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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4-1901) ===
후쿠자와 유키치는 메이지(明治) 시대에 활약한 재야의 계몽사상가이다. 지금의 명문 사학인 게이오 대학(慶應義塾大學)을 창설하였고, 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를 창간하였다. 1873년에는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등과 함께 문화 단체인 명육사(明六社)를 만들고, 『명육잡지』(明六雜誌)를 발행하면서, 새로운 서양의 문화와 사상을 보급하는 일에 힘을 쏟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생애 100여 권이 넘는 저작을 남겼다. 특히 1872년에 간행을 개시한 『학문의 권장』(學問のすすめ)은 17편까지 모두 340만 부나 팔려나가는 경이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후쿠자와는 이 책에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며, 사람의 가치는 학문이 있고 없음에 따라 결정된다고 설파하였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하는 것이 나라가 독립하는 기본이라면서, 문명이 발달한 열강에 맞서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당시 일본은 구미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 문명개화(文明開化)의 길을 쉬지 않고 달려가고 있었고, 후쿠자와는 바로 그 선두에 서서 일본인을 이끄는 한편 게이오 대학을 만들어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가 남긴 사상적인 영향력은 현재 일본의 만엔권 지폐에 그의 얼굴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평등과 학문의 소중함 그리고 서구 문명을 동경하는 후쿠자와의 자세는 그의 성장 과정과 이력을 통해 서서히 형성된 것이다. 후쿠자와는 오사카(大阪)에 있는 나카츠 번(中津藩)의 구라야시키(藏屋敷=저택)에서 하급무사의 2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아버지(福澤百助)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2세가 되던 해에 지금의 오이타 현(大分縣)에 위치한 나카츠 번으로 돌아오게 된다. 나카츠 번은 특히 신분 차별이 극심하여, 아이들의 경우에도 하급무사의 아이들은 신분이 높은 상급무사의 아이들과 서로 대등하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 당시 후쿠자와는 이처럼 신분이 높은 자들이 위세를 부리는 세상에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또 후쿠자와는 신이 정말로 벌을 내리는 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 12세가 되던 무렵 신사(神社)에 있던 부적(お札)을 짓밟아 보기도 하고, 또 화장실에서 써 보기도 하면서 벌이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후쿠자와가 형의 권유로 난학(蘭學)을 공부하기 위해 나가사키(長崎)로 떠난 것은 1854년, 즉 미국의 페리가 군함을 이끌고 나타나 일본에 개항을 요구한 다음해의 일이다. 그 후 1년 뒤에는 오사카의 오가타 코안(緖方洪庵)의 글방(塾)으로 자리를 옮겨 네덜란드어로 된 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1858년에 나카츠 번의 명령으로 에도(江戶)에 난학숙(蘭學塾)을 연 후쿠자와는 요코하마(橫浜)를 방문한 자리에서 일상적으로 활용되는 영어의 중요함을 깨닫고는 난학 대신에 영학에 몰두하기 시작한다.<br/>
그러는 가운데 후쿠자와는 1860년에서 1868년까지 에도막부에 봉공하는 가운데 세 차례에 걸쳐 막부의 견외사절단(遣外使節團)에 참가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하여 구미의 발달한 공업과 남녀평등 등을 실감하게 된다. 그가 1866년에 저술한 『서양사정』(西洋事情)은 바로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을 문명국으로서 자립시켜야 한다는 사명감 속에서 세계 각국의 역사와 정치제도 등을 소개한 저작이다. 이외에도 후쿠자와는 앞에서 말한 『학문의 권장』과 『문명론지개략』(文明論之槪略, 1875)를 저술하여, 문명개화를 강조하였다.<br/>
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에게서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1880년대부터 그가 국권을 강조하고, 「탈아론」(脫亞論, 1885)을 주창하면서 서구화와 아시아 침략이라는 제국주의 노선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는 점일 것이다. 조선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던 후쿠자와는 임오군란(1882) 후 조선에서 청의 세력이 증대되자 조선의 급진개화파를 적극 지원하였다. 후쿠자와는 급진개화파가 이러한 지원을 토대로 조선의 정치를 개혁한다면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후쿠자와의 기대는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1884)이 실패함으로써 좌절되었다. 「탈아론」은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85년 3월에 『시사신보』(時事新報)에 발표된 후쿠자와의 사설이다. 여기에서 후쿠자와는 더 이상 조선과 청의 서구화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에 대항하여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려면, 하루빨리 서구화를 이룩함으로써 열강의 반열에 들어서는 길밖에 없다고 역설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이 서구화를 달성한 다음에는 서구 열강과 똑같은 방법으로 청과 조선을 취급하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 「탈아론」은 조선의 지배를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청과의 군사 대결을 부추기는 침략 사상으로 자리잡아 간다. 그리고 드디어 청일전쟁(1894-1895)이 일어나자 후쿠자와는 이를 문명과 야만의 충돌로 규정하고 열렬하게 지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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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는 메이지(明治) 시대에 활약한 재야의 계몽사상가이다. 