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식

1 장기수 김영식 선생 - 사람의 마음은 쇠사슬로 묶을 수 없으리[ | ]

1#28년만의 양심선언

  1. 강원도 이천으로부터 서대문 형무소로
       해방과 전쟁의 기억        당의 부름, 그리고 파선(破船)        서대문형무소에서
  1. ‘전향’, 전향 공작
       떡보이와 어머니 사랑 뭉둥이        “전향자”의 내면        전향, 그후
  1. “우리”나라에서
       막노동판에서          “우리”나라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

2 # 28년만의 양심선언[ | ]

관악구 낙성대에 있는 장기수 쉘터 '만남의 집'에 가서 김영식 선생을 만났다. 우리가 김 선생을 만나기로 한 것은 지난 1월 29일, 그가 전주에서 한 기자회견 내용을 보고나서였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1962년부터 88년까지 무려 26년간 옥살이를 했던 김영식 선생은 기자회견에서 “이제 나도 인간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70 고개를 눈앞에 둔 노인이 왜 “이제 나도 인간이 되었다”고 선언해야 했던가.

국보법 위반 혐의로 26년간 복역했던 장기수 김영식(67, 전주 거주) 씨가 자신의 전향을 철회하는 양심선언을 했다. 김씨의 전향철회는 지난 99년 정순택, 유연철 씨가 공개적으로 전향을 철회한 이후 처음이다. / 김씨는 29일 전주 고백교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의 조직적인 고문과 강압에 못 이겨 전향을 했다"며 "강제전향은 나의 의사가 아닌 고문에 의한 것이기에 전향취소를 명백히 선언한다"고 밝혔다. 덧붙여 김씨는 "세월도 화해의 길로 가는데 나만이 마음속에 응어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게 너무 괴로웠다"며 "이제라도 과거의 잘못을 벗고 안정된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밝히고 북송을 요구했다. - 인권운동사랑방 2001년 1월 30일(화)자 기사 http://www.sarangbang.or.kr/kr/haru/hrtoday/hr1781.html http://www.sarangbang.or.kr/kr/haru/hrtoday/hr1783.html

기사를 보고 나서 글귀 하나가 머리에 떠올랐다. “사람의 마음은 쇠사슬로 묶을 수 없으리.” 이는 소위 ‘재일교포학생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으로 19년간 비전향 장기수로 복역했던 서승 선생의 <옥중 19년>(역사비평, 1999)의 부제이기도 하다.

도대체 전향이란 무엇인가?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일제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은 전향정책을 대한민국 정부는 정치범들에게 왜 끝없이 강요했던가?

“사상전향은 국가권력에 대항한 사람이 국가사상에 동조하거나 국가권력에 복종할 것을 서약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의 내면에서 정신적 갈등 끝에 생긴 신조의 변화인 ‘회심’과 달리, 원래 ‘전향’에는 타인이나 사회의 압력을 의식해 외부세계를 향한 태도 표명을 전제로 하는 경향이 있다. 조사기관이나 감옥에서는 당연히 물리적-심리적 폭력으로 사상전향을 강제한다.- 서승, <옥중 19년>, 147면”

본질적으로 인간의 정신에 가해지는 폭력인 전향 제도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목숨을 건 싸우을 벌여왔다. 전향을 “공작(工作)”했던 대한민국의 정권들은 이 싸움에서 졌다.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서승 선생이나 작년 9월 북한으로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들의 경우에서 그러하다. 또한 고문과 강압에 못 이겨 마음에도 없는 전향서에 도장을 찍었다가 ‘마음 속의 응어리’를 벗기 위해 결국 그것을 철회해버린 김영식 선생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쇠사슬은 사람의 마음에 졌다. 무자비한 살인적 폭력(*1)과 갖은 회유로도 묶지도 꺾지도 못한 그 “마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김영식 선생: 그러니깐, 단 한가지는 그래. 이렇게 고생한 것도 그렇고 근본문제는 간단해. 복잡한 게 없어. 응, 정의와 진리. 진리가 있단 말이야, 이 세상에... 정의와 부정의가 있잖아? 그러면 우리는 생각이 정의(正義) 입장에 서서 언제나 생각을 하거든. 그러니깐 그 정의 입장이 무엇인가 하면은 1910년에 우리가 이완용이 하고 이등박문이 하고 둘이 딱 했잖아. ‘야, 조선을 갖다가 우리 일본하고 합병을 하자’ 도장 딱 찍고... 도장을 딱 찍고, 그때 어떻게 해요. 조선군들을 해산시켰죠. 그래 가지고 일본군대가 편입을 시켰어요... 그러니깐 조선군들이 편입시키니깐 어떤 사람들이 조선군대에서 일본군대로 가고, 어떤 사람들은 조선군대 해산시켜서 일본군대에 편입을 못하겠다고 해가지고 뛰쳐나온 거야. 의병운동이야... 그러니까 나는 어떤 편이냐? 이완용이 편이 아니야. 나는 의로운 사람들 편이여... 시방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깐 나는 그게 정의의 편이라 생각하고.

