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폰 비스마르크

Pinkcrimson (토론 | 기여)님의 2017년 7월 11일 (화) 16:15 판 (→‎참고)

1 개요

Bismarck, Otto Eduard Leopold, von Fürst
Otto Eduard Leopold Fürst von Bismarck-Schönhausen(독일어)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트 폰 비스마르크쇤하우젠 후작(1815년 4월 1일 ~ 1898년 7월 30일)
  • 독일을 통일하여 독일 제국을 건설한 프로이센의 외교관이자 정치인
  • 프로이센의 수상으로 임명된 후,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써서 프로이센ㆍ오스트리아, 프로이센ㆍ프랑스 전쟁에서 승리
  • 1871년에 독일 통일을 완성한 후, 신제국의 재상이 되었음
  • 유럽 외교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안으로는 가톨릭교도,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였음

   

  • 1836년, 21세 청년때의 비스마르크

 

  • 붉은색이 북독일 연방이며, 남독일의 국가들과 알자스-로렌은 1871년 북독일 연방과 함께 독일 제국으로 편입되었다

2 평가와 비판

  • 평가
  • 역사가들은 독일의 정치 문화에서 지난 125년 동안 비스마르크의 이미지가 지닌 중요성과 기능과 내용에 관한 폭넓은 합의를 이루어냈다.[30][31] 독일 역사에서 최초로 통일을 이룩했던 정치가로 독일을 진정한 강대국 대열에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32] 수 백년간 지속된 독일권의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강력한 민족국가로서의 독일제국을 탄생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1860년대 초반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 독일권의 통합과정에서 적지 않은 장애 요인들과 직면했는데 그럴 때마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여 그러한 장애요인들을 효율적으로 제거했다.[33] 독일제국 수상으로 있을 때 비스마르크는 '세계 최초로 의료보험, 산재보험, 노인복지법' 등 정책을 실행하여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란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남겼다. 이 부분에 대해선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 라는 평가가 있다
  • 비판
  •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책 실현과 관련하여 여론의 공감대를 얻고자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과 여론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대해 배려하는 자세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 있어서 부정적 시각이 있다. 비스마르크는 철저한 '현실정치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그의 자세는 정책에 대한 불만 세력의 결집 및 활동의 원인이 되기도 했으며 훗날 빌헬름 2세와의 갈등에서 대중들이나 정당들로부터 인기를 얻지 못했다는 점에 있어서 부정적인 평가가 있다

3 같이 보기

4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