眞誠悛換

是非轉換而悛換也哉 ![ | ]

眞의 패러다임이 가치의 체계 속에서 얽히고 섥힌 단자들의 정렬 작업이었다면, 유한하지만 존재(live가 아닌 exist)하는 인간이 다시 개입할 여지를 확보하고 있는 誠의 패러다임.

근대적인 맥락에서 볼 때, 眞이란 결국 性으로 理를 格할 때 파생되는 가치 판단일 뿐이다. 性에 대한 논의를 무시한 상태에서 이루어 지는 眞에 관한 어떠한 이야기들도 是非를 가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

誠은 인간이라는 제한된 종을 초월하여 宇와 宙를 관통한다. 가치는 인간의 가치이지만 시간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선험적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眞의 패러다임에서는 시간이란 인간에 속하는 것이었으나 誠의 패러다임에서 시간은 인간에 국한되지 않은 시간의 의미를 되찾게 된다. 하지만, 誠의 패러다임 하에서도 역시 인간에게는 여전히 인간 자신의 구체적인 시간만이 유의미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적어도 이것이 예전과 같이 전적으로 객관적이라는 탈을 뒤집어 쓰고 나타나지는 않는다. 주관과 객관은 이제 미완의 가능태의 서로 다른 양상일 뿐이다.

誠은 性과 동급(level)의 개념으로까지 격상되어야만 한다. 아니, 실은 meta性으로서의 誠마저 가능하다.

예를 들어 비교해 보자면,

  1. 眞의 패러다임 상에서 무겁지 않은 담론은 허구이거나 허무일 수밖에 없는데 이는 가치 체계와 역사적 현실이 만들어 내는 모순의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2. 하지만, 誠의 패러다임은 진지함이나 무거움이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誠이 가볍다고 이야기 할 수도 없다. 정서의 경중은 습관과 관성의 때가 덕지덕지 앉은 때문이지 그것이 본질의 무게이기 때문은 아니므로.
  3. 가치 판단에 첨점(그 구체적인 발현의 대표적인 예가 최종 심급 정도로 표상되는 the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다시금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강줄기로 ; 따라서 더욱 강인한 체력이 필요하다. 즐거움은 그 다음 문제다. (사실 즐거움과 誠은, 아직까지는, 같은 분기점을 가지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4. 誠의 맹점 : 천황은 오타쿠를 만들었다. -> 시스템 전체에 대한 誠한 자세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 지는 가는 아직은 誠과 별개인 것으로 보일 수 있으리라. 어떻게 조율이 가능할 것인지는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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