지금의 명문 사학인 게이오 대학(慶應義塾大學)을 창설하였고, 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를 창간하였다. 1873년에는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등과 함께 문화 단체인 명육사(明六社)를 만들고, 『명육잡지』(明六雜誌)를 발행하면서, 새로운 서양의 문화와 사상을 보급하는 일에 힘을 쏟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생애 100여 권이 넘는 저작을 남겼다. 특히 1872년에 간행을 개시한 『학문의 권장』(學問のすすめ)은 17편까지 모두 340만 부나 팔려나가는 경이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후쿠자와는 이 책에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며, 사람의 가치는 학문이 있고 없음에 따라 결정된다고 설파하였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이 독립하는 것이 나라가 독립하는 기본이라면서, 문명이 발달한 열강에 맞서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당시 일본은 구미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 문명개화(文明開化)의 길을 쉬지 않고 달려가고 있었고, 후쿠자와는 바로 그 선두에 서서 일본인을 이끄는 한편 게이오 대학을 만들어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가 남긴 사상적인 영향력은 현재 일본의 만엔권 지폐에 그의 얼굴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평등과 학문의 소중함 그리고 서구 문명을 동경하는 후쿠자와의 자세는 그의 성장 과정과 이력을 통해 서서히 형성된 것이다. 후쿠자와는 오사카(大阪)에 있는 나카츠 번(中津藩)의 구라야시키(藏屋敷=저택)에서 하급무사의 2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아버지(福澤百助)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2세가 되던 해에 지금의 오이타 현(大分縣)에 위치한 나카츠 번으로 돌아오게 된다. 나카츠 번은 특히 신분 차별이 극심하여, 아이들의 경우에도 하급무사의 아이들은 신분이 높은 상급무사의 아이들과 서로 대등하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 당시 후쿠자와는 이처럼 신분이 높은 자들이 위세를 부리는 세상에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또 후쿠자와는 신이 정말로 벌을 내리는 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 12세가 되던 무렵 신사(神社)에 있던 부적(お札)을 짓밟아 보기도 하고, 또 화장실에서 써 보기도 하면서 벌이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후쿠자와가 형의 권유로 난학(蘭學)을 공부하기 위해 나가사키(長崎)로 떠난 것은 1854년, 즉 미국의 페리가 군함을 이끌고 나타나 일본에 개항을 요구한 다음해의 일이다. 그 후 1년 뒤에는 오사카의 오가타 코안(緖方洪庵)의 글방(塾)으로 자리를 옮겨 네덜란드어로 된 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1858년에 나카츠 번의 명령으로 에도(江戶)에 난학숙(蘭學塾)을 연 후쿠자와는 요코하마(橫浜)를 방문한 자리에서 일상적으로 활용되는 영어의 중요함을 깨닫고는 난학 대신에 영학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러는 가운데 후쿠자와는 1860년에서 1868년까지 에도막부에 봉공하는 가운데 세 차례에 걸쳐 막부의 견외사절단(遣外使節團)에 참가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하여 구미의 발달한 공업과 남녀평등 등을 실감하게 된다. 그가 1866년에 저술한 『서양사정』(西洋事情)은 바로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을 문명국으로서 자립시켜야 한다는 사명감 속에서 세계 각국의 역사와 정치제도 등을 소개한 저작이다. 이외에도 후쿠자와는 앞에서 말한 『학문의 권장』과 『문명론지개략』(文明論之槪略, 1875)를 저술하여, 문명개화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에게서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1880년대부터 그가 국권을 강조하고, 「탈아론」(脫亞論, 1885)을 주창하면서 서구화와 아시아 침략이라는 제국주의 노선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는 점일 것이다. 조선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던 후쿠자와는 임오군란(1882) 후 조선에서 청의 세력이 증대되자 조선의 급진개화파를 적극 지원하였다. 후쿠자와는 급진개화파가 이러한 지원을 토대로 조선의 정치를 개혁한다면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후쿠자와의 기대는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1884)이 실패함으로써 좌절되었다. 「탈아론」은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85년 3월에 『시사신보』(時事新報)에 발표된 후쿠자와의 사설이다. 여기에서 후쿠자와는 더 이상 조선과 청의 서구화를 기다릴 시간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에 대항하여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려면, 하루빨리 서구화를 이룩함으로써 열강의 반열에 들어서는 길밖에 없다고 역설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이 서구화를 달성한 다음에는 서구 열강과 똑같은 방법으로 청과 조선을 취급하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후 「탈아론」은 조선의 지배를 실현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청과의 군사 대결을 부추기는 침략 사상으로 자리잡아 간다. 그리고 드디어 청일전쟁(1894-1895)이 일어나자 후쿠자와는 이를 문명과 야만의 충돌로 규정하고 열렬하게 지지하였다.
후쿠자와는 일본에서는 근대 일본의 문명개화를 선도한 계몽사상가로 추앙받는 인물이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와는 정반대로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사상적인 측면에서 뒷받침한 정신적 지주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대한 한일 양국의 상반된 평가와 유사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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