김영식 선생은 약속시간보다 약간 늦게 왔다. 토요일 오후의 교통사정 때문이었는데, 김 선생은 수원에서 열린 노동자집회에 다녀온 길이었다. 늦어서 미안하다면서,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큰 목소리로 저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 ‘마음’이란 정/부정을 판별하는 원초적인 양심의 감각 같은 것을 뜻하는가? 정의와 부정의(不正義), 의병과 이완용. 한편으로 우리는 약간 놀랐다. 김 선생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에서 구사된 논리가 단순했고, 그 말투도 설득적이거나 차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장기수”라는 말을 들으면 당신은 어떤 인물을 떠올리는지? 김영식 선생이 가진 면모는 우리의 선입견을 초과하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장기수가 된 인물들이 원래부터 투철한 사회주의자나 김일성주의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권으로부터 “영원한 격리”를 선고받고 최소 십 수년씩 옥살이를 하면서, 그들의 신념과 양심에 대한 감각은 세계 최강의 것으로 단련되었을 것이다. 내적으로는 허약하고 자신감 없었던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이 단련의 불길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장기수들을 생각하면 “신념, 고문, 투쟁, 학습”과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그들의 대부분은 이미 노인네이지만, 그 면모는 여느 평범한 노인들과는 좀 다르다. 속골병이 들었을지는 몰라도 38선을 넘나들고, 시대를 가로지르며 투쟁해온 그 눈빛은 형형하다. 햇볕에 덜 노출된 피부는 맑아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 정치범에게는 노역을 시키지 않고, 운동 시간도 조금밖에 허용하지 않는 한국의 행형정책 덕분이기도 하다. 김영식 선생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또다른 장기수 출신 서옥렬 선생과 대화를 나눌 기회를 덤으로 얻는 행운을 누렸다. 서옥렬 선생은 송도정치경제대학을 졸업하고, 1960년에 남파되어 61년 5월 북으로 귀환하는 도중에 검거되어 딱 30년을 감옥에서 보냈다고 한다.(*2) 도저히 나이(74세)대로 보이지 않는 그는 출옥한 이후에 사람들이 빨리 늙는다고, 작년부터는 사람들이 나이대로 자기를 봐서 ‘기분이 무척 나쁘다’고, 농담도 했다. 우리가 쉼터에 도착했을 때, 그는 얼마전 새로 창간된 <민족 21>이라는 잡지를 읽고 있었다. 스탠드를 켜 놓고, 책에 줄을 그어 가면서 말이다. 그가 우리에게 물었다. 그리고 ‘장기수’의 이미지에 대해 스스로 이야기했다.

서옥렬 선생: 내가 인텔리로 보여요? 퍼슨웹: 예. 서옥렬 선생: 그게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 장기수라고 하면은 좁은 공간에 살고 거 안에서도 그냥 억압되고, 학대받고 이렇게 살다보니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지가 형성이 되거든요. 이게 장기수라고 할 때는 현재 대한민국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7년 이상을 치고 있잖아요. 7년 이상을... 7년 이상을 살다 보면은... 버릇이 배는 건데. 내가 봐도 그래요. 한 두 마디 얘기하고 나면은 ‘아~ 저 사람은 장기수 같이 보인다’ 그런 생각이 들지.

그런데 1시간이 되지 않는 짧은 대화의 시간동안, 꼿꼿한 서옥렬 선생께 우리는 자주 핀잔을 들어야 했다.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그런 것도 모르느냐!” 강화와 김포 사이에 있다는 염화강 지명을 몰라서, 또 송도정치경제대학의 성격이나 북한의 교육 체제를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기관지가 안 좋다면서도 선생은 계속 라일락 담배를 피우셨다. 한국의 법정에서 총 6번의 사형 구형과 선고 소리를 들었다는 그는 “이래 봬도 나 실은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예요.”하며 웃었다. 이 말에 나는 “예, 사실 무서우신데요.”라며 따라 웃었다. 비록 웃었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작년 여름, 장병락 선생(작년 9월 북한으로 송환되었다.)을 인터뷰(http://www.personweb.com/work&people/jangbr15/jbr1.htm)하고 온 홍당무는 ‘어땠냐?’는 내 질문에 ‘생각하면 살 떨린다’고 했다. 이유인즉, 장병락 선생은 아직도 자신이 “공화국과 김일성 장군의 붉은 전사”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신념과 이념적 엄정함은 한편으로는 그 자신의 인간됨을 지키기 위함에서 나온 것일 테지만, 분명 우리 같은 보통의 인간들이 짐작할만한 수준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남북의 대결이 계속 되고 있는 한, 비록 늙었지만 그들은 ‘무서운’ 존재일 수 있는 것이다. 군사정권이 그들을 죽이지 못해 안달한 것도, 따위들이 그들을 북에 송환하는 데에 있어 온갖 훼방을 놓은 것도, 결국 그들이 무서운 존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인터뷰 자리에 그들을 초대하는 것도 그들이 ‘무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2.1 # 촌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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