성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제가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 첫번째 드는 생각은 신라가 고구려에 대해서 어느정도는 이걸 차지해야 되겠다, 적극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고구려까지를 하면 삼국을 정벌한 거고, 좀더 높게 평가한다면 통일까지 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고구려땅은 평양까지 간 것도 아니고, 신라가 황해도까지 간 것도 거의 8세기 뒤잖아요. 통일전쟁기 딱 7세기 때 신라는 북쪽을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놓고 봤을 때, 약간 생각이 다른게 두가지인데, 첫번째는 북진을 할려고 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은 있어요. 나당전쟁 초기 당이랑 싸울 때보면 압록강까지 가서 전투를 한다던가 한번에 불과하긴 했지만, 뒤에 임진강성이라던가 어떤 특정 성들은 지키려고 노력하는 게 보이거든요. 북쪽을 향해서, 그런 실질적인게 하나 있고, 두번째는 보장왕의 외손인가 안승

저도 비슷한 생각이에요. 신라 입장에서는 그런 인식을 할 수 있게 해 준 것이죠. 고구려까지 차지한 거나 다름없다.

근데 이제 신라 입장에서 활용한다고 하면 고구려 왕이다 고구려왕으로 책봉을 해주고,

서열 몇위였습니까?

멸망 전엔 보이지 않던.

철저히 신라의 입장에서.

어쨌든 넘어왔으니까 활용을 해야겠고, 그런 측면에선 일통이라는 것이 어쨌든. 활용하기 좋은 놈이 넘어온 거다. 후대에 만들어진다는 측면이 강한 것 아닌가요?

지배층에 있어서는 그런 면이 있었던 거죠.

신라가 지원을 한 사실 자체가 신라에게 고구려를 통합할 의지가 있었느냐 사실은 나중에 얘기해야 겠지만 당이 고구려를 포함해서 백제까지 내려와 있고, 평양이남 백제토지 주기로 했는데 안주고 하는 상태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신라가 지원하면서 당을 몰아내기 위해서 보덕국을 지원했다 그랬을 때 그것이 고구려까지 신라가 하나로 통합하려는 의지가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 의심스럽고 사실은 일통삼한이나 삼국통일이라던가 이런 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게 고대사에서 민족문제인데, 민족이라는 것이 언제 형성 되었느냐 이것을 지금 그시기로 잡고 있는 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교과서에도 실리고 우리민족이 형성된 걸로 서술하고 있는데. 삼국통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 이야기를 뒤로 미룹시다.

앞에 많이 얘기하셨는데 삼한얘기가 불만이었죠. 삼한이라는 용어 자체가 고구려신라백제로 대치가 된 것은 뒷시기거든요. 신라하대에 등장했다고하지만 중국 동이전 기록에서 삼한은 유지가 됐어요. 진한변한마한으로 되고 있다가 구당서쯤 들어와서 삼국으로 바뀌었다. 고구려까지 포함해서 삼한이라고 했다는 것은 억측이다.

삼초선생이 북으로 갈 의지가 있었다고 하셨지만 전 다른 생각. 나당전쟁기 이후에도 신라가 발행가 건국됐고 당하고 다시 친해지기 전까지 한강 이북 임진강 발해까지 가는 지역이 공지로 비어있었다 아무도 통치하지 않고 자유지대로 남아 있음. 신라가 진출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그곳은 자기가 원했던 땅도 아니고 당하고도 협의되지 않았다. 그러고 있다가 당과 친해진 후 당이 허락한 이후 패강진을 설치한다. 패강진은 가장 위쪽 지역인데. 그런 걸 봤을 때 신라가 고구려땅가지 먹고 싶을 정도 영토욕심이 있었느냐는 과대해석이 아닌가? 사료 그대로 보게 되면 그런 욕심은 없었고 어찌보면 백년선생 얘기와 비슷하다 필요없는 땅을 줬다 신라에겐 받으면 좋을 땅이었다.

정리하면 일통의 개념이 있었다. 삼한이라는 용어. 신라의 북진 의지가 있었는가.

(41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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